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흑인인권이 한국사회에 고하다
김민형 서울경제신문 차장 2019년 1월30일
지난 1월21일 월요일. 미주리주 콜롬비아 퍼블릭스쿨을 비롯해 미국의 모든 학교가 휴교했다. 덕분에 세 명의 아이들과 하루 종일 씨름하느라 온 힘을 다 쏟았다. 미국 증시는 휴장했고 대부분의 회사들 역시 문을 닫았다. 미국 생활 중 흔치 않은 National Holyday 였다. 무슨 날 일까. 평생을 흑인인권운동에 앞장서다 흉탄을 맞고 스러진 마틴 루터 킹 주니어(MLK) 목사 기념일이다. 미국은 매년 1월 셋째주 월요일을 ‘MLK DAY’로 정해 다양한 추모행사를 연다.
1. 미국 첫 여행이 가져다 준 강렬한 화두
미국 사회에서는 이방인이자 잠시 스쳐가는 인연일 뿐인 기자가 MLK DAY가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지난 겨울방학에 가족들과 함께 했던 첫 미국 자동차 여행이 가져다 준 선물이다. 우리 가족은 지난 1월 초 약 보름 동안의 겨울방학 기간에 멤피스-내쉬빌-애틀랜타-뉴올리언스-휴스턴-댈라스로 이어지는 12일 간의 자동차 여행을 다녀왔다. 미국 중남부 지역을 둘러보는 코스였다. 7살 꼬맹이 2명과 10살짜리 아이들에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당연히 호텔 수영장이겠지만, 나에게는 첫 여행지 멤피스에서 만난 MLK 였다. 여행 계획을 짤 때만 해도 ‘블루스의 황제’ B.B.King의 도시인 멤피스의 공연거리 ‘빌 스트리트’(beale street)에 갈 생각에 들 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멤피스에서는 물론 여행이 끝난 후에도 지워지지 않는 섬광 같은 화두는 MLK다.
2. “I AM A MAN” from Memphis
멤피스 변두리의 ‘Lorraine Motel’을 찾았다. 허름한 2층짜리 모텔이다. MLK는 지난 1968년 4월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을 지지하기 위해 멤피스를 찾아 이곳에 묵었다. 그는 자신의 방 306호 앞 발코니에서 백인 탈옥수 제임스 얼 레이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의 나이 불과 39세였다. 306호 방 발코니에 걸려있는 화환이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준다. 현재 이곳은 비영리단체가 국립인권박물관(Civil Right Museum)으로 조성해 미국의 흑인인권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조성해 놓았다. MLK가 묵었던 방과 저격을 당한 방은 과거 그대로 보존해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충격 자체였다. MLK에 관한 전시물 뿐만 아니라 흑인들이 짐승처럼 배에 실려 미국으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 아이를 품에 안은 한 흑인여성을 팔고 있는 백인의 모습, 백인우월주의단체 KKK의 활동 모습 등을 이미지화 해 전시해놓았다. 단순히 상상으로만 그렸던 흑인노예의 삶의 모습을 마네킹이나 영상으로 직접 보니 훨씬 와 닿았다. 또 미국 사회가 남북전쟁 이후 흑인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해 온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희생자들도 소개했다. 아이들은 박물관 관람 초반부터 벌써 겁을 먹고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지만 나는 점점 빠져들었다. 특히 필자는 이번 연수 기간 중에 미주리대학의 Global Leadership Program에서 ‘미국 흑인의 역사’를 수강했던 덕분에 더욱 집중하게 됐다.
흑인해방운동가로서 엄청난 웅변가였던 MLK를 대표하는 문구는 한국에선 “I have a dream”이다.하지만 미국에서는 이 문구 보다 “I AM A MAN”이 더 유명하다. 이 문구는 미국의 산업이 급격히 성장했던 1950년대 이후 약자였던 노동자들의 슬픔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중에서도 약자에 속했던 흑인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권리를 요구했던 표어다. MLK가 멤피스 환경미화원들을 지지하기 위해 찾았을 당시 파업노동자들은 이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피를 토하며 외쳤다. “제발 우리를 사람으로 취급 해달라”로 말이다.
흑인에 대한 억압은 노예제도가 있었던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매우 폭력적이고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로 린치(Lynching)다. 린치란 백인 군중들이 흑인들을 공개 처형하는 행위다. 방법은 매우 잔혹했으며 대부분 마지막에는 길거리에 목을 매달았다. 흑인들에게 공포를 심어줘 백인들에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백인들은 심지어 신문에 린치 행사를 광고로 내기도 했고, 백인들은 온 가족이 도시락을 싸 들고 공개처형 장면을 보러 나들이를 나오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인들이 흑인을 린칭했던 이유 중 대부분이 흑인이 백인 여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거나, 성적인 농담을 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였다는 것이다.
링컨 대통령이 이끌었던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하면서 미국에서 노예제도는 사라졌다. 하지만 흑인들의 삶은 오히려 더욱 힘들어졌다. 남부지역에서 제도적으로는 노예제도가 없어졌지만, 문화적 혹은 기득권을 이용해 매우 교묘한 방법으로 흑인을 억압했다. 남부의 미국인들은 백인보다 훨씬 숫자가 많은 흑인들이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할 것을 두려워했다. 두려움은 천재적인 흑인억압 아이디어들을 생산해냈다.
‘평등하지만 분리한다’(Equal But Separate)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치밀하게 차별을 진행했다. 흑인들 중 문맹은 투표를 할 수 없는 법을 만들었다. 동시에 흑인들은 백인들과 함께 학교를 갈 수 없도록 했다. 식당, 화장실, 버스 등 생활 거의 모든 것에서 백인과 흑인은 분리되었다. 사실상 근대와 현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에서 흑인인권 운동은 이 같은 일상생활 속 분리 혹은 차별을 하나하나 없애온 과정이다.
3. 드러나는 미국 남부의 민낯
기자가 1년간 연수를 하고 있는 미국 미주리주는 흑인노예제도와 관련해 매우 역사적인 곳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1820년 메인주를 자유주(free state)로 추가하고, 미주리를 노예주(slavery state)로 추가했다. 동시에 미래에 추가로 연방정부에 편입되는 주들의 경우 미주리주 남부 경계선인 36도30분 이남은 노예주, 이북은 자유주로 편입하는 ‘미주리협정’을 맺었다.
당시 미국에는 자유주와 노예주가 각각 11개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서부로의 확장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서부로의 개척이 이제 막 시작된 시점에 미국은 목화생산을 위해 노예 노동력이 필수적인 남부와 공업중심의 도시로 노예 노동력이 딱히 필요없었던 북동부로 나뉘어 노예제도를 놓고 갈등하고 있었다. 미주리를 노예주로 인정하면 남북간 균형이 깨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메인주를 기존 매사추세츠주에서 분리시켜 자유주로 추가하는 대신 미주리를 노예주로 인정해주기로 한 것이다. 상원의원이 각 주에서 2명씩 선출하기 때문에 상원에서의 균형이 중요했던 것이다. 남북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갈등이 이 협정으로 잠시 됐다. 하지만 1857년 위헌으로 규정되면서 결국 1861년 미국은 남북전쟁을 겪는다. 미주리주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됐다.
미주리주 남쪽 주경계서인 36도30분 선을 보면 매우 기형적이다. 목화 등 농산물 생산에 적합한 기후를 가진 36도30분 이남지역에서 미주리주는 마치 상투처럼 북쪽으로 툭 튀어나와있기 때문이다. 미주리협정 당시 얼마나 심각한 갈등과 견제가 있었으며, 그 갈등 조정의 타협안이 얼마나 기형적이었는지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1월1일 미주리주 콜럼비아 지역공항에서 열린 중간선거 연설회에서 조쉬 홀리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미소 짓고 있다. /사진=ABC 17 NEWS
현재의 미주리주는 완벽한 ‘트럼프주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치러졌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을 공화당으로 갈아치웠다. 이로써 미주리주의 상원의원 2명은 모두 공화당 소속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말 중간선거 때 미주리주 콜럼비아를 직접 방문해 조시 홀리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을 정도다. 기자가 연수를 하고 있는 콜럼비아는 미주리대학이 있어 교육수준이 높은 지역으로 대학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민주당 지지자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콜럼비아 방문 당시 미주리대학 학생들이 반대의사를 표하기 위해 미리 연설장을 예약하고 ‘노쇼’하는 저항을 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연설했던 콜럼비아 공항은 비가 오는 궂은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연설이 끝난 오후까지 밀려드는 인파로 교통체증을 겪었다. 그리고 선거는 공화당의 승리였다.
심지어 한국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공격도 표면화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다니는 한 한국교회에 지난 MLK DAY 때 백인 2명이 “냄새 나는 유색인종들을 미국에서 꺼져라”는 낙서를 남기고 간 사건이 발생했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목사님은 일요 예배 때 “우리 스스로 조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아이들을 오랜 기간 자기들끼리 밖에서 놀지 못하도록 하세요.”라며 “대통령이 불쌍한 남미난민들을 막겠다고 정부까지 셧다운하면서 장벽을 세우겠다고 하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 그런 대통령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6개월 간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미국 대통령이나 정부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처음이었다.
4. 갈 길 먼 흑인지위 향상
과거 노예주였으며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한 ‘남부식 문화’를 자랑으로 삼는 미주리주에서 생활하면서 실생활에서 직접 접한 흑인들의 현실은 여전히 열악하다. 그나마 미주리주에서 인종차별 색채가 가장 적다는 콜럼비아에 살면서도 말이다. 물론 북부나 이스트코스트 지역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텍사스, 루이지애나, 조지아처럼 Deep Southen 지역이 아님에도 이 정도니 정말 남쪽은 어떤 상황일지 예상이 된다.
사실 미주리주는 불과 5년 전인 2014년 흑인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후 흑인들의 항의집회가 폭동으로 이어졌던 곳이다. 사건이 일어난 곳은 퍼거슨이란 도시로 필자가 사는 콜럼비아에서 동쪽으로 한시간 반 정도를 달리면 나타난다. 당시 퍼거슨에는 비상사태가 선포됐으며 야간통행이 금지됐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 한국에서도 ‘퍼거슨 사태’로 알려졌던 사건이다. 미주리주 주민들에 따르면 이 사건 이후 미주리주에서의 흑인차별에 대한 각성과 반성이 일어나면서 다양한 변화가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 이후 그런 분위기는 다시 사라지는 모습이다.
우선 고등교육 현장을 비롯한 교육관련 시설에서 흑인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실제 미주리주 최고의 대학인 미주리대학에서 흑인들은 절대적으로 소수다. 아시아계 학생들 보다도 소수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번 학기에 수강하는 저널리즘스쿨의 학부 및 대학원 코스에서 흑인은 매우 드물다. 한 학부 수업의 경우 약 200명의 학생들 중 흑인은 10명도 되지 않는다. 산학협력 프로그램인 대학원 코스의 경우 약 50명의 학생 중 흑인은 2명 뿐이다.
한국인들이 영어 튜터를 위해 주로 찾는 대니얼분도서관에서도 흑인을 찾긴 쉽지 않다. 이 도서관은 한국인과 중국인들의 자녀들은 주로 영어과외를 받으러 오고, 백인들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다양한 도서관 프로그램을 즐기러 온다. 하지만 지난 6개월 동안 흑인 가정이 자녀들을 데리고 교육프로그램을 수강하러 온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대중스포츠라고 하지만 한번 라운딩에 20~50불 가량의 돈을 내야 하고, 약 1,000불 가량의 클럽을 사야 즐길 수 있는 골프장에서도 흑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콜럼비아의 경우 수영장, 헬스클럽, 실내트랙, 실내농구코트 등을 갖춘 종합체육시설 ARC의 5인 가족 한달 이용료가 50불 가량에 불과하다. 다른 체육시설에 비해 비교적 가격이 비싼 편인 골프는 이곳 흑인들이 즐기기에는 쉽지 않은 스포츠인 것이다.
흑인들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왕따를 당한다. 한국의 실내놀이터 같은 실내 놀이시설에서는 매주 주말 생일파티가 열린다. 대부분 백인 초등학생들끼리 파티를 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까지 백인 초등학생 사이에 흑인 학생이 끼어있는 생일파티를 본 적이 없다. 기자의 옆집에 사는 50대 백인 여성 J모씨는 집앞 공원에 밤에는 놀러 가지 말라며 심각한 표정으로 조언했다. 그녀는 “흑인들이 밤만 되면 집앞 공원에서 마약을 거래한다”며 “전신주에 줄이 묶인 신발이 걸려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 신호이니 가급적 아이들을 위해 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웃에 사는 가족에 대한 선의의 조언이었겠지만, 마음 속 불편함을 지우긴 힘들었다. 게다가 가끔 지역 뉴스를 장식하는 총기사건 등 강력범죄 용의자들 역시 대부분 흑인이다. 다만 거리의 노숙자들은 백인과 흑인이 비슷한 비율이라는 점이 다소 특이한 점이다.
5. 끊지 못하는 고리
미국에서 흑인의 지위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는 이유를 미국인들은 무엇이라고 볼까. 미국인들은 다양한 분석을 했다. 그 중에 필자가 직접 들은 가장 명쾌한 답은 “아이에게 아빠가 필요할 때 아빠가 집에 없고 감옥에 있다”는 토마스 노드버그 미주리대학 저널리즘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한 미국에서 여전히 흑인들이 차별을 받고, 경제 사회적으로 약자로 남아있는 것은 아이들의 교육을 지원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도록 지원해야 할 시기에 부모가 감옥에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교육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한 필수과정이며 개인의 각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특히 아이들의 성장과정이 중요한데 그 시기에 흑인들의 아버지들은 감옥을 제 집처럼 들락날락하는 경우가 많다”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또 다른 흥미로운 분석은 흑인인권 문제에 자주 등장하는 경찰에 대한 분석이었다. 앨런 태커 미주리대학 사회학 교수는 “경찰 대부분이 백인이라는 점이 흑인들이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인한 피해를 입는 주된 요인”이라며 “실질적인 범죄는 히스패닉 계열도 적지 않지만 히스패닉계 경찰이 꽤 높다 보니 경찰에 의한 히스패틱계의 피해는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도 흑인들은 일정 정도의 교육이 필요한 경찰이 되는 것 마저 열심히 하지 않고 있다”면서 “더 분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인적으로는 불과 몇 세대 밖에 흐르지 않은 노예제도의 역사적 유산도 한 몫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흑인들은 미국의 일원이면서도 그들끼리의 동질감과 유대감을 갖고 있으며 이는 백인 중심 사회에 완전히 녹아 들지 못하고 폐쇄성을 띄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거 노예제도가 시행됐을 때 그들은 팔려온 아이를 공동으로 함께 길렀다. 마치 흑인 전체가 큰 가족 같은 유대감을 갖고 있다. 그들끼리는 흑인을 ‘Nigger’라고 부르는 것이 오직 흑인에게만 허용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미주리를 비롯해 미국의 흑인들 사이에서는 ancestrydna.com이 화제였다. 100달러만 내고 자신의 피 한방울을 보내면 DNA를 분석해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서비스다. 자신의 조상들이 어느 지역 사람들인지 뿌리를 궁금해하는 흑인들을 겨냥한 상품으로 꽤 인기를 끌었다. 흑인해방운동 수업을 맡았던 흑인인 아스키아 미주리대학 교수도 이 서비스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는 “현재의 나이지리아 서부 쪽에 사는 인종들의 DNA가 가장 많다는 결과를 받았다”며 “흥미로운 점은 약 3% 정도가 영국인 DNA로 나왔다”고 말했다. 그의 조상들 중 누군가가 백인에게 강간을 당해 아이를 출산했다는 증거다. 그는 “자신의 뿌리가 궁금해 DNA 검사를 받지만, 사실 돌아오는 것은 슬픈 조상들의 역사에 대한 확인 뿐”이라고 전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러운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 탐험이 결국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역사의 아픔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비슷한 감정은 결국 흑인들의 동질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동질감이 오랜 기간 자신들이 살아온 사회로 확장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폐쇄적이 될 수 밖에 없다.
6. 한국사회에 주는 교훈
미국 흑인인권의 역사와 현상이 점차 다문화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한국사회에 줄 수 있는 교훈은 첫째, 인간존엄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역사는 플라스틱 쓰레기처럼 없어지는 데 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차별을 하는 사람들이 던진 채찍과 차별을 당한 사람들의 상처가 대를 이어 유산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내전까지 겪었지만 흑인을 비롯해 유색인종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문화에서 성장한 일부 백인들은 그런 문화가 집안의 가풍처럼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세대를 거치면서 비록 희석되긴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다. 아울러 차별과 억압에 대한 흑인들의 상처 역시 아물지 않고 있다. 우리 스스로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만행을 잊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국 사회에 점차 늘어나고 있는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은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긴다. 따라서 어른은 물론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 인종차별은 인류를 대상으로 한 심각한 범죄다.
둘째, 국내 거주 외국인 교육서비스 재정을 확대해야 한다.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사회의 일원으로 그 사회에 기여할 수 없고 오히려 짐이 된다. 불행하게도 부가 세습되는 현대 자본주의 환경에서 사회적약자인 다문화가정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우리 사회에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최근 교육부가 다문화전용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한 정책은 환영할 만 하다. 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수요자 입장에서 필요한 교육서비스를 개발해야 한다.
셋째, 국민들 스스로 사고의 유연함을 가져야 한다. 단일민족의 우월성을 강요당하던 기존 문화에서 벗어나 어떤 민족이라도 한국의 테두리 안에서 녹여내 국가의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대대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동남아를 비롯한 외국인들은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들이 그런 한국에 다시 환원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축구 대표팀에 귀화한 외국인이 월드컵에서 골을 터뜨리고, “제2의 조국 한국에 기쁨을 줘 행복하다”란 인터뷰를 한다면 그것이 단일민족의 자긍심에 생채기를 내는 일일까.
특히 이민법을 다루는 정부의 정책이 매우 세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 사례에서 보듯 싸구려 화장은 언제든 지워질 수 있다. 한국인들을 포함해 현재 미국에 있는 외국인들이 트럼프 정부의 이민법 변화를 바라보며 느끼는 불안감은 결국 미국에 대한 반감과 실망으로 돌아온다. 한 국가의 이민법은 그 국가가 외국인을 대하는 스탠스다. 정치적 입김에 좌우되는 이민법이 아니라 백년대계를 바라보고 움직이는 이민법이 되야 한다.
PS. 연수 오기 전 사회부에서 근무하면서 썼던 칼럼을 첨부한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1RX1IN1NQA
[시각] 한국의 인종차별 #미투 #위드유
김민형 사회부 차장 2018-03-19 17:23:51 사회일반 37면
10년 전쯤 국내에서의 일이었다고 한다. 한국인 여성과 데이트를 즐기던 한 외국인은 길거리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한 한국인 남성이 다짜고짜 “한국 사람이 왜 외국 사람을 사귀나. 한국 여자가 한국 남자를 사귀어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모자라 계속 따라다니면서 폭언을 내뱉었다. 외국인 남자는 처절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대응할 방법이 없어 그냥 참았다. 이 외국인 남자는 요즘 다양한 TV프로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인기를 끌고 있는 ‘독다(독일 다니엘)’ 다니엘 린데만이다.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 속에 숨어 암묵적 동의하에 행해지는 비겁한 폭력이다. 가끔은 애국심이라는 양념까지 동원된다. 한국인보다 피부색이 짙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심지어 부모 중 하나가 한국인이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파트 단지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폭력이 가해진다.
인구절벽을 눈앞에 둔 한국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인종차별은 국가적인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 그나마 현재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외국인 흡수가 꼽히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민족적 폐쇄성은 분명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국내 체류 외국인은 218만명으로 전년에 사상 최초로 200만명을 돌파한 후 2년 연속 200만명을 넘어섰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4.2%에 달한다. 오는 2021년에는 300만명을 넘어서 외국인 비중이 5.8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5.7%)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의 각종 대책에도 출산율 하락이 멈추지 않는 가운데 국내로 유입되는 외국인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인종차별이 만연해 있다면 어느 누가 피부색이 다른 한국인으로 살고 싶어 할까.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격 같은 거창한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우리의 미래를 위해 민족적 폐쇄성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최근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미투(MeToo)’ 사건들과 인종차별은 닮은 점이 많다. 미투의 근본 구조는 저항력이 약해 폭력을 당해도 참고 있었던 사람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다. 미투운동이 시대적 의미를 갖는 것은 늦게나마 밝혀진 폭력 행위를 법에 따라 처벌해 경종을 울리고 피해자들을 도와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을 통해 재발을 막는 사회적 노력에 있다.
인종차별 폭력 역시 같은 구조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인종차별을 당할 때마다 피가 끓는 분노를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힘없는 소수라서, 혹은 잠시 살다 가는 이방인이라 문제 제기를 못하고 개인적인 트라우마로만 남겨두는 경우가 많다. 이번 기회에 인종차별 미투도 이어져 우리 사회가 반성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위드유(With You)!” /kmh204@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