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보기

미국 교통 2 – 운전? 이제 괜찮아

by

미국 교통 2 – 운전? 이제 괜찮아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에서 난 운전을 싫어했다. 좀 더 정확히는 복잡한 시내에서 운전이다. 넓지 않은 주차장도 문제였다. 운전을 할 때마다 긴장되니 주로 아내에게 시내 운전을 맡기고 고속도로는 내가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운전은 주로 내가 한다. 이곳 노스캐롤라이나 캐리가 시골인 까닭도 있겠지만 서울에 비하면 교통량에 비해 도로가 넓다. 주차장도 넓다. 무엇보다 운전자들의 양보가 가장 크다.

중고차를 산지 며칠 안 돼 30분 거리의 지인 집을 갈 때다. 내비게이션에는 거리 단위가 마일로 나오는 바람에 정확히 계산이 안될 때가 많다. 그날도 분명 0.4마일 정도 남았다고 했는데 가까운 곳에 우회전 길이 나왔다. 이곳으로 착각하고 갈 때쯤 내비게이션에서는 다시 ‘0.2마일 우회전’이라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순간 차를 우회전과 직진의 중간에서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가족 모두 타고 있었는데 식은땀이 흘렀다. 다른 차들은 시속 70마일을 넘겨 (110킬로미터) 달리고 있었다. 다시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뒷차가 헤드라이트를 깜빡인다. 한국식에서처럼 ‘바쁜데 도로 가운데서 뭐하냐’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어쩌지?’ 하는 순간 뒷차는 속도도 함께 줄였다. ‘어서 가라’는 신호다. 멈춘 차를 급히 출발시키면서 위기를 넘겼다. 백미러로 보니 그 차 뒤로 길다란 줄이 생겼다.

시내에서의 이런 양보는 자주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차선 변경을 하게 된다거나 STOP 사인에서다. 운행 중 급히 차선 변경 신호만 넣으면 양보해주는 경험을 자주 겪었다.

한국에서 유명 무실한 STOP 사인도 여기서는 반드시 2,3초 멈추며 지킨다. 다른 글에서도 자주 인용되듯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도 속도를 줄이거나 잠시 멈추는 것, 도로를 건너가는 사람을 우선시 하는 장면도 자주 볼 수 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아이들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다. 한국에서 몇 번 ‘녹색 어머니회’가 하는 등교 교통 도우미를 한 적 있다. 학생들이 기다리는 횡단보도 끝에서 서서 녹색불이 켜지면 깃발을 드는 일이다. 할 때마다 깃발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는 차들을 많이 봤다. 한 발 더 도로로 나가서 깃발을 들어봤지만 오히려 학교에서 위험하다며 제지를 하곤 했다.

이곳에서는 녹색 어머니회가 없다. 대신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등교시 교통도우미를 쓴다. 이들은 형광 노란색 조끼를 입고 얼굴 크기만한 큰 빨간 STOP 사인판을 들고 있다. 횡단보도에 녹색 신호가 들어오면 이 STOP 사인판을 들고 횡단 보도 한 가운데로 간다. 발은 어깨 넓이로 벌리고 양쪽으로 번갈아 머리 위로 사인판을 들어 올린다. 한국 학교에서는 말리던 일이다. 모든 차들은 그 사인판으로 보고 당연히 멈춰선다.

운전을 더 하다보니 미국에서는 비상등을 켜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딱 한 번 나이든 할아버지가 비상등을 켠 채로 고속도로를 천천히 운전하고 있었다.

며칠간은 한국에서처럼 급한 상황에서 차선을 양보해 주면 ‘고맙다’는 표시로 비상등을 2,3초 켰었다. 하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이곳에선 비상등을 정말 비상 상황에서만 켜야 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차가 고장나서 갓길에 세울 때, 폭우로 앞이 안 보일 때, 앞서 언급했듯 저속으로 운행할 때 등이다. 차선 변경해줘서 고맙다고 할 때는 가볍게 손을 내밀어 흔들어주면 된다고 한다.

STOP 사인에 관한 또다른 에피소드다. 구석진 길을 가다보면 교차로에 All Way STOP 사인이 있다. 모두 멈춘 후 가란 신호다. 지나가는 순서는 먼저 온 순서다. 이 경우도 처음 겪는 일이다. 좌회전을 하려던 나는 나보다 늦게 온 차가 지나가도 안가고 있었다. 그러자 반대쪽 차 운전자가 나에게 손짓을 하며 어서 가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늦게 온 차들이 나보다 먼저 움직일 때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린 것이 생각났다.

손가락 욕과 레이저 눈빛을 받은 적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한적한 곳에 그려진 횡단 보도에서 멈추지 않았을 때다. 트랙킹을 하는 자전거 족들을 위해 그려진 곳인데 사람이 안보여서 그대로 지나갔다. 나중에 백미러로 보니 옆 숲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기다리던 한 중년 남성이 내 차에 대고 손가락 욕을 한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는 당연히 그런 곳이 나오면 일단 멈춤.

또 한 번은 위 All Way STOP 사인이 있는 교차로에서 순서를 안 지키고 지나갔을 때 한 중년 여성이 차 속에서는 나를 보며 입을 움직이며 들리지 않는 말을 할 때다.

대체적으로 이곳에서의 운전은 양보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욕도 서슴없다. 지킬 것만 잘 지키면 되는 듯하다. 나도 이제 가끔은 원칙을 지키지 않는 운전자들에게 속으로 욕을 하거나 운전대 위에 있는 손가락 중에 제일 긴 손가락을 꺼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