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겨울을 나자니 밤이 참 길다. 물리적으로도 그렇지만 해만 지면 어디 갈 만한 곳도, 할 만한 일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실종된 ‘나이트 라이프’를 채운 건 주로 책과 TV였다.
이 곳 TV 프로그램들 중 필자의 흥미를 끈 것들은 주로 리얼리티 쇼들이다. 국내에도 몇년전부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지만 미국 TV는 한마디로 리얼리티 쇼의 백화점이라 할 만하다. 흥미로운 건 직업적으로 보면 이른바 ‘블루 칼라’들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이 대종을 이룬다는 것이다. 어부, 벌목꾼, 트럭운전사, 금광 채굴업자, 고물상, 난파선 견인업자, 주차 관리원 등 국내에서라면 ‘3D 중의 3D’로 취급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들이 디스커버리, 내셔널지오그래픽, 히스토리, A&E 등의 채널을 거의 매시간 점령하고 있다. 의사, 법조인, 재벌 2세가 넘쳐나는 한국의 드라마와는 영 딴판이다.
이런 게 뭐가 재미있을까 싶지만 한번 보면 눈길을 떼기 쉽지 않다. ‘블루칼라 리얼리티 쇼’의 등장 인물들은 거친 자연, 치열한 경쟁 속에서 때로는 생존을 위해 때로운 돈을 위해 온 몸을 던진다. 그 속에서 갈등과 사랑이 싹트고, 질투와 배신이 얽히고 섥히며 한 편의 드라마를 연출해간다. 한마디로 ‘남자들의 로망스’인 셈이다.
이런 쇼의 원조로 불릴 만한 사람이 있다. 베링해의 대게잡이 어부들이 등장한 ‘Deadliest Catch’를 연출한 톰 비어스다.
Thom Beers
30대 초반까지 이름없는 극작가 생활을 하던 그는 이 독특한 리얼리티 쇼가 말그대로 ‘대박’을 기록하면서 승승장구를 거듭해왔다. 현재 그는 아메리칸 아이돌’을 제작하는 세계 최대 리얼리티 TV 프로덕션인 프레멘들미디어의 북미지역 대표이면서 8개 채널에서 방영되는 13개 리얼리티 쇼를 관할하고 있다. 어부에서 트럭 운전수, 벌목꾼 등 그가 연출한 리얼리티 쇼의 등장인물들은 다양하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몇가지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분초를 다투는 치열한 경쟁, 그리고 항상 도사리고 있는 외부의 위험이다.
그렇다고 거창한 테마나 사회의식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각 에피소드의 이야기 구조는 누구나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신파극 그 자체다. 재미는 있다. 하지만 한창 보다 보면 ‘리얼리티’ 측면에서 의문이 생긴다. 인기 프로그램들은 시즌1, 시즌2 식으로 장기 방영되는데 회를 거듭하며 등장인물들은 유명세를 타게 된다. 더이상 평범한 블루칼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시즌1에서 낡은 픽업 트럭을 타던 이들이 시즌 2에선 벤츠나 아우디 등 독일 수입차를 몰고 나타나곤 한다. 물론 그 자체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과정으로 흥미를 배가시키는 요소라고 한다면, 뭐 할말은 없지만.
그런데 왜 이런 류의 프로그램들을 한국에선 보기 힘들까. 만약 서해안 꽃게 잡이 어부가 등장하는 리얼리티 쇼를 만든다면 과연 미국에서처럼 성공할 수 있을까? 기자의 판단은 ‘노’ 다. 미국만의 독특한 문화적 현상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곧 미국화라고는 하지만 유독 미국인들만 열광하는 것들이 몇가지 있다. 대표적인 게 풋볼과 픽업트럭이다. 블루칼라 TV도 마찬가지다. 공통분모는 이른바 ‘프론티어리즘’. 미국인들의 DNA 속에는 여전히 그 인자가 남아있는 것이다. 리얼리티 쇼의 주무대가 ‘마지막 프론티어’로 불리는 알래스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프론티어리즘은 이미 막을 내린 듯 하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외교 이슈가 철저히 소외당하는 데서 보이듯 요즘 미국인들은 안으로 안으로만 천착하고 있다. 블루칼라 TV는 이런 현실에서 일종의 대리만족용 기능을 하는 듯 싶다. 박제화된 프론티어리즘이라고나 할까. 휴일 아침에 자신의 헤비 듀티 픽업 트럭에 흠이나 생길까 열심히 닦고 광을 내고 있는 이웃집 회계사 양반의 모습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