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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수생활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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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을 것 같았던 1년간의 미국 연수 생활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지난 아홉 달을 돌이켜
보면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았던 순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느낌이 든다. 인생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라 생각하니 남은 하루하루가 더욱 아쉬울 뿐이다. 여행이나 출장으로 40개국에 가까운
많은 나라를 다녔지만 해외에서 이렇게 제대로 살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모든 것에
익숙지 않았고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하려 해도 마음 한켠에는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추억이지만 정착 초기에는 정말 우스꽝스런 실수도 많이 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에서는 거의 본 적도 없었던 빨래건조기가 갑자기 망가졌을 때였다. 출장온 수리공이 건조
기의 필터를 꺼내 들었을 때 ‘회색 베개’를 보는 듯한 두꺼운 먼지 더미가 같이 딸려 나왔다. 우리
는 빨래건조기 필터를 최소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해줘야 하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주유소에서는 차에 기름을 넣으려는데 주유기에 다섯 자리 숫자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떠서 “내
카드 핀넘버는 분명 네 자리 수인데 왜 숫자 하나가 더 필요한 지”를 한참 고민해야 했다.(알고 보니
ZIP CODE)


처음 집을 구했을 때는 집안에 가구가 하나도 없어서 트럭을 빌려 매일같이 남이 쓰던 중고가구를
실어 나르고 이케아 가구를 사다가 조립했다. 식탁을 구하기 전까지는 2층으로 가는 계단에 네 가
족이 모여 앉아 한인마트에서 잔뜩 구해온 깻잎 캔을 뜯으며 끼니를 해결했다.


처음 몇 달 간은 이 나라의 시스템에 대한 불신감도 상당했다. 공공 서비스는 왜 이렇게 느리며,
금융 거래 방식은 또 어찌나 후진지. 울퉁불퉁하고 보수가 덜된 도로는 운전자에게 아직도 스트
레스고 여러모로 불합리해 보이는 식당 팁 문화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고 있다.


정착 초기엔 내 생각대로 풀리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불필요한 짜증도 많이 냈다. 30달러
짜리 중고 식탁을 구하러 2시간 운전하고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올 때는 ‘여기 사는 모든 사람이
내 미국생활을 방해하러 존재하는 사람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영화‘트루먼쇼’처럼.


하지만 그 모든 걱정과 불만, 긴장을 잠재우고도 남았던 것은 사람들의 여유와 친절, 그리고 보면
볼수록 위대한 자연이었다.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의 하늘과 바다는 지금까지 여행한 어느 나라에
도 비할 수 없어서, 지금도 나는 짬이 날 때마다 비치 의자를 차 트렁크에 싣고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낸다. 데스밸리에서 맨눈으로 목격한 무수한 별자리들, 마치 화성 탐사를 하는 기분이 들게 했던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이름 없는 캐년들은 일분일초라도 더 내 눈으로 담아오지 못해 아쉬울 따름
이다. 한국이었으면 진즉에 인파에 깔려죽었을 만큼 실로 대단한 풍경이지만 ‘사람 간의 거리’가
충분한 이곳에서는 별다른 방해나 소음 없이 대자연을 온전히 나의 몫으로 챙겨올 수 있었다.


물론 역시나 가장 컸던 것은 가족의 재발견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어떤 잠재력이 있었는지, 무슨
언어를 쓰고 뭘 원하는지를 처음으로 많이 깨달았고 좀 더 좋은 부모-자녀의 관계를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됐다.


우리 가족은 지난 9개월 동안 거의 매일 아침과 저녁을 같이 하고 수많은 여행을 다니면서 서로를
지지고 볶고 튀기고 가끔은 핥으면서도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연수 생활을 대체로 무난하게 헤쳐
온 것 같다. 또 상대적으로 게으르고 보수적인 나에 비해 새로운 것에 비교적 적극적인 아내 덕분
에, 우리는 남들이 좀처럼 겪지 못한 신기한 것을 두루 경험하고 동네구석구석을 깨알같이 다닐 수
있었다.


우리가 미국에 있는 동안 역시나 한국에서는 다이내믹한 일들이 잔뜩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저것
사건이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대통령이 바뀌고 재외국민 투표를 체험해 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시 전쟁터 같은 서울에 다시 들어가야 하는 심정도 무겁지만, 이곳에서 지내며 한국사회
나 친구, 동료들을 바라보는 심정도 솔직히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지금은 이런 저런 복잡
한 생각을 버리고 하루하루 본분에 충실하자는 생각뿐이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하루라도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곳을 가봐야겠다는 다짐 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