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보기

미국 집에서 물을 잘못 쓰면 생기는 일

by

‘똑…똑…똑…똑’

“이게 무슨 소리지?”
“물 떨어지는 소리 아냐?”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족 모두 각자 여유를 즐기던 어느 토요일 저녁. 1층 천장 모서리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듯한 소리였죠. 천장을 째려보며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쓰던 저는 2층에 샤워하러 간 중학생 큰아이를 떠올렸습니다. 샤워 중이라면 쏴-하고 배수관을 따라 물 흘러나가는 소리가 들릴 텐데 그날따라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2층에 달려가 보니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중으로 닫혀 있어야할 샤워커튼은 하필 살짝 열린 채였고, 샤워기가 뿜어낸 물은 그 틈으로 새어나와 욕실 바닥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당시 욕실 배관에 문제가 있어 물을 틀어도 따뜻한 물이 바로 나오지 않았는데, 아이는 물이 따뜻해지면 씻으려고 미리 물을 틀어놓고 자리를 비웠던 것입니다. 몇 분간 쏟아진 물로 욕실바닥은 엉망이 됐습니다. 황급히 욕실 바닥을 닦아냈지만,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층 천장에 물 자국이 생기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집 천장에 갑자기 나타난 물자국. 그것은 재앙의 시작이었습니다.

미국 집에선 물을 조심해야 한다.” 연수 오기 전에도 여러 차례 들었던 얘기입니다. 대부분 목조로 지어진데다 욕실은 건식으로 설계된 미국 주택의 특성상 물을 쓸 때는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죠. 한국 집이라면 욕조나 샤워부스 바깥으로 물이 쏟아진들 배수구로 흘러나갈 테고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겠지만, 여기는 미국. 사소한 부주의는 생각보다 큰 결과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에서 만난 주변 지인들에 조언을 구했더니 빨리 ‘Water damage restoration(물피해 복구)’ 업체를 불러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한 지인은 수도 배관이 터져 수만 불을 들여 복구했다는 경험담을 들려줬습니다. 급히 Water damage restoration near me를 검색했더니 주 7일 24시간 출동한다는 업체가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찾아온 복구 업체 직원은 집 1, 2층을 꼼꼼히 살폈습니다. 그는 열화상 카메라까지 동원한 끝에 2층 욕실 바닥을 적신 물이 타일 틈으로 흘러내렸고 1층 천정에 고여있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천정을 뜯어내고 제습기를 돌리는 모습. 비행기 이착륙할때나 들릴법한 소음을 24시간 들어야 했습니다.

이대로 두면 천장에 ‘mold(곰팡이)’가 생겨 더 큰 난리가 날 것이며, 48시간 내로 천장과 벽 일부를 뜯어 습기를 제거하는 시공을 해야 한다고 했죠. 예상비용은 6000불. 습기를 말리는데만 꼬박 5일이 걸리고 뜯어낸 천장에 드라이월을 다시 붙이고 페인트칠을 하는 데까지 추가로 일주일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청천벽력같은 통보에 놀랄 틈도 없이 공사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고물가ㆍ고환율, 빠듯한 살림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 일이었죠.

가족들을 더 힘들게 한 건 공사 소음이었습니다. 습기를 말리는 기계 여러 대를 24시간 돌리다 보니 공항에서나 들릴 법한 소음을 밤낮없이 들어야했습니다. 종일 집 밖에 머물러야 했고 잠을 이루기 힘든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한국 집에 당장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사건의 주인공 큰아이는 공사 내내 죄인처럼 풀이 죽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5일 만에 습기는 모두 잡혔고 소음에서도 벗어나게 됐습니다. 겪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불행이지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서 오히려 감사한 일이라 여기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