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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초등학교 구내식당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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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를 방문해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날은 돈가스와 카레로 도시락에 힘을 줬습니다. 돈가스가 거무스름한 것은 탄 것이 아니고, 돈가스 소스 때문입니다. 아이는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 세웠습니다.

제가 있는 웨이크카운티에서 초등학생 학부모는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언제든 점심을 먹을 수 있습니다. 사전 예약이나 담임 선생님 양해 없이 원하는 날은 모두 가능합니다. 도시락, 휴대전화와 신분증만 있으면 됩니다. 도시락도 없어도 됩니다. 미국은 급식을 돈 내고 사 먹는데, 학부모도 이 급식을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이죠. 휴대전화와 신분증은 출입증 발급에 필요합니다.

이 같은 ‘학부모 점심’ 정책을 들은 건 작년 8월이었습니다. 새 학기 행정실 선생님으로부터 소개를 받았지만, 그 순간 제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쉴 새 없이 떠드는 초딩 수백 명’이었습니다. 공포 그 자체였죠.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한 번에 두 학급(40명) 정도만 점심을 먹는다’는 말에 용기를 냈습니다.

마침, 도시락 아이디어도 고갈되고 있어서, 학교에서 점심을 먹으면 다른 집 도시락 메뉴를 염탐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미국 급식과 한국 급식 시스템을 비교해 볼 기회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학교를 찾아갔을 때 저를 보고 기뻐할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아이와 상의해서, 그날 점심 도시락은 카레와 돈가스로 정했습니다.

저희 아이가 속한 2학년 4반은 오전 11시부터 30분 동안 점심을 먹습니다. 이날 오전 10시 45분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갖고 학교에 갔습니다. 10시 50분 신분 확인을 마치고 식당에 들어가자, 1학년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식당에는 4인용 직사각형 테이블이 8개씩 7줄, 총 56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한 줄에 한 학급 학생 20명이 마주 보고 앉아 있고, 식사를 지도하는 점심 선생님(Lunch Teacher)은 한 줄에 한 명씩 자리했습니다. 한국 초등학교는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을 식당으로 인솔해서, 같은 자리에서 함께 식사하는데, 여기는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을 식당으로 데려다주는 것까지만 합니다.

이번 점심 방문의 주목적이었던 ‘도시락 메뉴 염탐’은 큰 소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그동안 왜 도시락에 그렇게 목을 맸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틱톡, 인스타그램에 나오는 예쁜 도시락은 없었고, 보온병에 담은 스파게티, 잼 바른 샌드위치가 가장 흔했습니다. 공룡 모양 치킨 너겟만 싸 온 아이도 있었습니다.

급식 식단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날 주메뉴는 버펄로 치킨 랩과 그릴 치즈샌드위치, 사이드는 감자튀김과 검은콩칠리, 생 오이였는데,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놀란 건 단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식사를 마치자, 점심 선생님의 지도 하에 당번들이 밀대를 들고, 식탁과 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4명이 힘을 합치자 앉은 자리를 닦는 데 3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전 10시 55분 선생님이 식사 종료 시각이 5분 남았다고 알리자, 정신없이 떠들던 아이들이 도시락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10시 57분이 되자, 점심 선생님이 ‘테이블 치울 사람(Table washer)과 바닥 닦을 사람(Sweeper)이 필요하다’고 외치자, 식탁 당번 2명이 나와서 테이블을 닦고, 급식 그릇을 치우더니, 바닥 당번 4명이 밀대를 들고 와서 바닥을 닦았습니다. 올해 7살인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 얘기입니다.

나머지 아이들은 식당 문 앞에서 줄을 섰고, 정리를 마친 당번이 그 줄에 합류하자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을 인솔해 교실로 향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점심 선생님은 아이들이 치운 자리를 다시 한번 밀대로 정리하며 2학년 학생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이 모습이 하도 인상 깊어서 식당에 들어온 저희 아이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식탁 정리는 원래 해야 하는 일”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저희 아이는 이날 테이블 닦는 당번이었습니다. 어쩐지 아이는 저와 함께 있으면서도 친구들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는데, 테이블 닦을 타이밍을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곧 테이블 닦으러 가야 한다”는 아이의 말과 표정이 진지해서 웃음이 났습니다.

미국 급식은 악명이 높아서, 기대도 컸는데, 생각보다 건강해 보였습니다. 토마토와 오이스틱이 메뉴에 있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물론 오이스틱은 인기가 없는지 많이 남아 있네요.

식사 시간 30분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점심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이는 번개처럼 키친타월을 뽑으러 달려갔고, 학급 테이블을 닦은 후에는 제가 있던 테이블도 닦았습니다. 얼마 전 동네 할머니로부터 ‘한국 아이들은 집안일을 좀 거드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 질문의 배경이 궁금했는데, 이해가 됐습니다. 미국에선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매우 적극적으로 시키고 있었습니다.

학부모 점심 이후로 도시락을 대하는 제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전날 저녁에 먹고 남은 반찬을 활용한 볶음밥은 이제 단골 메뉴가 됐습니다. 도시락 덕분에 아이와 대화 주제가 늘어났습니다. ‘용가리 치킨을 싸주세요’ ‘포도가 달고 맛있었어요’ 아이의 작은 부탁을 들어줄 수 있어서 기쁩니다. 미국에 도착하고 한동안 한국의 급식 시스템을 애타게 그리워했었는데, 이제는 아닙니다.

저는 아이에게 집안일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식사 뒤 정리는 아이 몫입니다. 아이는 식사를 마치면 식탁을 닦고, 밥그릇을 물에 헹궈서 식기세척기에 넣습니다. 세탁물 정리도 이제 아이가 합니다. 아이가 자기 일을 해 주는 것이 대견합니다. 무엇보다 제 집안일 부담도 많이 줄었습니다. 아이가 맡은 일을 해낼 때마다 칭찬해 주는 것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아마 한국이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저는 회사에, 아이는 학원 버스에서 뺑뺑이를 돌고 있겠지요. 미국과 한국, 어느 쪽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있으면서 아이와 함께 느끼는 소소한 행복을 한국에서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매일 전쟁을 치르는 맞벌이 부모를 위해서 정부는 완전 돌봄, 보육시설 확충 등을 내걸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돌봄 정책에 매몰돼 소중한 가치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