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그림찾기-‘red tape’이란 덫에 대해
작년 10월의 일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관리회사에서 매달 물값(water)과 하수도이용료(sewer)를 새로 내라고 통보해왔다. 난데없는 일이라 관리사무소에 물어보기에 앞서 꼬투리를 잡히거나 잡을 일이 없나 하는 생각에 계약서를 들쳐봤다. 10장도 넘는 계약서를 이리저리 뒤지다보니 편의시설난에 ‘체크된 항목만 회사측 부담이다’란 규정 밑에 전기값 TV수신요금등과 함께 입주자가 부담하도록 돼있는 항목에 물값과 하수도이용료가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부과되지 않아 모르고 넘어갔을 뿐 회사측이 청구하면 내가 꼼짝없이 내게 돼있는 셈이었다. 작년초 덴버 주변지역에서 발생한 동시다발적인 큰 산불로 물이 크게 부족해져서 새로 요금을 부과하게 됐다는게 관리사무소의 설명이었다(현재 미국은 거의 전역에 걸친 근래에 보기 드문 가뭄으로 콜로라도와 캘리포니아 와이오밍 유타 애리조나 등 인근 주들이 그들 주를 흐르는 강물을 돈을 주고 쓰느니 마느니 하며 물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입주계약을 맺을 때야 정신도 없고 10장도 넘는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을 시간적.정신적 여유도 없었던 터. 그때부터 한달에 합쳐서 30달러 정도 되는 물값과 하수도이용료를 꼬박꼬박 물고 있다. 올해 2월말 기록적인 폭설(4일에 걸쳐 로키산맥쪽 많이 내린 곳은 2미터도 넘었다)이 내려 강수량이 예년의 94% 정도까지 올라갔다고 하는데도 관리회사측에선 도로 요금을 없애지않고 징수하지만 대항할 수단이 없어 속수무책이다.
그래도 좀 억울하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 이곳에 오래 살고 있는 주변의 아는 분들께 물어보니 “특히 아파트계약서는 이용자에게 불리한 측면이 많다. 한국같으면 공정거래위원회 등에서 당장 고치라고 할 대목이 상당수다. 그래도 미국인들조차 참고 산다”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경기장등의 입장권을 살 때나 인터넷으로 호텔 등을 예약할 때, 할인쿠퐁의 사용조건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니 한마디로 나같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숨은 그림찾기’같은 조항들이 상당히 많았다. 세심히 살피지않고 넘어가다간 일종의 덫같은 것에 치이게끔 돼있다.
예컨데 아파트 계약서에는 최근 주택들이 많이 지어져 ‘1년 입주조건’일 경우 한달 많게는 두달까지 렌트비를 깎아주는 곳이 많은데 어떤 사유로든 1년을 못채우면 입주자가 나갈 때 깎아준 렌트비를 고스란히 도로 토해 놓도록 규정이 만들어져 있다. 야구장 입장권에는 표 밑부분에 ‘환불금지 또는 입장일자 변경 안됨’조항이 들어있고 하다못해 피자를 비롯한 이런저런 할인쿠퐁 밑에는 유효기간과 함께 ‘다른 할인쿠퐁과 병행사용은 안됨’이란 제한이 딸려있기가 일쑤다. 인터넷으로 호텔을 예약할 때도 호텔의 policy에 따라선 예약한 날짜의 3일전까지만 취소가 된다거나 예약할 시점에서부터 호텔이용요금을 먼저 받는 곳도 많다. 비디오를 빌리는 계약을 할 때나(계약은 무료) 꽃집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는 경우 time같은 잡지를 무료로 3개월 정도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주기도 하는데 이 때도 덫이 있다. 3개월 무료 구독을 한 뒤 ‘안보겠다’는 전화를 하지않으면 자동으로 유료구독으로 이어져 계약이나 예약할 때 사용한 신용카드로 요금이 청구된다. 더 안본다는 전화를 걸려고 하면 ARS로 나오는 안내멘트에 따라 한 5-6번 정도 번호를 눌러야 되기 때문에 자칫 제때 연락을 하지 못하면 피해를 볼 가능성이 커진다.
문제는 이런 ‘사용조건의 제한’이 아파트 계약서든 입장권이든 눈에 불을 키고 보지않으면 찾아보기 어렵게 깨알같은 글씨로 몇줄씩이나 촘촘하게 써져 있다는 점이다. 인내를 갖고 시간을 들여 사전까지 동원해서 해석하지 않으면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미국인들조차 이런 ‘small print’나 ’fine print’ 등의 ‘red tape’는 문제가 많다며 고개를 젓는다.
회사측이 이렇게 만들어놓은 데는 이용자들이 제기할 수 있는 이런저런 불만, 자칫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다. 변호사들이 달라붙어 세심하게 만들어놓은 ’사용조건의 제한‘들인 까닭에 소비자들에게 불리한 규정들이 많을 수 밖에 없어 사전에 주의할 점을 체크하지 못한 이용자는 열이면 열 피해를 보기가 십상이다. 전편(1)소비자는 왕이다)에서 조그만 불만이 있더라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대응해야한다고 말한 것은 미국사회에서도 이렇게 소비자에게 불리한 측면이 많기 때문에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은 보상받도록 스스로 길을 찾아야한다는 의미에서다.
<한국경제신문 문희수 차장>
해외연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