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밀워키 개구리들이 성한가 모르겠다. 경칩이 지난 지도 여러 날. 얼마 전에는 기온이 섭씨 20도
가까이 올랐다. 사람들은 100년만에 가장 따뜻한 겨울이라며 모래밭에서 웃통을 벗고 공놀이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밀워키가 그냥 밀워키냐’며 절대 마음 놓을 수는 없다는 사람이 다수였다. 그들 말처럼
3월 13일 현재 기온은 영하 3~4도로 떨어졌고 도로가 마비될 정도의 폭설이 쏟아졌다.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 잠을 깨 활보했던 개구리라면 졸도할 상황이다.
그래도 예전보다 확실히 따뜻해진 것은 맞다 한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지지난 해보다 지난해가
따뜻했는데, 지난해보다 올해가 더 따뜻하다”는 것. 1년 연수생에게는 “진짜 밀워키 겨울을 못 보고
간다”며 아쉬운 표정(?)을 짓기도 한다. 이곳으로 오기 전 “그 추운 위스콘신 땅에 얼어죽으러 가느냐?”
는 핀잔을 듣고 각오까지 했던 터라 어이없는 아쉬움이 있긴 하다. 다만 밀워키의 가장 큰 단점 하나
가 사라지는 듯해서 이곳에 대한 애정은 커질 것 같다.
미국 연수를 준비하면서 주변의 도움으로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 곳이었다. 두 곳은 현지 대학의 허
가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이다 두어 달 만에 가까스로 허가를 받은 곳이 Uni-
versity of Wisconsin-Milwaukee(UWM)였다. 물론 고민 없이 밀워키 지역을 선택했다. 가장 큰 이유는
한인 사회로부터 떨어져 지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밀워키가 아닌 다른 두 곳의 선택지는 모두 기자들의
대표적 연수지였는데, 연수를 와서까지 기자 사회 속에서 생활하기는 싫었다. 또한 아이들의 영어 학습
을 위해서도 가급적 한인들이 많은 곳은 피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밀워키가 어떤 지역인지 공부했다. 도시 규모로는 미국에서 30위 안팎, 위스콘신주에서 가장
큰 도시, 밀러 맥주와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의 고향. 그러나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은 건 북미 오대
호 중 하나인 미시건 호수를 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다처럼 넓지만 잔잔한 호수를 접한 밀워키라는
도시가, 지치고 찌든 나를 푸근히 위로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그러나 웬걸. 밀워키에서 집과 차를 장만하고 얼마 되지 않아 소요사태가 터졌다. 흑인 범죄 혐의자가
흑인 경찰에 의해 총격되면서 성난 흑인들이 상점을 털거나 불을 지르며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 때
문에 주방위군까지 출동 대기 상태에 돌입했다. 다행히 이때는 밀워키에서 1시간 반 가량 떨어진 시카
고로 2박 3일 여행을 떠나와 있던 터였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지 못하니 불안감은 오히려
더 컸다. 집으로 돌아온 뒤 상황은 진정되었지만 너무도 일찍 밀워키의 민낯을 보게 된 경험이다.
잠재된 불안 요소가 적지 않은 도시지만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일은 이례적이다. 세그리게이션
(segregation; 인종간 분리) 정도가 미국에서 최고 수준인 탓이다. 정책으로 강요되지 않음에도 흑인
과 백인들의 주거지는 확연히 구분된다. 밀워키강을 사이에 두고 호수를 접한 강의 동쪽에서는 흑인이
드물고, 강의 서쪽에서는 백인을 보기 어렵다.
이에 따른 경제 상황은 짐작하는 대로다. 이는 꽤 오랜 시간 문화로 굳어져 밀워키 소요 사태 때 분노
한 흑인들도 강 동쪽으로는 넘어오지 않았다. 강 동쪽은 백인들과 더불어 아시안과 유대인들이 차지
하고 있는데, 생활 수준이 비슷한 이들은 화합하며 공존하는 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이질적 문화의 어색한 동거가 밀워키의 역사적 특징이라는 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우 반공주의자 조세프 매카시가 바로 공화당 소속의 위스콘신주 연방상원의원이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가장 먼저 사회주의 시장을 배출한 곳은 밀워키이고, 밀워키 사회주의 정부는 1910년부
터 1960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기류는 현재까지 이어져 위스콘신주 차원에서는 공화당의 차세대
주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배출한 반면, 지난 대선에서 밀워키 지역만큼은 민주당 힐러리 클리턴의
득표율이 눈에 띄게 우세했다. 위스콘신주의 경제 수도인 밀워키에서는 공업과 상업이 발달하고 그 외
는 낙농업 지역이라는 점이 엇갈린 정치적 성향을 낳지 않았나 싶다.
역사를 더 올라가면 밀워키라는 이름에서 풍겨나듯, 이곳은 북미 인디언들이 탯줄을 묻던 곳이다. 그러
다 프랑스의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자크 마르켓 일행에 의해 17세기 후반 유럽에 소개되었다. 이후엔
독일계 이민자들이 대거 이주해 도시를 세워 오늘의 밀워키가 형태를 갖췄다. 이로 인해 현재도 독일풍
의 건축물들이 즐비하고 도심에는 마르켓 선교사의 이름을 딴 마르켓 대학이 있다. 다양한 문화적 전통
과 사상이 녹아있는 밀워키는 미국 역사의 한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역사적 멜팅팟(melting pot) 속에 이제 한인들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2~3,000명에 이를 것
으로 추산되는 밀워키 한인들은 상업 분야나 학계에서 활약하는데, UWM 한인 교수들의 수만 30명 정
도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10년 넘게 이곳에서 살아온 경우로, 잠시 살다가는 뜨내기는 찾기 어렵다. 높은
교육수준과 소득 수준을 바탕으로 토착 비율도 높아서 이방인이라는 인식을 탈피한 지는 오래다. 그
결과 위스콘신 주는 올해 초 한국과 ‘운전면허 상호인정’ 약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아직 한인들을 위한 각종 시설은 부족하다. 이 때문에 한달에 한번 정도 시카고를 찾는 게 밀워키
한인들의 일상이다. 한인마트를 비롯해 한인 의사가 진료하는 병원, 한식당, 서점, 안경점, 여행사, 미용
실 등이 모두 시카고에 몰려있는 까닭이다. 가끔은 초고층 빌딩 속 차도남 차도녀가 되고픈 밀워키 한인
들의 소박한 소망 역시 시카고 월례 방문의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누군가 다시 밀워키 연수를 고민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글을 적어 보았다. 밀워키에 대한 정보
가 턱없이 부족해 영문 웹사이트까지 뒤질 때 느꼈던 답답함이 이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확실
한 것은 아름다운 풍광과 합리적 물가 수준, 신뢰할 만한 교육 여건, 실제 주거지 주변의 안전한 치안
상황 등을 고려할 때 밀워키는 최적의 연수지 중 한 곳이라는 점이다. 아울러 내가 만난 최고의 이웃들
은 밀워키의 빼놓을 수 없는 덤이다. 여기서 만난 한인 교포들 그리고 아파트 이웃들의 따뜻한 애정은,
벌써부터 이별을 가슴 쓰리게 하고 있다. 이후 밀워키를 밟는 누구에게라도 이와 같은 행운이 허락되기
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