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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은 지금 3(중원지방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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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9일부터 12일까지 중국의 중원(中原)인 하남성(河南省)을 다녀왔다. 낙양(洛陽)과 개봉(開封) 등 대표적인 역사도시를 둘러보았다.

여행 첫날(11월10일. 9일 밤은 열차에서 잤다), 낙양을 찾았다. 중국 역사상 9개 나라(동주, 동한, 조위, 서진, 북위, 수, 무주, 후량, 후당)가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하남성 성도(省都)인 정주(鄭州)에서 서쪽에 있는 낙양은 자동차로 2시간거리였다.

낙양은 ‘낙양의 봄’이라는 신문 연재 소설(작자는 유현종)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봄철 모란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가 가장 아름답다(낙양은 해마다 4월15일부터 25일까지 모란절 행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가을에 찾아간 낙양도 괜찮았다. 중국에서 단 한 명뿐인 여자 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낙양의 분위기를 특히 좋아해 주(周)나라를 세운 뒤 도읍을 장안(長安, 오늘날의 서안)에서 이 곳으로 옮겨왔다.

먼저 낙양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인 용문(龍門)석굴을 찾았다. 이 곳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낙양 도심에서 서쪽으로 12㎞ 떨어진 용문산(龍門山) 기슭에 자리잡은 이 곳은 2100여개 석굴에 10만개가 넘는 불상을 모셨다. 길이만도 1㎞가 넘었다. 이 곳의 초기 작품(서기 5세기 무렵)은 북위(北魏) 때,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운강(雲崗) 석굴을 만들었던 장인들이 와서 만들었다. 이어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때까지 7대 왕조, 400여년에 걸쳐 석굴이 계속 만들어졌다. 34년 동안 만든 운강석굴(석굴 53개, 불상 5만1천여개) 보다는 석굴의 규모가 크고 석상의 예술 수준도 앞섰다.

용문석굴이라면 흔히 떠오르는 불상이 바로 이 곳의 대표적인 작품인 봉선사(奉先寺) 대존불(大尊佛)이다. 불상의 높이가 17.3m로 머리 크기만 3m에 이른다. 온화한 미소가 특징인 이 석불의 얼굴은 불교에 심취했던 측천무후의 실제 모습을 본 따 만들었다고 한다. 용문석굴 앞은 황하의 지류인 이하(伊河)가 굽이굽이 흐르고 있어 운치를 한층 더해주었다.

용문석굴의 화려함 뒤에는 아픔도 함께 있었다. 상당수 유적들이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종교의 찌꺼기’라면서 불상을 마구 부수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청나라 말기 중국 대륙에 들어온 서구 열강들이 앞다퉈 불상을 통째로 뜯어간 흔적도 남아 있었다. 이들 불상은 현재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낙양은 경제 사정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용문석굴에서 받았던 인상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용문석굴 주차장은 석굴 입구에서 1㎞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차를 타고 석굴 주차장에 도착한 뒤 석굴에 가려면 골프장에서 타고 다니는 카트를 이용해야 했다. 요금은 1인당 2위안(우리 돈 320원). 왕복하면 4위안(우리 돈 640원)이다. 용문석굴 입장료도 60위안(우리 돈 9600원)이나 했다(북경 자금성의 입장료가 45위안이다). 물론 골프장 카트 수십 대를 운영하는 만큼 고용 효과와 경제적 효과는 어느 정도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한 푼이라도 벌어보겠다는 역사 도시의 안간힘이 왠지 안쓰럽게 여겨졌다.

낙양은 중국 공산당 정권이 세워진 뒤 지도자들이 오지 않은 곳으로 유명하다고 현지 가이드가 설명했다. 모택동(毛澤東)은 생전에 그렇게 많은 도시를 찾아갔지만 낙양은 찾지 않았다. 이유는 한가지. 낙양의 ‘낙(洛)’ 글자가 ‘떨어지다’는 뜻을 가진 ‘낙(落)’ 글자와 중국어 음이 같기 때문이다. 태양으로 흔히 상징되는 모택동이 태양이 떨어지는 곳에는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 지도부 서열 2위인 이붕 (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도 황하 유역에 건설중인 대규모 댐 건설 공사장에 왔다가 현지 관리들이 낙양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거절하고 정주로 갔다고 한다. 유물론을 믿는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중국인을 지배하고 있는 미신 사상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이튿날(11월11일)은 개봉을 찾았다. 7개 나라(전국 시대의 위, 후량, 후진, 후한, 후주, 북송, 금)가 도읍으로 삼았던, 낙양에 버금가는 역사 도시다. 정주의 동쪽에 있는 개봉은 자동차로 1시간 20분 걸렸다. 정주에서 개봉에 이르는 길은 늦가을이지만 길 양쪽에 플라타너스가 있고 보리밭에는 푸릇푸릇 새싹이 올라와 마치 우리나라 농촌에 온 것 같이 푸근한 기분이 들었다.

개봉에 도착해서는 송나라 당시 명 판관으로 유명했던 포청천(包靑天, 원래 이름은 포증(包拯). 백성들이 그를 청렴한 관리라는 뜻의 ‘청천’을 붙여 포청천, 또는 포공(包公)이라고 높여 불렀다)을 기념하는 사당인 ‘포공사(包公祀)’를 가장 먼저 찾았다. 여기서는 개봉의 현지 가이드가 우리들의 안내를 맡았다. 경제 사정이 어렵다고 정주에서 따라간 가이드가 미리 설명했기 때문인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개봉의 여성 현지 가이드는 또박또박 표준말 해설을 들려주었지만 왠지 온 몸에 힘이 없어 보였다.

사당에는 큰 잘못을 저지른 당시 인종(仁宗) 황제의 사위를 포청천이 용 모양으로 만든 작두(당시는 죄인을 처형할 경우 신분에 따라 작두의 모양이 달랐다. 황족은 용 작두로, 관리들은 호랑이 작두, 백성은 개 작두로 각각 처형했다)로 처형시키려고 하는 긴박한 장면을 묘사한 실제 크기에 가까운 모형이 있었다. 기념관에 걸려 있는 포청천의 가훈이 인상적이다. ‘관리로 나가 백성의 돈을 챙긴 후손은 본가에 발도 들여다 놓지 말 것이며 선산에 묻지도 말라’ 서슬이 퍼런 포청천이 각종 스캔들로 더렵혀진 우리나라 일부 고위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에게도 ‘정신 차리라’며 호통을 치는 것 같았다.

보트가 한 두 척 한가롭게 떠 있는 포공호(包公湖)가 바라보이는 사당 건물이 왠지 깨끗하다 싶었더니 1986년, 새로 지은 건물이다. 호수가 있는 곳이 바로 송나라 당시 인구 1백만명으로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개봉의 도심이다. 명(明)나라 말기, 이자성(李自成)이 이끌던 농민 혁명군이 개봉 도성을 포위하고 3개월 이상 물러나지 않자 개봉 일대를 통치하던 주왕(周王, 당시 명나라 황제 숭정 황제의 숙부)은 한밤중에 황하를 막았던 둑을 일부러 터뜨리게 했다. 농민군도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당시 37만 명의 주민 가운데 34만 명이 잠자다가 몰살당했다.

역사상 40여 차례에 걸친 황하 범람으로 개봉은 역사 유적을 비롯해 도시 전체가 대부분 새 모습이다. 당연히 역사 도시의 그윽한 향취는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중국 경제의 실상을 엿볼 수는 있었다. 개봉은 농업 이외는 이렇다 할만한 산업이 없어 실업자가 많기로 손꼽히는 도시라고 정주에서 따라간 가이드가 설명했다. 골목이나 관광 명소마다 실업자들이 가장 하기 쉽다는 포장마차나 구멍가게 형태의 간이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개봉의 특산물은 수박으로 1근(500g)에 1자오(角, 우리 돈 16원)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런지 관광 수입을 올리기에 총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역사적 가치는 그다지 없는 포공사도 입장료가 20위안(우리 돈 3200원)이었다.

‘황하의 남쪽에 있다’는 뜻을 가진 하남성은 큰 평원에다 황하가 지나고 있는 ‘농업 대성(農業大省)’이다. 흙먼지가 풀풀 이는 산서성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중원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곳은 싸움에서 이기면 바로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오랜 전란과 황하 범람이라는 자연과의 싸움으로 민생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지난날의 영화는 하룻밤 이슬처럼 사라지고 각박한 현실만이 현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