미국 플로리다에서 쿠바 까지는 75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입니다 당연히, 한국에서 쿠바 가는 것보다 미국에서 쿠바 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신연수’의 장점을 살려, 이번 겨울엔 따뜻한 곳에서 2011년 크리스마스와 2012년 새해를 맞고 싶어 훌쩍 쿠바로 떠났습니다. 역시 미혼여성이며 쿠바여행 의지가 강한, 미국에서 유학중인 친구도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여행 1단계 준비인 항공권 구입부터 난관에 부닥쳤습니다. 쿠바는 미국의 적성국이라 직항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멕시코 칸쿤에서 아바나로 가는 경로를 택했습니다. 칸쿤에서 아바나까지 오가는 여행사는 멕시코 항공사인 와 쿠바 항공사인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www.kayak.com, www.expedia.com 같은 전세계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저가 항공권 구입 사이트에 들어가서 칸쿤-아바나 왕복티켓을 찾아보았으나 `검색오류’ 만이 떴습니다. 이유는 미국의 경제제재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에선 쿠바 관련한 항공권 구매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가격을 비교해서 티켓을 구입하는 저가 항공권 구입 대신 이번엔 직접 에어로멕시코와 쿠바나 아비옹 사이트에 들어가보기로 했습니다. 쿠바나 아비옹은 칸쿤에~아바나 왕복이 30여만원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쿠바 여행기를 검색해보니, 쿠바나 아비옹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가 담긴 리뷰가 많았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갑자기 기내 바닥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든가, 실수로 놓친 비행기가 나중에 알고보니 추락했다며 자신은 다행히 목숨을 건져 이 후기를 올리고 있다든가, 쿠바 비행기는 낡은 러시아제 비행기이기 때문에 사고가 잦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어, 이번엔 에어로멕시코를 뚫어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에어로멕시코는 당연히 자신들이 직접 팔고 있는 항공권이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구매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일정을 검색해보니 아바나행은 아예 나오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안되는 영어로나마, 뉴욕에 지사가 있는 에어로멕시코 회사에 전화를 걸어보았습니다. 코리안잉글리쉬와 스페인잉글리쉬가 힘겹게 오간 끝에 이해한 것은, 아바나행 티켓은 멕시코 현지에 가서만 오프라인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엔 미국에서 사귄 멕시코 친구한테 도움을 요청해봤습니다. 그녀로부터 돌아온 대답 역시 멕시코인들 역시 현지에서만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칸쿤에서 한참 떨어진 멕시코 시티 근처 멕시칼리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항공권을 구입하더라도 제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시 쿠바여행 관련 인터넷카페에 문의해보니, 한국에서 운영하는 에어로멕시코 지사에서 항공권을 구입하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에어로멕시코 지사는 한국에 없었고, 대신 이 회사 티켓 구입을 대행하는 에이전시만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터넷피싱을 한번 겪은 경험이 있던 터라, 홈페이지도 없는 이 회사를 믿을 수 없어, 주한 멕시코대사관에 전화를 걸어본 결과 그 에이전시가 항공권 구매를 대행하는 회사가 맞다는 대답을 듣고 에이전시에 항공권 문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구입하는 에어로멕시코의 칸쿤-아바나 왕복 티켓은 100만원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이건 아니다 싶어, 이번엔 항공사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쿠바를 제외한, 대부분의 카리브해 국가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는 한 한국계 미국인이 이번엔 비행기가 위험하다면 `배’를 이용해보는 게 어떻냐는 진심 어린 조언을 했습니다. 다시 쿠바여행 관련 카페에 글을 올려 “배편은 없나요?”를 물었습니다. 댓글은 “배편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설혹 배가 있더라도 더 위험합니다. 왜 비행기 두고 배까지 알아보십니까”는 취지였습니다. 알아보니, 한국에선 캐나다항공사를 이용해 캐나다에서 아바나까지 쉽고 안전하게 올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캐나다를 거쳐 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워싱턴 디시에서 캐나다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올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목숨값’이라는 심정으로, 30여만원 쿠바나 아비옹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매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결과 원점에 이르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나흘. 과연 삽질이라고 할 만했습니다. 막상 이용해보니, 쿠바나 아비옹은 제때 오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별 이상이 없더군요. 쩝.
항공권을 구입하고 나니, 이번엔 몇 달 전 바하마를 거쳐 쿠바를 다녀온 후배가 또다른 종류의 조언을 했습니다. 쿠바는 미국의 적성국으로,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나라가 많아 해당 국가에서 비자 발급이 불가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여행객들은 공항에서 25달러 가량 주고 쿠바 비자를 구입해 입국하고, 출국할 때도 역시 그만큼의 돈을 내고 나옵니다. 이 때문에 여권엔 입출국 기록이 남지 않는 거죠. 그 후배 말은, 미국에서 멕시코 갈 때 입국 도장 찍고, 쿠바로 갈 때 또 출국 도장 찍고, 또 쿠바에서 멕시코 들어갈 때 입국 도장 또 찍고,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돌아갈 때 또 출국 도장을 찍게 되는데, 이것이 미국 입국 심사대에서 꼬투리가 잡힐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멕시코를 들락날락 거렸는데, 정작 어디를 갔다왔는지가 여권엔 안 나와 있는 겁니다. 미국 입국 심사 과정에서 쿠바를 다녀왔다고 하면 좋게 보지 않기 때문에 까다로운 질문을 하고 최악의 경우엔 입국이 안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아시다시피, 모든 입국자를 불법난민자로 전제하는 듯, ‘우리 집에 왜 왔니’식의 미국 공무원들 앞에서 얼마나 움츠러 듭니까. 그 후배는 이 때문에 쿠바에서 바하마로 들어올 때 입국 도장을 찍지 말아 달라고 했더니, 바하마 관리는 씩 웃으며 스탬프를 내려놨다고 했습니다. 저도 멕시코에서 마찬가지로 도장을 찍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멕시코 공무원은 도장을 꽝 찍고 여권을 건네줬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칸쿤공항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여행 마지막까지, 맘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미국 심사관은, 여권 입출국 기록은 보지 않고 J1 비자의 중요 서류인 DS2019만 유심히 본 뒤, “진짜 학교 다니는 거 맞냐?” “마지막으로 학교 간 게 언제냐?”고 묻고 통과시켰습니다. 미국과 쿠바의 껄끄러운 관계는, 쿠바를 다녀왔다고 해도 한국 시민권자로 합법적인 여행을 한 저까지 쫄게 만든 것입니다. 참고로 미국 시민권자들은 쿠바를 다녀오려면 미국 국무부에서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미국과 쿠바의 갈등은 19세기 후반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5세기 콜럼버스가 쿠바를 다녀가고 이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이래, 쿠바의 역사는 독립과 자유를 열망하는 투쟁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1868년부터 1898년까지 쿠바인들은 스페인에 맞서 ‘10년 전쟁(1868~1878년)’ `작은 전쟁(1879~1880년)’, `독립전쟁(1895~1898년)’을 치렀습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승리의 길로 향하고 있던 무렵인 1898년 4월엔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스페인-미국-쿠바 전쟁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은 쿠바에 직접 발을 들여놓기 훨씬 이전부터 쿠바에 군침을 삼켜왔습니다. 멕시코만과 카리브해 들머리에 있는 쿠바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입니다. 미국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는 “나무에서 익은 과일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스페인이 쿠바 에서 손을 떼면 쿠바 역시 중력에 의해 미국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중력이론’을 펼쳤다고 합니다. 미국은 쿠바와 스페인과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중립적 개입’ 정책을 발표하고 전쟁과 평화협정 과정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됩니다. 1899~1902년 군정이 끝난 뒤엔 친미성향의 정치인을 후원해 정권을 잡도록 하고, 역시 친미 성향의 쿠바 엘리트들을 관료 조직에 대거 기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치도록 합니다. 쿠바 영토인 관타나모에 미국이 해군 기지를 위한 땅 임대권을 갖게 된 것도 이때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쿠바는 미국 도박업체들이 차린 카지노가 넘쳐나고 매매춘이 성행하게 돼 마치 미국의 ‘공중화장실’ 같은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1959년 1월 혁명에 성공한 피델은 넉달 뒤인 5월 미국 소유의 재산 몰수,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고 1960년엔 정유 등 미국기업이 투자한 산업을 국유화합니다. 미국은 이에 설탕수입에 제한조치를 취하고 다른 물품에도 금수조치를 단행했습니다. 1962년엔 미국이 주도하던 미주기구(OAS)가 쿠바를 축출하고, 같은 해엔 쿠바를 놓고 미국과 소련이 대립한 ‘쿠바 미사일위기’가 벌어집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소련이 쿠바에 있던 미사일을 철수하고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동의함으로써 마무리됐지만, 미국은 이후에도 미주기구의 대쿠바제재안을 통과시켰고 1991년 옛소련 몰락 이후엔 대쿠바 무역 제한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특히 1996년 발효된 헬름스-버튼법은 쿠바와 거래하는 외국 기업의 경영진 주주 가족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고 1959년 쿠바혁명으로 쿠바에 5만달러 이상의 재산을 억류당한 미국인이나 기업들이 쿠바에 투자한 외국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청구를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쿠바에서 두 나라 갈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물리적 장소는, 아바나에 있는 미국 이익대표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익대표부란,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은 상대국의 영사 문제와 그밖의 일상적인 외교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설치하는 것으로, 미국은 카터 대통령 시절 1970년대 옛 미국대사관 건물에 이익대표부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쿠바는 미국을 조롱하는 의미로 이익대표부 옆에 ‘반제국주의 광장’을 설치했습니다.
미국은 지난 2006년 쿠바 정부에 투옥된 쿠바 반체제인사들의 인권을 문제삼으며 이익대표부 전면에 민주주의, 인권을 홍보하는 전광판을 설치했고, 쿠바는 이에 맞서 미국이 이라크 포로들을 학대하는 사진을 대표부 주변에 걸었습니다. 또한 미국이 일으킨 테러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의미로 검은 깃발들을 높이 세워 이익대표부 건물을 가리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지난 1월7일 이곳을 찾았을 때는 쿠바 국기 수십여개가 바람에 휘날리며 이익대표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아바나에 있는 미국 이익대표부. 쿠바 국기에 에워싸여 건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반제국주의 광장에선 `애국 아니면 죽음’ 같은, 커다란 글씨로 적힌 선동 구호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두 나라 관계는 다소 개선됐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미국은 쿠바와 새로운 시작을 추구한다”고 표명했고 쿠바 출신 미국인의 모국 여행과 송금에 대한 제한을 해제했습니다. 2011년에도 종교, 학술 분야에 대한 교류도 허가해 미국인들이 좀더 자유롭게 쿠바와 접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익대표부에 설치된 쿠바 정부 비난 전광판 전원도 내렸고요.
직접 만나본 쿠바 사람들은 “앉으면 노래, 서면 춤”이라고 할 정도로, 참으로 가무를 사랑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술집과 카페에선 라이브 공연이 펼쳐지고,
쿠바에선 어디를 가나 수준 높은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산티아고 데 쿠바의
낮이나 밤이나 노래가 있는 곳에선 자연스럽게 남녀가 손을 잡고 일어서 살사를 춥니다. 쿠바혁명 이전 쿠바 음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음악인들을 찾아내 음반 (환영받는 사교클럽이라는 뜻)을 만든 미국 기타리스트인 라이 쿠더는 “쿠바에서 음악은 강물처럼 흐른다”고 했는데, 과연 쿠바에선 음악은 강물을 넘어 홍수처럼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쿠바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 중 하나가 였는데요, ‘관타나모 지방의 아가씨’라는 뜻의 관타나메라는 1929년 작곡가 호세이토 페르난데즈가 만든 노래에 독립운동의 아버지인 호세 마르티의 시를 붙인 것입니다. 나중에 가사를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더군요. 아름다운 구절이어서 잠깐 소개합니다.
관타나모의 여인이여, 관타나모의 시골 여인이여,
나는 종려나무가 자라는 마을 출신의 진실한 사람이라오
내가 죽기 전에
나는 내 영혼의 시를 쓰고 싶어요.
나의 시는 연둣빛이지만
늘 정열에 불타는 진홍색입니다.
나의 시는
상처를 입고 산에서 은신처를 찾는 새끼사슴과 같아.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나는 시를 뿌리고 싶네.
바다보다 산속의 시냇물과 함께 하겠네.
쿠바의 춤 살사는 여행기간 내내 제게 갈증의 대상이자 두려움이었습니다. 살사는 소금이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살(sal)’과 소스라는 뜻의 `salsa’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쿠바 말고도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살사를 춥니다. 기본 동작은 남녀가 마주 서서 손을 잡은 후 밀고 당기는 기본 동작과 손을 엇갈려 잡았다가 복잡하게 회전하는 응용 동작들이 있는데 조금 추면 숨을 헐떡일 정도로 격렬합니다. 하지만 블루스와는 달리 끈적끈적하지 않으며 경쾌하고 건전한 느낌을 주는 춤입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트리니다드라는 곳에선 라는 술집 앞에서 매일 밤마다 새벽까지 `자연발생 살사 축제’가 펼쳐집니다. 카사 데 무지카 앞엔 넓은 광장이 있는데 여기에 위아래로 계단이 있어 밤엔 자연스럽게 무대로 변신합니다. 밤 9시부터 살사를 위한 연주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남녀 쌍을 이뤄 손을 잡고 살사를 춥니다. 제가 본 한 20대 백인여성은 트리니다드 도착 첫날엔 `몸치’처럼 뻣뻣하게 추더니,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몇시간씩 몸을 움직인 끝에 며칠 뒤엔 장족의 발전을 이뤘더군요. 사실 저도 추고 싶었지만 스텝도 전혀 모를뿐더러 파트너가 없어 부러운 눈길로 쳐다만 보았습니다. 결국 8달러 상당의 돈을 주고 민박집 옆집 아주머니로부터 한시간 살사를 배웠으나 택도 없었습니다. 트리니다드를 떠나기 전날 밤 카사 데 무지카 앞에 앉아있던 저를, 춤추고 싶어 안달 난 50대 중반의 쿠바 아저씨가 손을 잡고 끌어냈습니다. 이후, 저는 춤이란 게 엉키면 어디까지 가는지 명확하게 보여줬습니다. 당시엔 스텝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관광객 수백여명이 저를 지켜보며 엄청 웃었다고, 친구가 전하더군요. 저는 이후 트리니다드에서 만난 다른 관광객들과 동선이 겹칠 때마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곤 했습니다. 다행히, 쿠바 동쪽의 대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에 갔을 때, 마을회관과도 같은 분위기의 술집에서 루이스라는, 아주 인내심 있는 아저씨를 만나 잠깐 살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쿠바에선 음악이 있는 곳에선 누구나 일어서서 살사를 춘다. 산티아고 데 쿠바의 에서 필자(왼쪽)가 동네 아저씨로부터 살사 스텝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쿠바에서 돌아온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노래와 춤뿐 아니라 쿠바 사람들의 미소였습니다. 물론 관광객에게 쉴새없이 접근하는 삐끼(히네떼로 Jinetero)들 때문에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쿠바인들은 기본적으로 낙천적이고 낯선 사람들에게 마음을 잘 여는 개방적인 성격입니다. 2012년 새해 첫날, 산티아고 데 쿠바의 한 주택가를 걷고 있는데, 길 한쪽에 솥을 걸어놓고 마을 주민들이 설날 돼지고기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친구가 둘이서 카메라를 메고 걸어가는 걸 보더니, 이 동네 젊은이 한무더기가 저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며 온갖 포즈를 취했습니다.
2012년 새해 첫날 산티아고 데 쿠바 주택가에서 만난 주민들. 낯선 관광객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며 활짝 웃고 있다.
너도나도 카메라 앞에서 몰려와 활짝활짝 웃었고, 한켠에선 자신들이 마시던 럼주를 계속 컵엔 따라주며 권했습니다. 삼십분 정도 낯선 사람들과 카메라 놀이를 하다가, 얼굴이 불쾌해져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솥을 뒤로 하고 걸었습니다.
쿠바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소를 뽑으라고 하면 저는 말레콘을 꼽고 싶습니다. 수도 아바나를 감싸고 있는 해변 말레콘은, 해안선을 온통 콘크리트로 발라놓았지만, 낡고 낡은 도시에 숨통을 트여주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저는 평소 `반(反) 공그리’ 주의자이지만, 말레콘의 콘크리트 해안에서 묘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바닷가에서 자동차도로 하나를 건너면 바로 사람 사는 건물들이 있기 때문에 파도와 해일에 대비해 해안선을 콘크리트로 굳힐 수밖에 없었을 텐데, 아무런 치장과 장식이 없는 단순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말레콘 해변에서 사람들은 낚시도 하고 수영도 하고 운동도 하고 낮잠도 자고 얘기도 하고 연애도 합니다.
‘도심해변’ 말레콘. 아바나 시민들로부터 사랑받는 휴식처이다.
검푸른 바닷물, 철썩철썩 밀려들며 흰 포말을 날리는 파도, 평화로운 사람들의 풍경 속엔 쿠바인 특유의 씩씩하고도 정다운 모습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아무리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어도 쿠바는 참으로 가난한 나라입니다. 1980년대 후반에 아바나를 방문한 한 작가가 낡아서 허물어져 가는 건물들을 보면서 “너무나 충격적이다. 이 도시는 흰색 페인트 1천만달러 어치가 필요하다”고 했다는데, 몇몇 지역을 빼면 대부분의 집들은 너무 낡고 초라합니다. 건축자재가 만성적으로 부족한 거죠. 아바나에 처음 도착한 날 밤, 조명도 별로 없어 캄캄한 도시 한복판에서 허물어져 가는 집들이 즐비한 센트로 아바나 거리를 걸으며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는지 모릅니다. 의약품도 부족합니다. 쿠바 여행 중 길거리에서 넘어져 무릎에 붙일 밴드를 사러 약국에 갔더니, 약사는 밴드가 없다며 외국인들이 많이 가는 5성호텔에 가서 사라고 일러줬습니다. 모래벼룩에 심하게 물려 약을 사러 갔을 때도 마땅한 약이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 가렵다고 거듭 말하며 부탁하자 과산화수소수 비슷한 것을 줬습니다. 10여일 가까이 가려움증 때문에 고생했는데 나중에 멕시코에서 만난 간호사 출신의 한 스웨덴 여행자가 스코틀랜드제라며 약을 한번 발라줬는데 그뒤 바로 가라앉더군요.
일상 생활에 쓰이는 물자도 무척 귀했습니다. 쿠바 사람들이 관광객들로부터 얻기를 원하는 물건 중 하나가 볼펜입니다. 저는 이번에 볼펜을 하나만 가져갔기 때문에 나눠줄 수 없어서 제 볼펜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볼 때마다 미안해졌습니다. 또 쿠바에선 웬만하면 비닐봉지도 나름 귀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가져간 플라스틱 봉지를 내내 갖고 다니며 아껴 썼습니다. 쿠바에 있다가 일회용 용품을 마구 쓰고 마구 버리는 미국으로 돌아오니 참으로 낯설더군요.
하지만 남미국가들 중 쿠바가 의료선진국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피델과 함께 쿠바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 뿐 아니라 혁명군 중 많은 이들이 의사였기 때문에 보건의료는 혁명의 주요 과제였습니다. 미국 버팔로대의 도시학과 교수이자 아바나 이웃공동체를 연구한 헨리 루이스 테일러에 따르면, 미국이 보건의료에 국민총생산의 14%를 지출하는 데 비해 쿠바는 7%만 지출합니다. 의료비는 미국이 1인당 4540달러, 쿠바는 1인당 193달러를 쓴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아사망률과 기대 수명 지표를 보면 쿠바는 미국과 실질적으로 동일합니다. 혁명군은 의사배출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의사들을 기반으로 무상 보건의료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남미에서 가장 큰 의과대학인 산타클라라의 라틴아메리카 의대에선 2004년 현재 88명의 미국 학생들이 유학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 쿠바에서, 부유한 적국의 시민들이 공부한다니 신기한 일 아닌가요. 이는 지난 2000년 미국 흑인의원 모임이 피델을 방문했을 때, 베니 톰슨 의원(미시시피주)이 자신의 지역구에 의사가 없는 곳이 너무 많다고 하자, 피델이 미국 시민들도 라틴아메리카 의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고 해서 이뤄진 일이라고 합니다.
쿠바에서 돌아온 뒤 의사이자 한쿠바교류협회 회장인 김이수씨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몇가지 궁금한 점들을 여쭤봤습니다. 김 회장은 “쿠바는 공산품, 필수의약이 매우 부족하다. 미국의 경제제재는 미국과 관계하는 어떠한 무역도 불허하고 있기 때문에 다국적 대기업 중심으로 유통되는 약들은 쉽게 구할 수 없고 (외국인이 많이 가는) 특정 지역에서만 판매하고 있다”며 “하지만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오히려 쿠바는 어쩔 수 없이 유럽의 자연의학에 뿌리를 두었고 자연스럽게 농림의학으로 발전해나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 사례로 ‘에스코솔’이라는 항암치료제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환자로부터 쿠바산 약품인 에스코솔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이는 쿠바에서만 생산되고 쿠바인에 한해서만 의사 처방으로 무료 배급되는 약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김 회장은 환자용 식품으로 에스코솔을 몇배 희석해서 관광객에게 판매되는 것을 구해 환자에게 전달했습니다.
김 회장은 또한 “우리나라는 의약품 거의 대부분을 수입하거나 로열티를 주고 생산,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만약 한국이 쿠바처럼 경제봉쇄를 당한다면 구할 수 있는 약은 국내 자체 개발한 박카스 등 몇 가지밖에 안된다” 고 덧붙였습니다.
쿠바 경제가 매우 어려워진 것은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옛소련의 몰락과 그 직후 미국의 경제봉쇄가 한층 강화되면서부터입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1990년 “쿠바가 ‘평화시대의 특별한 시기’에 처했다”며 “평화시대에 발생한 국가적 비상사태가 강력한 적과 벌이는 전쟁만큼 국가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특별한 시기 이후 쿠바는 자구책으로 관광을 새로운 산업으로 내세우고 외국기업과 합작회사를 발전시켰으며 1993년 미국 달러를 합법화하고 해외에서 보내오는 가족 송금도 허용했습니다. 현재 쿠바 경제를 먹여 살리는 가장 큰 수입 원천은 관광과 송금이라고 합니다. 1993년 쿠바 정부는 쿠바인들에게 일정한 시설 수준을 갖춘 민간인들이 자신의 집 방을 관광객에게 빌려주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정부 허가를 받아 운영하는 이런 민박집은 카사(Casa Particulares)라고 불리는데, 카사 운영은 쿠바에서 매우 인기있는 직업 중 하나입니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만난 50대 회사인 조지는 “카사는 집 시설이 좋은 부자들이나 할 수 있다. 세금을 많이 내지만(그는 한달에 200달러 가량을 낸다고 했습니다) 달러를 만질 수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쿠바 정부가 비록 달러를 버는 개인과 기업에게 세금을 많이 물리기는 하지만 관광업 진흥으로 인해 부의 분배가 불평등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관광업 종사자들은 임금을 페소화로 받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은 관광객들한테서 팁 또는 선물로 달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에 정부에 고용된 기술자나 대학 교수보다도 관광에 종사하는 택시 운전사가 훨씬 더 돈을 많이 번다고 합니다. 제가 트리니다드에서 머물렀던 민박집 큰아들 마누엘은 20대 중반 청년으로 호텔에서 일하는데, 부모님 일(카사 운영)을 돕고 자신을 위해 한달에 10달러 상당의 돈을 주고 영어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외국인 관광객을 만나면 영어를 연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한다고 했습니다.
관광업 덕분에 경제가 호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인종적으로 평등했던 쿠바사회의 장점이 훼손되고 있다고 합니다. 쿠바 정부는 성매매와 소비주의로부터 자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과 일반 국민들을 분리하는 정책을 취해왔습니다. 이 때문에 외국인과 함께 있는 쿠바인들을 보고 경찰이 뭔가 수상한 점(성매매 가능성 등)을 발견하면 불러 세워 검문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특히 젊은 청년 흑인들이 경찰의 표적이 된다고 합니다. 쿠바로 오는 관광객들은 흑인 숫자가 적은 반면, 쿠바인들은 흑인 또는 흑인혼혈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바나 대학에서 스페인어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대학생 김태우씨는 “흑인들이 외국인들과 다니면 경찰 검문에 자꾸 걸리기 때문에 아예 흑인 학생들은 외국인 유학생에게 접근하지 않아 흑인 친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흑인 쿠바인들은 백인에 비해 관광업 종사자가 적고, 백인에 비해 해외 송금을 받는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흑인과 백인의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바깥세계로 한번 문을 연 이상, 쿠바가 변화의 소용돌이를 피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지난 2008년 형 피델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라울 카스트로는 점진적이지만, 피델보다 적극적으로, 개방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쿠바 사람들은 가장 큰 변화로 지난해 정부가 부동산 매매를 허용한 것을 꼽습니다. 그동안 쿠바인들은 주택을 소유할 순 있지만 매매가 금지돼 맞교환 방식으로만 집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카스트로의 혁명투쟁에 대한 기억이 없는 세대, 개방과 변화, 풍요를 원하는 쿠바 젊은이들의 욕망도 앞으로 변화를 예고합니다. 10년 뒤 다시 쿠바를 찾는다면, 트리니다드 민박집 큰 아들 마누엘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집을 몇채씩 사들여 민박집을 운영하면서 유창한 영어로 관광객들을 응대하고 있지 않을런지. “새해엔 집에 전화기를 장만하게 돼서 아버지가 몹시 기뻐하고 있다”며 웃는 마누엘의 모습이, 그때에도 남아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