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오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 중 하나는 학교가 아이들을 놀게 하고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학교 가는 걸 좋아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등교 첫날부터 아연 실색했습니다. 6시50분에 스쿨버스를 타야 하니 최소한 6시에는 일
어나야 하는 겁니다. 아침잠이 많은 아이가 무척 힘들어하더군요. 초등학생이 중학생보다 등교
시간이 더 일렀는데, 어린 자녀를 둔 맞벌이 부부를 위한 배려라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학교 다닌 지 2주일이 지날 무렵부터 생겼습니다. 본격적으로 숙제를 내주기 시작
하는 겁니다. 수학, 과학, 사회, 랭귀지아트(리딩+스펠링)가 주요 과목인데, 사회를 제외한 모
든 과목에 매일 숙제가 있었습니다. 수학은 한국이 여기보다 워낙 진도가 빨라 아이가 별로 스
트레스를 받지 않았지만 과학이나 리딩은 영어에 익숙치 않은 초등 4학년짜리가 따라잡기에 무리
가 있었습니다.(3학년까지는 숙제가 거의 없는데 4학년부터 숙제가 많아진다고 합니다)
특히 지난해 최우수 교사로 뽑힌 과학 선생의 경우 거의 매일 숙제를 내줬는데 교과서를 읽고
질문에 대답하거나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카드로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것이든 교과
서를 읽지 않을 수 없는 숙제였습니다.(재밌는 점은, 학기 초에 과학 교과서를 한 권씩 나눠주
고 집에서만 읽게 하는 거였습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 없이 각종 동영상과 실험, 만들기 같은
걸 하면서 원리를 이해하게 하더군요.) 지금은 아이 혼자서도 숙제를 할 수 있게 됐지만 처음엔
부모가 옆에 붙어서 같이 읽고 해석하느라 과학 숙제 하나만 하는 데도 1시간이 넘게 걸리더군
요.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를 앉혀놓고 한글도 아닌 영어 책을 읽히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습
니다.
리딩과 스펠링은 컴퓨터를 이용한 숙제를 내줬습니다. 리딩은 아무 책이나(때로는 지정된 책을)
하루에 20분 읽은 다음 특정 사이트에 로그인해서 등록을 한 뒤, (책을 읽지 않고는 풀 수 없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펠링은 일주일에 10여개의 어휘를 정해놓고 역시 특정 사이트
에 로그인한 뒤 일주일에 3가지의 어휘 게임을 완료해야 합니다.
숙제를 해가지 않으면 일명 ‘펀치’ 카드를 주는데 한달에 펀치 카드를 5개 받으면 월말에 다른
아이들 다 나가 놀 때 교실에 남아서 반성문을 써야 합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첫 달에 아이
가 반성문을 썼다면서 가져왔는데(반성문에 부모 사인을 받아서 학교에 제출해야 합니다) 억장
이 무너지더군요. 숙제가 뭔지 잘 알아듣지 못해서 못해 간 경우도 있었는데, 아이는 그걸 모두
자기가 게을러서 그렇게 됐다고 자책하듯이 적었더군요. 그 다음부턴 ‘펀치 카드 먹지 않기’가
아이 학교 생활의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이 숙제를 도와주다보니 미국 공교육의 특성이 몇가지 보였습니다.
첫째, 독서 중심 교육입니다. 여기 아이들 책 읽는 거 보면 정말 무섭습니다. 일주일에 한 권
정도는 읽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그림 하나도 없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된 책을 말입니다.
책을 읽고 생각하게 하고 스스로 질문하게 만듭니다. 웬만한 책은 학교에서 공짜로 줍니다.
때론 수준 별로 어떤 책을 강제로 읽히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이들이 읽고 싶은 책을 스스로
고르게 합니다. 1년에 한 번 ‘북배틀’이라는 이름의 ‘독서 토론 시합’도 합니다. 학교 우승자
는 카운티 대회에 나가 또 한번 배틀을 합니다.
둘째, 교과서가 없습니다.(과학 제외) 리딩은 여러 책을 읽는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사회나
수학도 교과서가 없습니다. 대신 교사가 수시로 스터디 가이드(유인물)를 준비합니다. 이곳은
1년 교과 과정을 10학기로 세분하는데 한 학기마다 하나 혹은 두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가르
칩니다. 예를 들어 사회 시간에는 한 학기동안 미국의 지리를 마스터하고 다음 학기에는 미국
의 원주민들(인디언)에 대해 배우는 식입니다.
한 학기가 끝나갈 때쯤이면 아이 가방은 각종 유인물로 어지럽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
마도 교사들의 창의성을 존중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학습에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이용
하는 것도 특징입니다. 교사들마다 홈페이지 하나씩을 운영하면서 각종 학습 자료를 홈페이지
에 올려 둡니다.
셋째, 일년 내내 기부 행사를 엽니다. 기부금액에 따라 크기가 다른 트로피를 주는 기부 행사
도 있지만(이 행사의 경우 카운티 내 학교들이 누가 많은 기부금을 모았는지 경쟁을 하더군요),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회사와 계약해서 아이들 간식을 사면 얼마의 기부금이 학교에 떨어지도
록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는 행사도 있었는데
역시 기부금 마련 행사였습니다. 북페어도 수시로 열고 학교 유니폼이나 학용품, 장난감을 팔
기도 합니다. 마트에서 파는 휴지나 쓰레기봉투 같은 생필품 박스에 붙어 있는 ‘박스탑’이라
는 걸 모아서 학교에 제출하면 학교에 얼마씩 기부금이 전달되는 이벤트도 분기별로 한번씩
합니다.
이 가운데 주기적으로 열리는 행사는 학부모들이 담당을 정해서 행사를 진행합니다. 몸으로 때
우는 자원봉사도 기부의 일종인 셈이지요.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아이들 책도 공짜로 나눠주는
구나, 라고 생각해서 저도 좀 무리해서 기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넷째,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경쟁적’입니다. 제 아들이 다니는 학교는 요즘 ‘블루 리본 스쿨’
에 뽑혔다고 굉장히 흥분해 있는데요. 이 제도는 미국 정부가 우수 학교를 선정하는 제도입니
다. 카운티 안에서 학교끼리의 경쟁도 상당합니다.
하지만 그 경쟁이 곧 개인 간의 경쟁으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1년에 한 번 치르는 일종의
일제고사인 ‘조지아 마일스톤 어세스먼트’가 대표적입니다. 미국의 대부분 주에서 이런 평가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데 기본 취지는 ‘낙제생 방지’(No Child Left Behind Act of 2001)입니다.
학교 전체에서 학력이 뒤떨어지는 학생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하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학교나 학생을 성적으로 줄 세우는 게 목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학력
격차를 해소해 사회 부적응자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블루리
본제도와 마찬가지로 이런 평가 시스템 역시 도입된 지 수십년이 넘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 교육 찬양 이전부터 교육에 대한 미국 정부의 노력은 계속돼 온 셈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미국인 친구에게 우리 아이 학교가 숙제를 너무 많이 내줘서 괴롭다고
했더니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건 네가 사는 지역의 특성일 거야. 거긴 생활 수준이 높잖
아.” 그래서 찾아봤더니 제가 사는 오코니카운티가 조지아주에서 소득수준과 학력수준이 가장
높은 곳이더군요. 조지아대(UGA)를 끼고 있어서 그렇겠지만 석사 학력 이상이 인구의 40%를 차
지합니다. 그렇다보니 학부모들이 교육에 관심이 많고 그 관심이 카운티 교육행정에 반영된 결
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 경험을 미국 교육 전반에 대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어쨌든 가장 부러운 건 ‘책 읽히는 교육’입니다. 우리나라도 문제 풀이 교육에서 벗어나 책 읽는
교육으로 바뀔 수는 없을까요. 우리 사회의 미래는 전적으로 학생들의 독서량에 달려 있다고
믿는 저는 이곳의 교육방식을 당장 수입하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