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좀 살다보면 의외로 아날로그적인 환경에 답답하고 당황하기 쉽습니다. 관공서의 행정은 느리고 인터넷 환경으로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개인수표와 우편에 의존하는 지급결제 시스템과 배송 절차는 때대로 여기가 ‘최강대국 맞나?’라는 의문부호를 남기게 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매사 급하고 빠르게 처리하기 보다는 시간이 걸릴지언정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안정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려는 미국의 행정방식도 나름 존중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또 바꾸고 싶어도 국토가 넓고 각 주마다 독립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통합이 쉽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 이민 온지 꽤 시간이 지난 현지 교포 한 분께서 “방대한 국토를 관리하는 체계를 확립하고 곳곳에 인프라를 심어 놓은 것만 해도 미국의 국토 관리능력은 평가를 해줘야 한다. 중남미는 물론 캐나다만 넘어가도 삭막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미국의 국토 관리능력을 가장 쉽게 엿볼 수 있는 게 바로 도로체계입니다. 물류와 유통을 포함한 물적 인적 자원의 이동은 아무리 전자상거래가 발전한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길을 통해 직접 나르고 배달해야 하는 거니까요.
미국에 연수를 오면 장거리 여행이 잦은 관계로 자연스럽게 고속도로를 달릴 일이 많아집니다. 도로체계가 워낙 잘 돼 있고 소통도 여유로운 편이어서 이용에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GPS까지 장착하고 있으니 길 잃을 걱정은 크게 없습니다. 하지만 고속으로 달리다가 분기점과 각종 숫자가 난수표처럼 얽힌 도로 표지판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면 적잖이 당황스럽습니다. 특히 고속도로가 대도시 근처로 접근하면 차량도 늘어나고 각종 지선도로가 합류되면서 아차 하는 순간에 분기점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국 도로에 비해 진출입로와 우회도로가 많아 본선으로 다시 진입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생경하고 어렵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도로체계와 표지판들도 의외로 재미있게 다가옵니다.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
미국에는 상당히 많은 도로의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우리와 같은 고속도로는 Interstate Highway(또는 Interstate Freeway)입니다. 말 그대로 주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미국을 종단하거나 횡단하는 도로입니다. 1930년대에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에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이후 1956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고속도로 관리와 운영에 관한 행정적 법률적 정비를 완비하면서 ‘아이젠하워 시스템’이라 명명됩니다. 그래서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아이젠하워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표지판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왼쪽이 인터스테이트 표지판, 오른쪽은 아이젠하워 시스템 표지판입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인터스테이트는 간선도로가
4번부터 99번까지 있는데 기본은 홀수가 남북, 짝수가 동서횡단 도로를 의미합니다. 보통 인터스테이트의 I와 도로번호를 붙여 명명합니다. 도로의 배열순서는 서쪽에서부터 낮은 번호로 시작해 동쪽으로 갈수록 번호가 높아집니다. 또 남쪽이 낮은 번호 북쪽이 높은 번호로 명명됩니다. 즉 I-5는 미국 서부의 남북횡단 도로이고 I-95는 동부의 남북횡단 도로입니다. 마찬가지로 I-10은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를 연결하며 I-90은 워싱턴주와 메사추세츠 주를 이어줍니다. 몇 가지 예외는 있지만 그래도 대강 숫자를 보면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짐작이 가능합니다.진출입로 명칭도 단순합니다. 도로의 진행거리와 정확히 일치하니까요. 우리나라의 경우 양재IC, 용인IC 등 지역 명칭이 붙는데 반해 미국의 고속도로는 ‘EXIT 마일 수’ 등으로 명명합니다.
<여행 중 찍은 사진이라 정확히 기억이 없는데 아마 펜실베이니아 주 I-81 상행선 고속도로의 표지판인 듯합니다. 주 경계 남쪽으로부터 219마일 지점에 설치된 진출입로이며 깁슨 행 848 지방 국도로 연결된다는 안내입니다.>
참고로 제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진출입로는 ‘I-40 EXIT 266’입니다. 즉 40번 인터스테이트의 266마일 지점에 설치된 진출입로라는 겁니다. 여기서 진행방향에 따라 W나 E, N나 S를 붙여 상하행선의 진출입로를 구별합니다.
그런데 인터스테이트는 여러 주를 걸쳐 있는데 어디를 기준으로 266마일이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것도 간단한데 한 주가 시작되는 지점에서부터 측정하면 됩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가 시작되는 지점부터 266마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표지판 거리표시의 증가는 무조건 서쪽에서 동쪽,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테네시 지역 I-40를 달리다가 노스캐롤라이나 서쪽 접경을 넘으면 도로의 거리 표시가 0부터 다시 시작돼 동쪽으로 갈수록 증가합니다. 따라서 ‘노스캐롤라이나 I-40 EXIT 266’를 더 정확히 풀어보면 ‘I-40 도로의 노스캐롤라이나 서쪽 끝으로부터 동쪽으로 266마일 달린 지점에 설치된 IC’가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인터스테이는 여러 주를 통과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I-40의 ‘EXIT 10’은 캘리포니아에도 테네시에도 노스캐롤라이나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모든 주마다 10마일 지점에 진출입로가 설치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가정하면 장거리 여행시 EXIT 번호만 따지다가는 엉뚱한 곳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내비게이션을 달고 다니니 이런 일은 벌어질 리 없지만요.
하지만 만약 도로위에서 자동차가 고장 나서 전화로 구조를 요청할 경우 도로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이런 시스템을 모르면 난감할 수 있습니다. 도로명칭(I-40)은 물론 주(노스캐롤라이나) 동서남북 진행방향(E.W.S.N) 마일지점(266등)을 알려줘야 견인차가 달려올 수 있습니다. 연수생들은 상당수 중고차를 구입하기 때문에 차에 이상이 생기거나 펑크가 나는 경우가 의외로 종종 있습니다. 만약 한밤중에 고속도로에서 차가 정지한다면 생각보다 훨씬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자기 위치를 늘 파악하는 게 중요하고 도로체계를 숙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제가 사는 곳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 지역은 동서의 경우 인터스테이트 40번 I-40(캘리포니아~노스캐롤라이나)을 자주 이용하게 되며 남북 이동시에는 I-85(앨라배마~버지니아)와 I-95(플로리다~메인)를 이용합니다. 특히 I-95는 미국 동북부의 주요도시인 뉴욕, 워싱턴, 보스턴, 필라델피아와 남부의 마이애미 등을 모두 거치게 돼 있는 동부의 핵심도로이자 거의 유일한 남북횡단 루트입니다. 아마 동부로 연수오시는 분들은 피할 수 없는 이동경로가 될 겁니다. 그래서 휴가철과 주말에는 한국 고속도로와 같은 큰 정체를 빚기도 해 이곳 미국인들도 원성이 자자한데 예산 때문인지 별도의 도로가 건설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금요일 오후에 이용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제가 연수 초기에 이 길을 만만하게 보고 금요일 날 필라델피아를 가다가 7시간 거리를 13시간 걸려서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지선도로(Auxiliary)
미국 고속도로는 곳곳에 지선도로가 이어져있습니다. 지선도로는 기존 간선도로 앞에 별도의 숫자를 붙이는 방식으로 명명됩니다. 예를 들어 I-440은 I-40 고속도로에서 뻗어 나온 지선 고속도로라는 의미입니다. 이미 고속도로가 건설된 이후 그 주변에 새로운 도시가 생겼을 때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다고 합니다. 또는 고속도로가 대도시를 통과할 경우 굳이 교통정체 지역을 통과하지 않도록 우회도로의 개념으로 설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선도로의 개념도입니다. I-10 간선도로에서부터 갈려져 나온 지선도로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여기도 원칙이 있는데 홀수가 붙은 지선도로(위 사진에서 I-310, 510)는 일반적으로 외길(spur)인 경우가 많습니다. 본선에서 뻗어 있지만 본선과 다시 합류하지 않고 어느 지역에 다다르면 끝나는 길입니다. 반면 짝수가 붙은 지선도로(I-210, 610, 810)는 일정 구간을 우회하거나 고속도로와 연결된 대도시 근처의 순환도로를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본선에서 갈린 뒤 일정 거리를 달리면 결국 본선과 다시 연결되는 도로(Circumferential and radial loop routes)입니다. 길이 막힌다 싶을 경우 짝수 지선도로를 이용하면 좀 돌더라도 편하게 갈 수 있겠죠. 하지만 종종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하니 지도를 같이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편의시설 및 휴게소
보통 3개의 입간판이 연달아 나오는데 처음엔 식당에 대한 안내판입니다. 다음엔 주유소, 마지막으로 숙박시설 안내판이 이어집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야 하지만 약 1~2마일이내에 편의시설이 모여 있기 때문에 크게 우회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장 중요한 화장실의 경우 주유소 시설을 이용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주유소에는 항상 편의점이 있습니다. 곳에 따라서는 웬만한 수퍼마켓 규모의 편의점이 설치돼 있기도 합니다. 화장실은 보통 편의점 안쪽에 위치하는데 꼭 물건을 사지 않아도 이용하는데 별 눈치를 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미국 편의점에서 파는 햄버거나 핫도그, 샌드위치 등 패스트푸드가 가격도 싸고 의외로 맛이 괜찮습니다. 커피와 함께 2달러 정도면 한 끼 식사를 때울 수도 있습니다. 장거리 여행 시 시간에 쫓긴 다면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에 들르기 보다는 이런 주유소에서 간단한 음식을 사서 자동차에서 먹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고속도로를 벗어나지 않는 휴게소는 없느냐? 있습니다. ‘REST AREA’라는 휴게시설이 일정 구간마다 설치돼 있습니다.
왼쪽은 고속도로변 Rest Area의 피크닉 시설에서 도시락과 컵라면을 먹는 모습입니다. 뒤편으로는 다른 미국인 가족들이 식사를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왼쪽은 여행 시 가지고 다니던 음식과 물 아이스 박스 등입니다. 특히 물은 꼭 한 박스 씩 챙겨 다녔습니다. 박스로 사면 마트에서 24개에 3~4달러면 사지만 고속도로 편의점 등에서 사면 한 병에 1~2달러씩 하기 때문에 미리 챙겨 다니는 게 이득입니다.
하지만 이런 REST AREA가 많이 있지는 않습니다. 자주 나오는 구간은 30~40마일마다 나오지만 어떤 구간에서는 100마일 넘게 달려도 REST AREA를 못 마주치기도 하니 직접 식사를 해 먹을 계획이라면 출발 전 REST AREA의 위치를 지도에서 확인해 보고 떠나는 게 좋습니다. 또 미국 서부나 캐나다 산간 지역 등 일부 오지 지역을 이용할 경우에도 휴게소나 주유소 이용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100마일 이상을 달려도 주유소가 없는 지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곳을 여행할 때는 항상 연료 탱크를 넉넉히 채운 뒤 주유소가 보일 때마다 자주 보충하는 게 좋습니다. 저도 미국 최대 명절중 하나인 추수 감사절 때 유타 주를 여행한 경험이 있는데 간신히 찾은 주유소나 식당들이 모조리 문을 닫아 곤경에 처한 적이 있습니다.
반면 동부의 북쪽으로 올라가면 예외적으로 고속도로를 벗어나지 않아도 우리나라같이 음식점과 여러 편의시설을 갖춘 그야말로 제대로 된 휴게소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곳은 ‘SERVICE AREA’라고 하는데 식당, 주유소, 간단한 샤워시설과 곳에 따라서는 놀이시설과 쇼핑센터까지 있습니다. 보통 턴파이크 등으로 명명되는 유료 고속도로에 이런 큰 휴게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동부쪽 고속도로에서도 ON ROUTE라고 불리는 상당히 규모가 큰 휴게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료도로 구간
휴게소를 설명하면서 언급했듯이 워싱턴 북쪽으로 올라가면 상당히 많은 유료도로를 거쳐야 뉴욕이나 보스턴 등을 여행할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이런 유료 도로들과 연결되기 때문에 사실상 피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료고속도로의 톨게이트를 지날 때 의외로 많이 하는 실수가 하이패스 구간을 지나치는 겁니다. 미국의 톨게이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무인징수인 하이패스구간과 유인징수인 현금 구간이 구별돼 있는데 다른 점은 무인패스 구간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미국 동북부 지역 고속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EZ-PASS 톨게이트입니다. 왼쪽에 노란색 잘린 부분이 무인 패스구간이고 오른쪽이 무인/유인 겸용 구간과 유인 현금 전용 구간입니다.>
그런데 70~80마일로 달리다가 톨게이트 구간에서 의외로 유인징수 구간으로 차선을 바꾸는게 쉽지 않습니다. 또 쉬운 영어 표지판이라도 처음엔 눈에 잘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냥 통과하면 나중에 어김없이 고지서가 날라 오는데 톨비는 얼마 되지 않지만 각종 수수료 비용이 훨씬 더 많이 청구됩니다. 자동차의 차적과 차주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행정비용이 들었으니 그걸 같이 물어내라는 겁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워싱턴에서 실수로 무인 징수 유료도로구간을 잠깐 달린 적 있는데 톨비는 69센트였지만 행정비용이 12달러 정도 청구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금 징수를 할 경우에도 되도록 잔돈을 준비하는 게 좋습니다. 저는 그런 경우를 겪지는 않았지만 성질 나쁜 징수원을 만나면 액수가 큰 지폐를 낼 경우 상당히 짜증을 낸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고속도로가 대도시로 진입하는 구간에서는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일단 차들이 갑자기 많아지는데다 도심에서 진입하는 차들도 많아 곳곳에 갑자기 정체구간이 생기는데 자칫 하면 추돌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주말 워싱턴이나 뉴욕 등 진입구간에서는 예외 없이 추돌사고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사람들 운전매너가 좋고 양보도 잘해준다고 하지만 다 그런 거 아닙니다. 도시 구간에서는 사납게 달리는 운전자나 갑자기 끼어들거나 깜박이 켜도 밀어붙이면서 양보하지 않는 운전자들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도로는 대도시 일부구간을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는 안전하고 쾌적하게 운전할 수 있는 환경이 잘 갖춰져 있는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