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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 피싱으로 영어를 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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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도 영어지만 전화로 하는 영어에 울렁증이 있었다. 표정과 몸짓이 제거된 소통에 불안감 탓일 터다.
그래서 피했다. 더구나 ‘한국말이 늘어 간다’는 LA다. 무선 인터넷 설치(타임워너), 은행계좌 개설(우리
아메리카) 등 한국어 서비스가 있는 곳을 일부러 골랐다. 웬만한 문의는 메일이나 라이브채팅으로 가능
했던 환경도 더해졌다. 그러던 지난해 11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보이스 피싱이었다.
 
아이들 학교 픽업을 가기 30분 전, 스마트폰으로 구글 창에 검색을 하던 차, 이상한 팝업이 떴다.
‘당신의 아이폰에 해킹 시도가 있어 이를 막기 위해 잠금을 실시했습니다. 애플 지원팀 800-XXX-XXX
으로 연락 주십시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홈 버튼을 껐다 켜도 화면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장
쓰여진 번호로 연락을 했다. 인도 억양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요지인즉슨, 잠금을 제거하고 원상복구
시키는 데 100 달러가 든다는 것이었다. 픽업 가기 전 얼른 해결을 보고 싶은 생각에 앞뒤 가릴 틈이 없
었다. 수락을 하자 기술자라는 작자가 연결됐고, 그는 일단 내 PC와 아이폰을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그
리고는 무슨 사이트로 들어가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컴퓨터가 새로 부팅되는 것처럼 화면이 바뀌었다.
그와중에 기술자(라는 작자)는 ‘it is hacked’ 라는 문구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쯤 되자 나는 판단력
을 잃었다. 모든 걸 그의 지시에 따랐다.


어느새 내 pc를 원격조종시스템으로 관리하게 된 그는 해결사를 자처하며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집주소는 기본이고, 전화번호, 자주 가는 사이트, 파일을 주로 저장하는 폴더 등이 포함됐다. 나는 혹여
이 질문들을 놓칠세라 온 신경을 곤두세워 답했다. 그러기를 40여 분. 그는 모든 게 해결됐다며 수리비
결제 창을 눈앞에 내 놨고, 나는 여기에 내 카드번호와 보안번호까지 입력했다. 이 순간 찰나의 의심이
들어 ‘정보가 누출될 거 같다’고 하니 그는 ‘모든 게 코드화 돼 있어서 자기는 절대 볼 수 없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결제가 끝나자 그는 궁금한 게 있으면 여기 번호로 전화하라며 바탕화면에 파일 하나
를 남겼고, 이틀 뒤 고객센터에서 전화가 올 거라는 말도 했다. 그와 연결이 끊기고 나서 보니 정말 전
화기가 다시 멀쩡해졌다.       


빠르게 상황에 대처했다는 안도도 잠시, 막상 주변에 물어보니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차 싶은 생각에 처음 내가 전화를 걸었던 번호를 구글에 검색했다.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한 자가 올린
글을 발견했다. 런던에 사는 아무개는 49파운드를 지불했다고 한다. 순간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냉정을
되찾고 다시 찬찬히 들어가 보니 그때 나는 전화부터 할 게 아니었다. 1)설정에서 2)사파리에 들어가
3)팝업을 차단하고 4)방문 기록 및 웹 사이트 데이터 지우기만 해도 해결될 일이었다. 영화 ‘범죄의 재
구성’의 명대사가 이랬던가. ‘사기는 테크닉이 아니다. 사기는 심리전이다.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그 사람이 뭘 두려워하는지 알면 게임 끝이다.’


하지만 잃은 만큼 얻은 점도 있었다. 이것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신기하게도 그 뒤 나의 전화 영어
울렁증은 사라졌다. 그 사기 전화에 오래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던 경험 덕일까. 마침 그 즈음부터 전화
영어를 할 일도 부쩍 늘어났다. 가령 환불이 안 되는 저가 항공권을 취소하며 그 가격을 크레디트로 바
꿔달라는 요청을 한다거나,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어 긴급조치 서비스를 부르는 식이었다. 또 한번은
주문한 택배가 분실되면서 담당사와 발송 회사, 아파트 사무실 등에 수 차례 문의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모든 상황이 정말 어쩔 수 없고, 오가는 내용을 확실히 전달하고 받아야 했다. 어쨌거나 피할 수 없으니
‘에잇 모르겠다’라며 일단 다이얼을 돌렸다. 미리 머리 속에 문장을 만드는 부담감을 떨치니 마음이
편해졌고, 중요한 사안을 재확인 할 땐 상대의 말을 다시 반복하는 방법을 썼다.


영 상대의 말 속도가 빠르다 싶을 땐 애초부터 ‘저는 원어민이 아니니 천천히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면
됐다. 여전히 ‘sorry’’와 ‘pardon’이 필요하지만 적어도 예전만큼 주눅들진 않았다. 문의, 예약, 불만
접수 등 상황에 따라 전화 영어에서 쓰는 상용구를 익히니 대화는 한결 편해졌다. 명대사는 이렇게 또
한 번 통하는 것일까. ‘영어는 테크닉이 아니다. 영어는 심리전이다.’


# 전화 영어를 통해 알게 된 사소한 팁


– 여행사를 통해 저가 항공권을 구입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항공사 홈페이지에서도 비슷한 가격을 제시
  할 때가 많고, 환불 불가 티켓을 취소할 때나 연결된 좌석이 없을 때 항공사의 응대가 훨씬 유연하다.
  일례로 환불 대신 받은 크레디트의 범용 범위가 여행사와 항공사가 달랐다.


– 부당한 거래가 이뤄졌다면 은행이나 카드사에 전화하라. 가령 물건을 구입하고 배달이 안 됐을 때 판
  매사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일도 있다(소비자가 경찰에 직접 신고해야 조사가 들어간다는 식).
  이럴 때 구매에 사용한 카드사(데빗 카드라면 은행)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지급 중지를 요청하면
  된다. 돈은 즉시 환급되고, 이후 문제는 카드사와 판매사의 문제로 넘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