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부럽다’는 느낌을 절로 갖게 하는 나라다. 어느 스테이트(주)에 가든 주경계 안팎에는 자동차로 몇시간을 다녀도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사막같은 벌판이 펼쳐져있다. 그런 땅에는 석유 하나만 해도 텍사스 한 주에만 미국이 1백년동안 쓸 수 있는 양이 묻혀져 있다고 한다.
미국은 시스템도 잘 돼있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곳이지만 피부색과 영어 숙달 여부에 관계없이 주든 카운티든 커뮤니티가 잡음없이 돌아갈 수 있게 시스템이 잘 짜여있다. 쇼핑센터의 고객서비스센터는 커스토머의 불편,불만이 있는 경우 다소 어거지가 있더라도 거의 1백% 받아준다. 자동차 속도위반 벌금 부과와 수납과정, 미터팤킹(길거리 주차) 관리, 영화관의 자리 배분, 골프장의 rain check와 자원봉사자 메리트같은 미세한 부분에서도 합리성이 깔려 있다.
그렇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정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보수의 차이는 존재하는 법이다. 머니가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는 미국에선 정도가 더한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대학 교수를 포함한 교사와 야근을 밥먹듯 해야하는 간호사가 ‘상대적인’ 박봉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접하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의사 변호사 등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보다 엔지니어를 더 대우해준다는 미국식 합리주의의 이면이다. 또 ‘소비자의 천국’이라지만 아파트 관리규정이나 각종 편의시설의 이용약관에는 이용자에게 불리한 ‘숨은 수수께끼’가 수두룩하다. ‘미국인은 친절하다’고 하지만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이방인에겐 일부러 말을 빨리 하거나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해주는 보이지 않는 차별도 엄연히 존재한다.
짧은 연수생활이지만 그동안 보고 듣고 느꼈던 미국사회의 이면, 거창하게는 미국의 이중성 내지 다면성, 그 속에 담겨져있는 우리와의 사고방식의 차이같은 단상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미국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나 에피소드 등도 물론 곁들여질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문희수 차장>
(1)소비자는 왕이다
작년 9월쯤의 일이다. 여행을 많이 다녀야겠다는 생각에서 차안에서 지루해하는 아이들 보게 하려고 미국회사 제품 9인치짜리 TV겸용 VCR를 Target에서 160달러 주고 샀다. 3일후 일요일. 신문을 이리저리 보다보니 똑같은 Target에서 일본제품 9인치 TV겸용 VCR를 10달러 싸게 판다는 쿠퐁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다 비싸서 사지않았던 30달러짜리 플러스틱 커버(자동차 앞좌석 사이에 VCR를 끼워 설치하려면 필수적이다)와 15달러 정도 하는 애들용 비디오 1개를 무료로 준다는 것이었다.
그냥 혀를 차다가 헛걸음하는 셈치고 월요일에 VCR를 종이박스에 있던 대로 담아서 영수증과 쿠퐁을 들고 Target 커스토머 서비스센터로 찾아갔다. ‘일본제품으로 바꿀 수 있냐’고 물었더니 ‘어디 깨진 데는 없냐’고 한마디 물어보더니 박스를 열어 보는둥 마는둥 하더니 ‘OK’라고 하더니 쿠퐁내용대로 일본제품과 커버 비디오에다 10달러까지 얹어 줬다. 물론 미국에선 대부분의 경우 물건을 산 다음에 하자가 없더라도 산 사람이 90일 이내에 환불 또는 바꾸고 싶을 때는 해주도록 돼있다(영수증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그렇지만 전자제품의 경우엔 좀 복잡하게 이런저런 제한이 있어서 막상 ‘OK’란 대답을 들으니 참 신기하기만 했다.한국에선 어디 가능한 일인가 말이다. Safeway같은 다른 쇼핑몰에서도 비슷하게 return한 경우가 있었지만 매번 군말않고 돈으로 환불해주거나 다른 물건으로 바꿔줬다.
내 집과 가까운 곳에 사는 한 한국인 연수생은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소파를 사기로 하고 돈을 치른 다음에 날짜를 정해 소파를 인도받기로 했는데 약속한 날짜에 물건이 없어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다시 날짜를 정해 찾아간 날 물건을 건네받은 자리에서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여 불편을 얘기했더니 허탕을 친 대가로 기름값 10달러를 주더라나.
조금 거리가 있는 일이지만 또 한 번은 일요일자 신문이 안들어와서 신문사에 항의전화를 한 적이 있다(미국에 살면서 가장 어렵고 피곤한 일중의 하나가 바로 이 ARS 전화통화를 하는 것이다). 처음 한번은 신문사 고객서비스센터에서 지사로 연락해 일요일 오후 늦게 신문을 받아봤지만 그후에도 안들어오는게 연속 3주가 계속됐다. 진짜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여 항의전화를 했더니 “I am sorry’라면서 빠진 회수만큼 credit을 늘려줬다(영어 때문에 시달려 살다가 다른 사람아닌 미국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때 얼마나 통쾌한 지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배달원 아줌마도 직접 문을 두드려 ‘미안하다’면서 신문을 주고 갔다. 이 아줌마는 그후 금요일자 신문을 서너차례 무료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미국에선 이렇게 소비자가 불편이나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 아무 소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준다. ‘미국은 소비자의 천국’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소비자는 왕’인 셈이다.
사정이 이런데는 짐작컨데 다소 어거지성이 있더라도 소비자의 불편이나 불만을 안 받아줬다간 공연히 소송이라도 당해서 몇십,몇백곱절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인 것같다. 뒤집어 얘기하면 그만큼 이런저런 소송이 많다는 얘기도 되는 것같다. 연전에 한 여성이 ‘실리콘’으로 피해를 봐서 회사측에 몇백만달러짜리 소송을 냈다거나 담배를 피는 사람이 건강이 나빠져서 담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 얼마를 보상받았다는 등의 외신이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또 미국 회사들이 소비자의 불편에 민감한 것은 그만큼 내수가 그들 회사, 더 나가서는 미국경제가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최근들어 미국경제는 더블딥(이중침체)에 이미 들어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을 만큼 불황이 심화되고 있다. 주택 자동차 침대같은 가구등 내구소비재는 하루가 다르게 할인율이 높아가고 있다. 단독주택같은 대형주택가격은 작년보다 몇만달러나 싸게 시장에 나오고 있지만 팔리지 않아 매물이 엄청나게 쌓여있다. 자동차의 경우엔 작년 재고분을 제로금리 할부금 납부에다 정상가격보다 많게는 2천-3천달러 정도나 낮춰서 판다는 광고가 신문과 TV에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재고가 여전히 남아돌아 딜러들이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런 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불편하거나 불만이 있는 경우 움츠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밝혀야한다는 점이다. 그동안의 연수생활에서 느낀 점은 문제가 있을 때는 안받아들여지면 그만이고 일단 부딪혀보는 게 좋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소비자 보호장치가 많기 때문에 어떤 일이더라도 불편한 점과 원하는 것을 말하면 많게는 절반 정도는 돈을 돌려받거나 아니면 우회해서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게 된다든지 하는 등의 대가가 어떤 식으로든 돌아온다. 아니더라도 최소한 상대방으로부터 ‘미안하다’란 말을 들을 수 있다. 소비자 보호와는 반대로 편의시설이나 스포츠 입장권 등에는 알아보기 어렵게 아주 조그만 글짜로 ‘환불안됨(no refund)’이란 말이 들어있는 등 소비자에게 불리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적극 대응이 필요하다. 이런 대응자세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통할 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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