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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 리포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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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왕눈이의 학교생활

왕눈이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그러니까 난 딸은 없이 아들만 두고 있다.

왕눈이란 이름은 물론 별명이다. 아내가 왕눈이를 가졌을 때 초음파검사를 하던 의사선생님이 “얘는 눈이 아주 크네요, 왕눈이네요.”했다. 그때부터 그러니까, 태어나기 전에, 우린 이미 왕눈이라고 불렀다. 예상대로 왕눈이는 눈이 컸다. 크면서 조금 작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우린 아직까지 왕눈이라고 부른다.



왕눈이가 학교에 갈 무렵 우린 사립학교를 보내기로 하였다. 주변에선 “사내녀석은 잡초처럼 막 굴러야지 괜히 유난떤다.”고 했지만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내 아이는 달라요, 아주 특별하죠.’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다르게 키워보고 싶었다. 당시는 IMF 이후라 추첨경쟁률도 높지 않았다. 다행히 한 대학교 부속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아내나 난 솔직히 우리가 겪어온 길( 수많은 입시제도와 시험지옥)을 아이에겐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첨부터 학교는 신나게 놀고 재미있는 곳이란 느낌을 갖게끔 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그것도 일 학년 아이에게 무얼 시키겠다는 건가? 아내도 이점은 비슷했다. 그는 아예 다음해에 학교에 보내자고 했다가(왕눈이는 12월 31일생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이를 물으면 항상 부연설명을 해줘야한다.) 나의 성화에 할 수없이 보내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왕눈이는 유치원과 태권도학원에 다니며 하고 싶은 대로했다고 생각한다.



막상 학교가 결정되고 입학 두 달 전에서야 왕눈이는 비로소 한글을 깨치느라, 숫자를 익히느라 대부분 엄마와 정신없이 보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여기서 많이 제외되었다.

입학식 날. 의젓하게 감색 버튼씩 교복을 입은 왕눈이의 모습은 정말로 멋있어 보였다.

문제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처음엔 낯선 환경에 대한 호기심으로 잘 다니던 왕눈이가 점차로 학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 보였다. 아침밥을 먹고 세수하고 교복을 입고 통학버스까지 타려면 7시엔 일어나야 했고 버스시간 맞추느라 정거장까지 같이 달리기를 하다보면 언제나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학교가 싫다니… 더구나 지금은 학기초인데…



입학후 한 달쯤 되었을까? 왕눈이의 입에서 노골적인 불평이 나왔다. 언젠가 “아빠, 학교는 누가 만들었어? “라고 하더니 “학교는 괜히 자는 아이 깨워 갖고 괴롭히는 곳이야”하고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다. “왕눈아, 학교생활에서 가장 신나는 게 뭐야?”하고 물어보면 자기는 ‘축구를 하는 체육시간이 제일 좋은데 잘하지도 않아 싫고, 그냥 밥 먹는 점심시간 때문에 학교에 간다.’는 대답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왕눈이가 가장 싫어하는 건 ‘선생님이 아이들을 잘 때린다.’는 것이었다.’ 이 선생님은 특히 등을 ‘찰싹’ 소리내어 때리는데 집에서도 흉내를 냈고 아내는 가끔 왕눈이의 등에 남은 흔적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나는 ‘말 안 들으면 맞아야지 선생님이 괜히 때리겠냐’고 선생님 편을 들었다. 스스로도 누군가가 ‘요새 아이들은 부모가 너무 기 안 죽이려고 하다보니 예의가 없어, 그래서 고치려고 하면 벌써 사춘기가 되고 이때는 반발심이 많아 오히려 역효과만 볼 뿐… 따라서 애들은 일찍부터 어느 정도 기를 죽여야 한다.’는 말에 동조하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기억하기에도 아직까지 왕눈이에게 손찌검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흔한 말로 우린 옛날부터 숱하게 맞고 자랐다. 한 선배는 ‘조선 놈과 명태는 패는 게 최고야.’ 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나는 반대이다. 아무리 아이라 할지라도 말로써 차근차근 얘기하면 다 알아듣는다. 설사 잘못을 반복하면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세우는 편이 낫지 체벌은 곤란하다. 왜냐면 체벌에 흔히 ‘사랑’ ‘교육적’운운 하지만 결국엔 인간의 감정이 개입되기에 비교육적이다. 실제로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봐도 맞고 나서 좋은 감정을 가졌던 것은 거의 없었다.

자기아이는 부모가 제일 잘 안 다는데 그렇게 보면 왕눈이는 아주 영리하지는 않지만 여리고 맑으며 무엇보다 심성이 고운 아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자기만 맞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아이가 맞고 있다고 한다. 아내도 같은 반 아이 엄마들에게 물어 본 모양이다. 그 아이들도 맞고 온단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당연시했다.

사립학교 재정상 한 학급에 46명의 아이들을 지도하려면 선생님도 어느 정도 인간일 수 있음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지만 그가 선택한 방법이 고작 이것일까?



학년이 바뀌고 담임 선생님이 바뀌었다. 우린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선생님의 매는 계속되었다. 이번엔 아예 큼지막한 몽둥이가 교실에 비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을 안 들어서가 아니라 시험을 (초등학교는 시험이 없는 걸로 아는데 이 학교는 자랑스럽게 성적향상을 위해 계속하고있다.) 잘 못 치르거나 심지어는 일기를 잘 못썼다는(일기 쓰기에도 잘하고 못하고가 있으랴마는) 이유로 맞았다는 얘기를 듣곤 나는 분노했다. 선생님에게 맞고 온 날 아이의 일기장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선생님, 제발 때리지 마세요, 우리가 동물인가요? 미국엔 아이를 학교에서 절대 때리지 않는데요.’

다음 날 받아본 아이의 일기장에 선생님은 이렇게 적어놓았다. ‘거긴 정말로 좋은 곳이군요.’

미국으로 오기 전 학교를 찾았다. 폭력교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선생님은 소박 인자해 보였다. 그리고 ‘왕눈이가 예의바르고 밝으며 착하다’고 칭찬으로 시작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아이들 특유의 과장이었을 거야.’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해외연수로 왕눈이가 학교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귀국 후의 재입학여부를 묻자(솔직히 우린 이 학교에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 선생님은 사립학교이기에 곧바로 충원을 해야하고 지금 이 학교에 들어오려고 대기하고있는 숫자가 다니는 아이들보다 많다는 얘기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작년 8월 우리가족은 이곳 미국 중 북부(Midwest) 미시간주의 주도(Capital city)인 Lansing

에 도착했다. 이곳은 5대호(Great Lakes)가 주변에 있고 M.S.U가 있는 미국에서도 core라고 불릴 정도로 미국의 문화와 생활이 스며있는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의 교육도시이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새 학기가 8월말에 시작한다. 왕눈이는 집 앞에 있는 ‘Central Elementary School’ 에 다니게 되었다. 한국이름은 영어로 발음하기가 정말 힘들다. 그래서 여기 오기 전 왕눈이는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Peter’라고 불렀기에 이름을 그렇게 바꾸었다.

나의 아이에 대한 소박한(?) 꿈은 ‘그저 열심히 놀면서 친구를 사귀고 세상에 대한 눈을 키웠으면’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영어라도 잘하면 더 바랄 것이 없고…

학교에 처음 갔을 때 문 앞에서 젊은 남자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학교시설 이곳저곳을 안내해주었다. 교실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고 마치 집처럼 아늑해 보였다. 음악실, 컴퓨터실, 체육관 ,식당에 이르기까지 이 선생님은 구석구석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톰 크루즈를 닮은 이 선생님은 알고 보니 교장 선생님이었다.

이곳의 등교시간은 아침 8시 30분에서 35분이다. 문은 8시 30분에야 연다. 이 시간이면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태우고 오느라 학교 앞은 긴 차량의 연결을 이룬다. 수업도 1학년부터 5학년 공히 첫날부터 오후 3시 35분까지 이뤄진다. 교과서는 학교의 사물함에 비치해두고 가방엔 간식과 필기도구만 갖고 다닌다. 휴식시간이라 따로 없고 오전, 오후 recess라고 한번 씩 있는데 축구, 야구. 풋볼을 주로 한다. 화장실에 가고싶으면 선생님에게 얘기하면 된다.

점심은 학교급식인데 한끼에 $1.80이고 우유는 $.50이다. 점심시간이 15분 정도 밖에 안돼 왕눈이는 언제나 다 못 먹었다고 투덜거렸다(전 학년이 돌아가며 식당을 이용한다)



왕눈이네 담임선생님은 Mrs. Dunn이란 교사경력 20년 베테랑이다. 자신은 한국학생을 맡아본 경험이 있다며 반갑게 우리를 맞아준다.

Dunn이 첫날 보내준 편지에 우린 약간은 감격하였다. 거기엔 아이를 어떻게 지도하겠다는 자신의 교육관이 그대로 적혀있는데 시적인 문장의 인용과 어울려져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한 학급에 16명, 이중 인도 계 아이 2명, 중국 계 아이 1명, 그리고 왕눈이, 나머지는 모두 백인아이들이다

복도엔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전교생의 사진이 걸려있고 처음 전입 온 학생은 고학년의 아이를 지정, 새 생활에 적응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왕눈이처럼 외국인 학생은 E.S.L이라고 일주일에 두 번 따로 수업을 받는다..

학교에서 받아온 소식지에는 학교생활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이 자세히 쓰여있다. 예를 들어 복도에서 달리거나 소리를 내서는 안되며 이를 위반 시는 교장선생님이 특별 지도한다. 아이들은 그러나 교장Bob을 전혀 무서워(?) 하지 않는다. 영어 식 표현이어서 그런지 그저 만날 때마다 ‘ hi, Bob’이다.

교장 선생님의 역할은 한국 같으면 용역아저씨가 하는 일을 도맡아한다. 체육관에서 전체행사가 있으면 책상을 옮기고 마이크를 준비하며 환등기를 설치하는 등 모든 일을 Bob이 하고 있었다. 전교생의 이름도 제일 많이 외워 알고있다.



왕눈이는 예상대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 해 나갔다.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이었다.

영어는 아직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 태권도를 2년 했고 스포츠를 좋아해서인지 금방 친구들이 생겨났다. 우리도 어차피 1년 있으면 한국 돌아가기에 별다른 주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람쥐가 나오는 초원에서 왕눈이는 뛰어 놀기에만 바빴다.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왕눈이는 여기서 수영, 스키, 축구를 어느 정도 마스터했다. 주로 커뮤니티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는데 돈도 많이 들지 않았고 이를 통하여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그들의 초대로 집에 가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영어도 웬만큼 늘었는데 아직 성에 차지는 않는다. 1년은 아이라 할지라도 영어하기엔 짧은 기간이다. 왕눈이는 .한국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굳이 왕눈이 뿐 일까? 한국부모들도 이곳에 좀 더 있고 싶어한다. 주변엔 아빠는 한국에 있고 아이하고 이곳에 머무는 한국엄마들이 참으로 많다. 돌아 갈 쯤 이면 또다시 왕눈이를 설득하느라 홍역을 치러야 할 지 모르겠다. ‘ 혼자만 이곳에 남겨둘 방법은 없을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애초의 결심대로 한국에서 부딪히는 도리밖에….다시 가는 한국학교에서 왕눈이는 처음엔 좀 어렵겠지만 정말로 잘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짧은 기간에 장님 코끼리 만지듯 아니, 그보다 더 어설픈 판단이 될지 모르겠다. 특히 역사, 문화 모든 것이 다른 이곳과 비교는 말이다. 그러나 학부모로서 바램이 있다면 더도 말고 ‘학교는 아이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만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우리의 믿음. 이것도 지나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