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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통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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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이 황당하다 >

YTN 김태현 기자 북경 2신 (2000.9.17)



중국은 1978년 말 11기 3중전회(중국공산당 중앙위 11기 3차 전체회의)를 계기로 개혁개방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는데 이중 중국공산당의 사활이 걸린 가장 중요한 과제를 꼽는다면 국유기업 개혁을 들 수 있습니다. 약 7만 9천여개에 이르는 국유기업가운데 거의 절반 정도가 적자를 내고 있지만 1억 명이 넘는 직원들의 생계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실업 대란을 부를 수 있는 강도 높은 경영 합리화를 제대로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주룽지(朱鎔基) 중국총리가 지난 98년 “앞으로 3년 안에 국유기업 개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대규모 실업과 사회보장 문제를 해결하면서 경영상태도 개선하려고 하니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하여튼 내년이 주룽지 총리가 천명한 시한이니 오래지 않아 결말의 일단을 관찰할 수 있겠습니다.



서두가 다소 거창해졌습니다만 중국에 도착해 자주 겪은 시행착오는 금융과 환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고객에게 고급 서비스를 경쟁적으로 제공해야할 은행이 너무 낙후해 있어서 몇 차례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이래서 국유기업 개혁이 절실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내의 서점에 있는 중국 여행 가이드북에는 엉터리로 돼있는 금융, 환전 정보도 많아서 몇 가지 경험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 8천 달러의 목돈을 환전했는데 환율이 좋고 안전한 여행자 수표(US 달러 표시)로 7천 달러를 바꾸고 나머지는 달러 현찰과 인민폐를 준비했습니다. 집을 구한 뒤 주인의 요구에 따라 (집 계약을 할 때 1-3개월 분의 저당금과 2-3개월 분의 집세를 한꺼번에 지불하는 것이 중국의 관행입니다. 1년 치를 한꺼번에 내기도 하는데 이 경우 집세를 깎을 수 있습니다.) 넉달 치의 집세를 치르기 위해 은행에 들르게 됐습니다. 가는 김에 여행자 수표도 환전하고 앞으로 한국에서 송금받을 계좌도 트기로 했습니다. 일단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여행자 수표는 사용하기 불편하니 중국에 가져오지 않는 것이 상식”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국내에서 사 읽은 중국 가이드북에는 이런 설명이 전혀 안나와 있습니다. “여행자 수표는 환율이 유리하고 도난, 분실 때도 번호만 기억해두면 안전하며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편리하게 바꿀 수 있다”는 등등의 여행자 수표에 관한 상식적인 설명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이렇게 돼있는 중국 가이드북은 일단 엉터리라고 보셔도 됩니다. 제가 겪어본 바로는 여행자 수표는 중국 어디에서나 대체로 사용이 불가능하며 달러 현찰로 환전해주는 은행이나 환전소(이같은 환전소는 대부분 불법으로 운영됩니다)를 찾아내는 것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주변의 얘기를 듣고 일단 환전이 다소 번거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외환은행 격인 중국은행(Bank of China) 가운데 규모가 큰 지점의 위치를 물어 찾아갔습니다. 외견이 훌륭한 중국은행 `지춘로’ 지점에 도착해 환전 창구에 문의하니 “이곳에서는 여행자 수표를 취급하지 않으니 좀 더 큰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이런 식의 헛탕은 벌써 이력이 붙었습니다. 그나마 창구 직원이 친철하게도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지점으로 가는 약도를 자세히 그려줘 다음 목적지를 쉽게 찾아갔습니다. 은행 내부시설도 좋고 창구도 매우 한산해 다소 마음이 놓였습니다. 환전 담당 창구를 찾아 행원과 영어로 용건을 얘기했습니다. (관공서를 제외하고 은행이든 학교든 첫 대화는 가능하면 알아듣건 말건 영어로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주변의 충고에 따른 것이었는데 실제로 상당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은행에서 일단 처음으로 놀란 것은 수수료. 여행자 수표를 달러 현찰로 바꾸는데 1000분의 7.5를 수수료로 떼었습니다. 1000달러 짜리 넉 장을 바꾸니 순식간에 30 달러가 사라졌습니다. 선진국 해외여행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당황 속에 재빨리 속셈으로 국내에서 환전할 때의 유리함을 따져보니 손해가 그리 큰 것 만은 아니었습니다. 보금자리를 벗어난 해외 생활이라는게 어차피 이리 저리 수업료와 잡부금을 떼이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그 다음. 돈보다 아까운 시간이 허비될 차례였습니다. 은행 계좌를 만들면서 조금 전에 바꾼 돈 가운데 1000 달러를 입금하기 위해 다른 창구로 옮겨 줄을 섰습니다. 앞 줄에 서있는 사람은 4명. 우리나라 같으면 5분, 여기는 중국이니까 두배로 10분쯤이면 처리가 되겠거니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중국적인 상황이 어김없이 벌어졌습니다. 한사람의 입.출금 건을 처리하는데 10분이 넘게 걸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만 특별히 용건이 많아서 늦고 다음 사람은 빨리 처리되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계좌에서 돈을 넣거나 찾아가는 절차를 마치기까지 뭐 그리도 확인하고 처리할 사항이 많은지 10분에서 길게는 15분이 걸렸습니다. 일순간 탐구심이 발동해 자세히 살펴보니 행원들이 업무를 게을리 하거나 미적거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액수와 비밀번호 등을 확인하고 도장 몇개 찍고 컴퓨터로 입출력하고 통장 들여다보는데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단조롭고 지루한 기다림 끝에 차례가 됐습니다. 빨리 용건을 해치운 뒤 다음에는 될수록 은행에 오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창구 직원들이 일을 하다말고 다른 쪽으로 가서 직원에게 말을 붙입니다. 저쪽 직원이 이쪽 창구로 와 컴퓨터를 들여다봅니다. 컴퓨터가 고장난 것입니다. “아뿔사,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머리에서 김이 나려고 하는데 그래도 뒷 처리는 빠른 편입니다. 행원 한 사람이 컴퓨터가 고장나 창구를 옮겨 일을 처리해야 한다며 줄을 선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눠줍니다. 저를 포함해 오래 줄을 선 사람들은 모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습니다. 번호표를 새로 받아 다른 창구에 서있는 사람들 뒤에 다시 줄을 섰습니다. 처음으로 은행 문을 들어선 시간이 오전 10시가 약간 지나서였는데 벌써 12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이 됐으니 행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나갈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생깁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이제 소리를 질러서라도 계좌 개설을 포기하고 은행 문을 박차고 나오려고 결심했습니다. 행원들은 그러나 일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부지런하고 고마운 사람들. 그러나 손을 바쁘게 놀리면 뭐합니까.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데… 결국 20분 쯤을 더 기다려 12시 20분에야 1000달러 가운데 30 달러의 수수료를 공제한 금액이 입금된 통장 하나를 들고 은행 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이 날의 소득이라면 차례를 기다리며 모처럼 100 페이지에 가까운 독서를 한 것과 중국에 있을 1년 동안 필요한 인내심을 다진 것이었습니다.



며칠 뒤 집 주변의 편의 시설을 두루 파악하다가 인근 호텔에서 중국은행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집에서 매우 먼 악몽의 지점(해정구 분항)보다 이용객도 훨씬 적고 고객의 문의에 친철하게 영어와 중국어로 대답하는 전용 안내원도 있고 해서 앞으로는 이곳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첫 거래는 출금 건. 이번에는 기다릴 필요도 없이 곧바로 창구로 안내받아 처리를 기다렸습니다. 외국인이 많이 이용하는 고급 호텔이라서 금융 서비스도 나름대로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 말입니까. 자신의 계좌에서 돈을 찾는데 수수료를 받을 줄이야. 학비로 낼 3천 달러를 찾았더니 9 달러를 수수료로 떼었습니다. “이건 너무 심하군. 계좌에서 돈 찾는데 1000분의 3의 수수료를 떼다니.” 중국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국유기업 개혁의 현주소를 발견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외국인들이 달러를 그냥 집안의 적당한 곳에 보관해 두고 돈이 필요하면 그때 그때 환전해서 쓴다고 합니다. (중국에서의 환전에 관해서는 94년 1월 이중 환율제가 폐지되기 전부터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있지만 현행 법률의 테두리를 상회하는 듯한 내용이 많아 일단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외국인 거주지의 보안은 괜찮은 편이고, 은행에서는 쥐꼬리 만한 이자를 주고(왕년에는 금리가 두자리수로 상당히 높았지만 중국 당국이 부진한 내수를 진작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자율 인하를 단행하고 이자 소득세까지 신설해 금리가 과거의 3-4분의 1 수준으로 내려갔습니다.) 돈을 찾으려면 줄을 한참 서고 수수료까지 줘야 하는데 은행을 이용할 필요가 없는 셈입니다. 돈이 많아서 걱정인 일부 부유층만 은행을 금고로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중국이라지만 자신의 계좌에서 돈을 찾으며 수수료를 내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습니다. 수수료를 떼이고 일단 기분이 나빠져 목소리 톤을 조금 높여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내 돈에는 외국에서 송금했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기 때문에 (통장을 보니 송금된 금액 왼쪽 편에 10 이라고 하는 종류별 코드 번호가 붙어 있었습니다.) 통장에서 출금할 때마다 수수료를 내야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송금받지 않고 중국에서 입금하는 돈은 달러든 인민폐든 출금 수수료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서야 고개가 약간 끄덕여졌습니다. 중국의 외환 관리야 원래 국제적으로 알아주는 수준 아니었겠습니까. 경직되고 엄격한 외환관리 덕분에 97-98년의 혹독한 아시아 금융위기도 순조롭게 돌파할 수 있었이죠. 그런데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료가 하나 있어서 다시 은행 안내원에게 물었습니다. “여행자 수표를 바꿔서 입금한 1000 달러는 이미 1000분의 7.5의 환전 수수료를 떼었는데도 역시 10 꼬리표가 붙어있는데 출금 수수료를 다시 냅니까?” 대답은 역시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환전 수수료와 출금 수수료를 왜 중복해서 받느냐는 질문에는 “만약 여행자 수표를 바꾼 뒤 돈을 손에 쥔 다음에 통장에 입금했다면 코드번호가 11로 달라져 출금 수수료를 내지 않지만 당신은 창구에서 환전한 뒤 곧바로 돈이 입금됐기 때문에 코드번호가 계속 10으로 기록돼 있어 출금 수수료를 내야 합니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이 부분 만큼은 두고 두고 이해되지 않아서 대답 만은 친절하게 잘하는 그 은행 안내원에게 몇 번을 거듭 물어본 끝에 돈에 꼬리표가 달린 것 등 중국의 외환관리 제도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환은행 중국 지점에도 전화로 문의해 봤으나 이 제도의 취지와 합리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데 의견을 함께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일부러 찾아가기에는 시간과 교통비, 정신의 낭비가 아깝지요.) 내 돈에 10 꼬리표를 붙여준 창구 직원에게 왜 그랬냐고 직접 물어볼 생각입니다.

하여튼 중국은행 창구에서의 몇가지 경험은 중국 국유기업 개혁의 절박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중국적 제도의 불가사의와 불가침성을 새삼 확인시켜준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