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어려움 없이 생면부지의 나라에 정착할 수 있으리오만, 내 경우는 그 중에서도 좀 황당한 축에
드는 것 같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많은 한국인이 이용하는 ‘초’대형 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 지점에 계좌를 트러
갔다. 번호표 같은 게 없기 때문에 약간 어정쩡하게 서 있으니, 안내하는 직원(정확히 말하면 업무를
배분하는 직원)이 와서 용건을 물었다.(이건 우리처럼 손님이 많지 않은 미국이어서 가능한 서비스인
것 같다.) 계좌를 만들고 싶다고 하니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한 20여분을 기다렸던 것 같다.
오른쪽에 있는 4개의 프라이빗룸 중 세 번째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계좌 하나 만드는 데 과분한 대접
이 아닌가 싶었는데, 단순 창구 업무와 좀 더 복잡한 업무로 영역이 나뉘어 있는 것이었다. 30대 중후
반으로 보이는 여성 S가 나를 맞았다. 나는 체크 카드와 연결해서 쓸 수 있는 ‘체킹 어카운트’만을
만들고 싶었는데, S는 일종의 적금 계좌인 ‘세이빙 어카운트’를 만들라고 권했다. ‘별 거 아니겠지’
하는 생각으로 20달러를 예치하고 세이빙 어카운트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나를 이 방으로 안내했던 직원이 왔다갔다 하고,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까지 다녀
갔다. S가 실수로 체킹 어카운트를 두 개나 만든 것이었다. 매일 하는 일일 텐데 이런 실수를 저지르나
싶어 의아했는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불필요한 체킹 어카운트 하나를 삭제하면서 하필이면 데빗(체
크)카드와 연결된 계좌를 없앤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데빗카드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한국에선 고객이
기입해야할 난에 표시를 해주고 필요한 부분만 서류를 작성하게 하지만, 여기선 고객을 앞에 두고 직원
이 컴퓨터로 고객 정보를 일일이 기입하는 방식이어서 카드를 새로 만드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날 은행에서 보낸 시간이 족히 2시간은 넘었던 것 같다.
이날 이후 다시 은행 지점을 방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섣부른 판단이었다. 며칠 만에
카드가 정지된 것이다. 은행에서 보낸 이메일에는 도난이 의심된다고 적혀 있었다. 휴대전화를 새로 사
고 정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느라 카드를 좀 긁었는데 그걸 과다사용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무
리 고객보호를 위해서라고 해도 카드 소유자가 신고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들 멋대로 사용을 정지시키는
건 월권 아닌가. 고객센터로 전화하니 카드 사용 내역을 일일이 불러주며 네가 사용한 게 맞냐고 물었다.
한 건 한 건 모두 다 내가 사용한 것이 맞다고 하니 그럼 내일부터 사용할 수 있도록 조처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에도 카드는 여전히 정지 상태였다. 다시 고객센터로 전화하니 자기들은 도난된 걸로 간주
한다며 지점으로 가서 카드를 다시 발급받으라고 했다. 그럼 어제 풀어준다고 한 건 뭐냐고 여러 번을
물어도 똑같은 대답을(화도 내지 않고) 로봇처럼 반복했다. 할 수 없이 은행 지점을 다시 방문했다. 안내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문제의 S에게 안내하려는 것이 아닌가. 다른 직원에게 서비스받고 싶다고 말하
고 좀 더 기다려 무사히 새로 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언급한 데빗카드는 모두 ‘템포러리’였다. 진짜 카드는 집으로 배달해 주는 거였다. 이
정규 카드가 3주를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처음 카드를 만든 다음날 ‘일주일 이내에 집으로 도착할 것’
이라는 메일을 받았으니 뭔가 잘못 된 게 틀림없었다. 아마도 S의 실수와 관련돼 있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들었다. 은행을 다시 방문해서 ‘공중에 뜬’ 카드를 정지시키고 새로 카드를 만들었다. 그 뒤 일주일만
에 정규 카드를 받았으니 카드 하나 만드는 데 한달이 걸린 셈이다.
그 뒤로도 은행을 한 번 더 방문해야 했다. S가 권유해서 별 생각없이 만든 세이빙 어카운트가 알고보니
과세 대상이었던 것이다. 뱅크오브코리아는 편지를 보내 과세를 면하고 싶으면 동봉한 서류에 당신이 외
국인임을 증명해서 반송해야 한다고 ‘친절히’ 안내해 줬다. DS-2019니 I-94니 하는 미국의 서류 양식이
얼마나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지 경험해 본 터에 내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얼른 은행을 방문해
세이빙 계좌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분명히 없애달라고 했는데 세이빙 계좌와 또 하나의 체킹 계좌 잔고
가 0이라는 알림 메일이 계속 오고 있다.)
다음은 휴대전화. 미국의 SKT에 해당하는 버라이존이 전국 어디서든 가장 잘 터진다는 말을 듣고 고민없
이 버라이존을 선택했다. 프리페이드 폰이 아닌 일반 요금제에 가입하려고 하니 본사 승인이 떨어져야
한다며 1시간30분 가량을 기다리게 했다. 결국 영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승인 여부가 확인이 안 돼, 다음
날 다시 가서 그냥 프리페이드 폰으로 가입했다. 그런데 웬일. 집에서 전화가 안 되는 것 아닌가. 아주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말만 골라서 들리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덕분에 쓰레기 업체 주문(청
소업무가 민영화 돼서 집집마다 따로 청소업체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도 한국에서 가져간 인터넷전화로
해결해야 했다.
한달이 지나 AT&T로 갈아탔는데 아주 잘 되는 건 아니지만 아주 안 되는 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마저 개통 다음날부터 온 가족의 전화가 아예 먹통이 됐다. AT&T 지점을 찾아가니 ‘당신이 버라이존
가입자 비밀번호를 잘 못 대는 바람에 버라이존이 가입자 정보를 안 넘겨줘서 그렇다’고 했다. 아니 그
럼 첫날부터 안 돼야지 되다가 안 되는 건 뭐냐고 물어도 예의 똑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역시 2시간 가
량 걸려서 겨우 문제를 해결했다. 이밖에도, 선불 기한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내의 전화가 끊기는 등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인들이 줄서기에 익숙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굼뜨고 비전문적인지는 미처
몰랐다. 대체 이런 직원들이 어떻게 잘리지 않고 회사를 다니고 있는지 신기했다.(해고가 자유롭다는 나
라에서!) 아마존처럼 혁신적인 최첨단 서비스 기업이 탄생한 미국에서 어찌 이런 황당한 서비스 기업들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미국인들은 왜 이렇게 후진적인 서비스를 감내하고 있는 것일까.(티브이 프로그램 중에는 미국 공
공기관 -예를 들어 주차위반 차량 견인 사무소 같은- 들의 서비스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고발하는 것도
있다.) 미국인들이 줄 서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용인하는 것은 혹시 자신
들도 어디에선가는 생산(서비스)을 해야 하는 처지라는 역지사지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결과는 아닐까.
우리나라가 종업원을 무한히 굴려 최대의 생산성을 산출하는 대신 고객에게 최대의 만족을 주는 시스템이
라면 미국은 직원을 적당히 부려먹고 서비스도 적당히 하는 게 아닐까. 미국에선 알바생을 주차장 바닥에
무릎 꿇게 하는 일 따위는 상상할 수 없다. 미국 맥도널드 점원이 한인 손님을 대걸레로 폭행하는 동영상
을 보면 미국의 서비스 문화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손님과 직원이 완전히 대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처럼 일방적인 저자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문화의 근본 배경에는 모든 인간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천부인권 사상과 위계 질서를 거부하는 미국 고유의 개인주의와 평등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
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국 식당의 팁 문화도 이해할 수 있다. 직원들의 자발적인 서비스를 이끌어 내려는
고용주와, 비용을 치르더라도 간만의 외식에서 기분 잡치고 싶지 않은 고객의 바람이 맞아떨어진 결과 아
닐까.
이에 반해 하루 24시간 통닭이 배달되고 5분 안에 대리기사가 달려오는 데 익숙한 한국인은 쉽게 말해 사
람 알기를 우습게 안다. 한 마디로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남을 쉽게 착취하는
대가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또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신속하고 비굴한 노동을 제
공하고 있지는 않은가.
프랑스에 출장 갔을 때 점심 시간에 마트가 문을 닫아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 배경엔 마트 노동자도
점심 시간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물론 마트의 매출은 좀 떨어지겠지만, 소비자 입
장에서 점심시간에 물건을 못 산다고 사생결단할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이런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
면, 소비자로서는 조금 불편하지만 생산자로서 혹은 서비스 제공자로서 내 직장에서 나도 그만한 권리를
누릴수 있다. 최첨단 자본주의 국가인 줄로만 알았던 미국에서 공공성과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는 프랑스
를 떠올린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경험이겠지만 뱅크오브아메리카, 에이티앤티 같
은 대기업들이 일 못하는 무능한 동료를 무시하고 따돌리기보다는 도와주고 이끌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
았다.(물론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시골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받은 후진적인 서비스가 그런
사회적 합의의 결과라면 나는 기꺼이 불편을 감내할 용의가 있다. 많은 미국인이 그러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