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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오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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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골구석을 가서 뭐하려고 하느냐”

연수자격을 따기위한 재단면접 이후, 제 연수소식을 접한 많은 분들에게 들은 말입니다.
미국의 시골구석 아이오와, 7월19일 미국땅을 밟으니 그 말이 실감나더군요.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길거리에 광활한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곳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9층이라고 하더군요. 아이오와 대학이 위치한 다운타운 지역 일부를 제외하곤 도시의 냄새를 맡기가 어렵습니다. 곳곳에 자리잡은 몰을 제외하면 참 심심한 곳입니다. “미국은 거대한 시골”이라는 지인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시골이라도 새 지역에서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한달여넘게 좌충우돌을 거듭했습니다. 인심좋고 한가하다는 아이오와에서 이렇게 헤맸으니 워싱톤 등 대도시에 갔더라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했을까 생각도 들더군요

다른 분들이 그러하듯 저도 생활정보를 올릴까 합니다. 제 실수담도 섞겠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바람에서 씁니다.

미국에 오면 일단 처리할 게 많습니다. 집을 구하고, 1년동안 이곳에서 사용할 차를 인수받아야 합니다. 아이오와에선 국제면허증을 1개월 밖에 사용할 수 없어서 현지 운전면허도 따야 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등록시켜야 하고, 각 대학의 비지팅스칼라 자격을 받고 온 연수생들도 학교에 이름을 올려야 합니다. 은행계좌도 열고, 핸드폰도 개통해야겠죠.

(1) 자녀 학교등록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 학교 문제일 것입니다. 4학년 딸이 있는 저로서도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예방접종기록과 영문으로 된 재학증명서가 필요하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준비했습니다. 아이오와는 아니라지만, 영문생활기록부를 달라는 학교도 있다는 말을 듣고 혹시나 해서 이 서류도 준비했습니다.

도착 이틀만에 이곳 보건소를 방문해 준비한 예방접종기록을 제출했습니다. 서류에 문제가 없는지 담당자 확인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오기 전에 미국은 수두(Chicken Pox)를 두 번 맞춰야 한다는 말을 듣고 미리 한국에서 돈 들여 맞췄습니다.

하지만 보건소 담당자가 자리를 비우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서류를 제출했습니다. 서류 받은 직원은 담당자가 제게 전화를 줄 것이라고 하더군요. 번호를 남겨놨지만 하지만 1주일여가 지나도 전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전화영어가 가장 어려우니 제가 전화걸기는 겁이났습니다. 게다가 다른 일처리할 것도 많아서 여유가 없더군요. 1주일여 만에 직접 찾아가 만난 담당자는 “읽어보니 서류에 문제가 없다”는 간단한 말 한마디를 했습니다. 본인은 간단했지만 저는 그간 속을 끓였습니다.

도착 한달여 즈음 딸아이 초등학교 등록을 했습니다. 집에서 15분 거리의 신설학교에 등록했습니다. 학교에 등록하면서 아이오와 대학에 비지팅 스칼라로 등록한 국내 모대학의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딸과 아들을 등록시킨 이 분은 영문예방접종기록을 보건소에서 확인받지 않았더군요. 물론 수두도 한번만 맞췄습니다. 제가 아는 지식을 정성껏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서류를 보고 학교 측에선 별말이 없었답니다. 결과적으로 보건소 찾아 영문기록 확인받고, 국내에서 수두접종을 한번 더 하도록 한 저만 뻘 짓을 한 셈이 됐습니다. 미국에 온 직후 “아이의 치과진료기록도 학교에 내야한다”는 현지교포분의 말을 듣고 아차 했습니다만, 아직까지 내라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미국행정이 그만큼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진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한 말입니다. 시골이라 더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은 또 어떤 경우를 당하게 될지도 잘 가늠이 안되네요.

(2) 대학등록

대부분의 연수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문제가 아이교육이어서 먼저 썼습니다만 사실 연수생의 신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일일 것입니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아이오와에선 대학 등록증을 요구했습니다. 당장 구입한 중고차량 명의이전을 위해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논 드라이빙 Photo Id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학교등록증이 없이는 아이디를 발급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전에 다녀오신 분들은 DS-2019만 있으면 받았다는데 저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도착 직후 학교에 가서 신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곧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아이디를 받는 것은 쉽지 않더군요. 어떤 분들은 쉽게 받는데, 저는 한없이 늘어졌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기다리라”는 말만 되돌아옵니다. 1주일여 만에 학교측에서 받은 이메일에는 “영분 보험서류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랴부랴 한글 서류를 첨부해서 그 부분을 넘어갔습니다. 그러고도 3일여 동안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궁한 놈이 뒤진다고, 물어물어 비지팅스칼라를 담당하는 총책임자격인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길 제가 저를 초청한 연구소(동아시아센터)에 신고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즉시 연구소를 찾아가 신고했습니다만 누구도 무슨 문제가 있는 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뒤 3일후에 등록증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 신고한지 2주일여 만이었습니다. 빨리빨리, 정확하게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에 익숙한 저로선 느려터진 이곳 문화가 낯설기만 하더군요. 사실 아직도 그렇습니다만.

(3) 면허취득

학교 등록증 취득-논포토아이디-차량 명의이전까지 2주일여가 걸렸습ㄴ다. 중고차량은 일찌감치 구입했지만, 명의이전이 안되어 남의 명의로 된 차량을 2주 가량 몰았습니다. 차 타고 나갈 때마다 겁나더군요. 게다가 저는 한국에서부터 뚜벅이족 이어서 면허가 없습니다. 아내가 차량명의가 제 앞으로 이전되자마자 시험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실기시험 때 자기 차량이나 가족 명의로 된 차량을 반드시 몰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명의이전 전까지 기다렸습니다만,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국제면허증을 제출하니 시험자격을 줬고, 실기시험볼 때 차량 명의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차량명의 이전여부와 상관없이 먼저 시험을 봐서 면허를 딸 수 있었는데, 잘못된 정보로 시간을 낭비한 꼴이 됐습니다.

시험은 간단하다고 합니다. 필기시험은 한국말로 선택해 치를 수 있고, 현지 교민(특히 한인교회)를 통해 족보도 받을 수 있습니다. 실기는 아내 말을 들으니 한국처럼 현란한 기술 필요없고 얼마나 안전에 신경 쓰는지만 보여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시험감독관을 잘 만나야 합니다. 사람 따라 다르다는 점에서, 역시 주먹구구 행정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4)은행계좌 개설, 전기세, 수도세, 인터넷 설치

상대적으로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별다른 신분증 없이 여권과 ds-2019 등이 있으면 빨리 처리할 수 있습니다. 시골구석에 살다보니 다른 연수생들이 많이 이용한다는 우리아메리카뱅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 usbank에 계좌를 텄습니다. 은행에선 개인수표책을 발급해주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현금보다 카드나 수표를 선호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더군요. 특히 집세는 관리회사가 현금을 안받아서 체크로 내고 있습니다.

수도와 전기는 도착 다음날 관공서를 방문해 계약했습니다. 인터넷과 TV는 mediacom이라는 회사를 찾아 계약했습니다. 한국에서도 관공서 일과는 무관하게 지냈는데, 이곳에서 각종 고지서를 처리하려니(그것도 영어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인터넷과 TV요금은 한국과 비교해 높습니다. 게다가 인터넷은 느려 터지고 잘 끊깁니다.

(5) 집계약

오기 전부터 넘겨받을 집을 구한 저로선 말씀드릴 게 많지 않습니다. 사우스케이트라는 관리회사를 통해 아파트를 계약했는데 시골구석이어서 그런지 워싱톤 등 대도시와 비교할 수 없이 월세가 쌉니다. 다른 분들과 공유할 경험이 별로 없는 듯 합니다. 다만 집 계약서는 꼭 사본을 챙겨서 초기에 휴대하십시오. 수도세 전기세 인터넷 계약할 때는 당연히 필수로 제시해야 하고요, 지역 도서관에 대출증을 만들때도 다른 것 없이 집 계약서 보여달라고 합니다. 점차 필요없어지지만, 정착 초반 서류 작성때 요구받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6)영어, 교회 등등

영어도 큰 벽입니다. 한국에서 가벼운 영어회화를 했었지만, 이곳에 온 순간 콱 막히더군요. 속도는 빠르고 용어사용, 발음까지 낯설었습니다. 관공서, 버스, 카페 등에서 오가는 가벼운 농담과 대화를 듣기가 쉽지 않더군요. 처음엔 커피한잔 사먹는 것도 스트레스가 되더군요. pardon, sorry라고 되물음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뜻도 모르면서 상대의 말이 농담이겠거니 지레짐작해 웃는 연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만, 제 수속을 담당해준 이곳 김재온 교수님의 요구에 의해 감리교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실제로 정착 초기에 교회분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얻었습니다. 솔직히 교회분들 도움만 잘 만나면 쉽게 정착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이제는 듭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아니지만, 이곳 침례교회는 체계적으로 비지팅 스칼라들의 정착을 도와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부분의 교수분들이 침례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도움을 받으니 양심상 안 나갈 수 없더군요. 대충하면 미안해서 신앙심과 무관하게 열심히 나가고 있습니다. 호칭도 선생님-성도님-집사님으로 점차 변하더군요. 한국교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외로운 교민들의 친목모임 같은 성격이 강해서 강요하는 분위기도 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지었던 무수한 죄들을 기도로 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다녀야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