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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랑해도 정부 간섭은 사양… ‘애국하는 개인’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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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랑해도 정부 간섭은 사양… ‘애국하는 개인’의 나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고전 중이다. 2020년 대선 때 낙승했던 민주당 ‘텃밭’ 버지니아주(州)를 공화당한테 빼앗겼다. 더욱이 ‘리틀 트럼프’라 불리는 신인이 상대였고, 불과 1년 만이었다. 물론 여러 요인이 겹쳤겠으나 착각도 그중 하나라는 지적이 당내에서 나왔다. ‘큰 정부’는 국민이 요구한 정상화 범위 밖이라는 설명이다.

들은 것이 있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겪어 보니 미국인의 도저한 개인주의를 실감하게 된다. 미국인은 미국보다 위대하다. 이게 이곳 사람들 일반의 인식인 것 같다. 외람된 정부는 사양한다. 독립된 각 주체에게 보호는 간섭이기 십상이다. 다만 미국은 최고다. 자기만큼 사랑한다. 나르시시즘과 애국심은 길항하지 않는다.

▦ 알아서 주세요

“알아서 주세요.” 기부라는 게 결국 이런 식인데, 미국에 와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것 중 하나가 정부가 운영하는 학교ㆍ미술관ㆍ공원 등이 재원 상당 부분을 이용자에게 손을 벌려 마련한다는 사실이었다. 규모를 가늠하기에 개인의 선의(善意)는 얼마나 우연하고 불확실한 것인가. 납득이 잘 안 됐고, 대책 없는 낙관 같았다.

그 선의가 정말 선의인지, 사실 확신할 수 없기도 하다. 끝내 해소되기 어려운 게 위선일 것이라는 의심이다. 일단 자선에는 청교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부자가 되고픈 세속적 욕망은 17세기 초 대서양을 건너 북미 대륙에 닿은 저 금욕주의자들을 딜레마에 빠뜨렸다. 돈 벌러 왔지만 돈을 벌면 지옥행(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 기부였다. 돈으로 속죄한다는 발상이 애초 저들의 묘수였으리라는 추론은 그럴싸하다. 그렇게 불순할지언정 의도가 종교를 벗어나지 않았고, 적게나마 손해를 감내하게도 했을 저 꼼수에서 오늘날 부자들이 발견한 새 효용은 더 보람차다. 바로 ‘절세’다. 거부(巨富)는 국가 결정에 입김을 넣어 민주정을 비웃을 수도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DC 소재 국립항공우주박물관 안에 놓인 기부금 모금함.
기부금은 정부가 운영하는 문화 시설들의 주요 재원이다.

하지만 눈을 흘기기만 할 일은 또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기부가 일부 부자, 기업, 재단의 전유물이 아니어서다. 실제 도처에 널린 게 기부 요청이다. 어디에서나 모금함을 볼 수 있고, 상점에서 체크아웃(계산)할 때 자선단체에 소액이라도 기부하지 않겠냐는 계산원 권유를 듣는 일이 흔하다. 아주 자연스럽다. 납세만큼 말이다.

국민 4명 중 3명이, 매년 적어도 1회 이상 기부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공공자선기구인 전미자선신탁(NPT)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2020년 한 해 동안 나라 안팎에 기부한 돈이 4,714억 달러(573조 원)에 달하는데, 이 액수의 69%(3,241억 달러)가 개인 기부금이다.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에도 기부금이 답지 중이라 한다.

팁도 기부와 비슷하다. 선의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다. 단체가 기부금으로 운영비를 충당한다면 개인(서비스업 종사자)은 팁으로 생활비를 조달하는 식이다. 이를테면 식당에서, 메뉴 음식값에 포함되지 않은 세금을 따로 더 내고, 봉사료 성격인 15% 안팎의 팁까지 보태는 건 이방인 소비자에게 낯설고 번거롭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해 보려 들면, 딱히 이상하지도 않다. 경제적 보상은 일한 만큼 이뤄지는 게 당연하고, 그런 비례 원리에 입각한 거래가, 각 개인의 양심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미국인 거개의 믿음인 듯하다. “다 괜찮아요(Is everything alright)?” 팁을 인센티브로 서버는 제 서비스 수준을 계속 점검한다.

▦ 자유만 보장되면

미국인의 자율 집착은 강박증처럼 보일 정도다. 이들에게 ‘정부(government)’는 개인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 강제는커녕, 간섭도 허용되지 않는다. 공동체 운영 방식의 이념형은, 철저한 자율 기구 중심의 ‘거버넌스(governance)’다. 정부의 역할은 개인들을 돕고 거드는 것으로 그만이다. 자유 규제는 월권이다.

자유는 디폴트다. 코로나19 대유행 초기, 감염 차단을 명분으로 한국 정부는 지하철 운행을 감축했다. 어떻게든 인구 밀도를 떨어뜨려야 하는 때였고, 공급으로 수요를 통제하겠다는, 다분히 계몽적인 아이디어였다. 미국 정부의 선택은 반대였다. 운행을 늘렸다. 수요를 건드릴 수 없으니 기본값으로 놓고, 공급을 조절한 거였다.

권위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은 미국인에게 거의 생래적이다. 그들의 선조는 왕, 귀족, 교회 사제 등 지배층에 대한 반감을 품고, 새 세상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분권 원칙의 민주 공화정을 세운 것이나, 정부가 국민에 합당하지 않을 때 이를 전복해도 된다는 내용을 독립선언서에 명시한 게 바로, 반(反)권위의 반영이다.

▦ 인간은 선하다

미국 개인주의의 토대는 ‘인간이 선하다’는 신념이다. 청교도는 원죄를 품고 태어난 인간을 미워하고 개인을 억압했다. 반면 1825년 윌리엄 채닝이 체계화한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는 인간을 해방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한 사상이었다. 교리보다 윤리를 소중히 여겼고, 1830년대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를 낳았다.

초월주의 주창자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모든 개인이 자기 직관력을 통해 신의 보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런 ‘절대 신뢰’는 개인의 자립을 강조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산업 혁명기, 미국에 필요한 것은 신이 아니라 개인이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미국 사회의 유동성이 개인 효능감을 고양했다고 분석했다.

개인 위상을 끌어올린 당시 미국적 철학들이 여러모로 미국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게 후대의 평가다. 경쟁심을 부추겨 서부 개척을 촉진했고, 인간 존엄성의 강조로 민주주의를 견인했다. “다수 결정에 반대할 수 있는 소수자의 자유까지 용인해 미국 민주주의에 관용, 다원주의를 새겼다”(박의경 전남대 교수)는 분석도 제기된다.

미국 최남단 섬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도 성조기는 휘날린다.

집단주의가 강고한 동아시아권에서 미국식 개인주의는 대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양심이 견결한 개인이어야 민주주의 공동체에서 제대로 된 시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익 추구 욕망을 호도하며 개인을 경시하고, 복종과 순응을 강요하는 집단주의 아래서 진정하고 지속 가능한 이타적 행동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 신념의 대가

어쩌면 경제적인 불평등은, 뿌리 깊은 정부 불신과 ‘자유로운 개인이면 충분한 것 아니냐’는 미국적 정의의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민주주의는 재산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정의로서의 기회 균등을 의미했을 뿐이다. 재산의 균등 분배라는, 결과적 경제 정의 실현에는 소홀했다. 되레 불편하게 여겼다.

낡은 사회기반시설(인프라)도 신념의 반대급부일 수 있겠다. 정부에 대한 기대 수준이 낮기 때문인 것 같은데, 한국 같으면 대(對)정부 항의가 거셌을 법한 불편을 미국인들은 잘 참는다. 울퉁불퉁한 도로에 쌓인 빗물이 물보라를 일으켜, 온통 시야를 가려도, 눈이나 바람에 목재 전신주가 넘어져, 며칠씩 전기가 끊겨도 말이다.

끊이지 않는 총기 사고는 이방인 눈에 ‘자경(自警)’의 환상이 빚는 부조리다. 총기 보유는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다. 건국 직후, 연방 정부 견제와 각 주 자율권 보장 차원에서 제정된 수정 헌법 2조에는 ‘잘 규율된 민병은 자유로운 주(State)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시민의 무기 소장ㆍ휴대 권리는 침해할 수 없다’고 돼 있다.

미국인들의 자기애와 선민의식은 제 조국이 다른 국가와 질적으로 다르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미국 예외주의로 모인다. 세계 표준과 다른, 자국만의 문서 크기(A4지 대신 레터지)와 길이(미터 대신 피트), 무게(그램 대신 파운드) 단위를 고집하는 ‘마이웨이’는 사소해 보여도, 벽창호 같은 저들을 잘 느끼게 해 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