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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통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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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생활을 하게 되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 첫째 이유는 외국생활의 외로움과 불편함이 상대적으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배가시켜, 외국의 나쁜 점과 고국의 좋은 점이 더욱 크게 부각되어 보이기 때문이겠지요. 사람들은 흔히 낯선 것은 곧 나쁜 것, 익숙한 것은 좋은 것이라는 등식을 갖고 살아갑니다. 더구나 말도 잘 안 통하고,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굳게 의지할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포용하며 산다는 것은 성인군자가 아니면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간혹 동포를 만나게 되면 입에 다소 거품을 물고 이 나라 사람들은 뭐가 어떻고, 뭐가 문제고, 잔뜩 흉을 보기 마련인 게 인지상정입니다. 특히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이고, 외국인을 대하는 기본적인 매너나 태도가 학습되어 있지 않은 나라에 와서 사는 사람일수록 일상 생활 속에서 받는 설움이 크고 상처가 깊어, 쉽게 그 나라 사람들과 동화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서울의 한 대학에 객원교수로 와있는 북경대학의 젊은 모 교수가 중국 천진에서 발행되는 ‘今晩報’라는 신문에 한국인에 관한 한편의 글을 기고했습니다. ‘전설과 국민성’이란 제목의 이 글은, 중국의 보통 지식인들이 한국에 대해 가지는 편견과 몰이해를 전형적으로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재중국 한국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글을 요약하면, ” 한국인은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식언을 일삼는데, 이런 습관이 굳어진 데는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국의 전설을 살펴보니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위험한 논리가 들어있는 ‘토끼와 자라 이야기’가 있더라, 반면 중국의 전설은 신의를 생명과 같이 중시하는 내용이 대다수이다, 이 점은 경제 분야에서 세계 20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이 응당 배워야 할 점이다.” 라는 내용으로 다음은 문제의 글의 첫 부분을 번역한 것입니다.





” 전설과 국민성 (傳說與國民性)



한국사람들과 자주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골치아픈 일 중의 하나는, 그들이 신용을 지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약속에 늦는다든가, 약속을 아예 지키지 않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며, 자기가 금방 한말도 얼마 안가서 나몰라라 하는 식이다. 아침에 한말을 저녁이면 바꾸고, 마음이 수시로 변하여, 식언하는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마치 하루 세끼 밥먹고 잠자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특별한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며, 단지 일종의 습관일 것이다. 그들도 때로는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음에는 안그러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여전히 마찬가지여서, 정말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지경이다. 일본인들은 이를 과장하여 매일 거짓말하는 민족이라 일컫는다. 한국에 있는 한 중국단체가 처음 한국에 온 중국인들에게 가장 먼저 건네는 충고는 “한국인이 한 말을 진실이라고 믿지 말라”는 것이다. (중략)

하나의 습관이 보편적인 국민성으로 자리잡혔다는 것은 이 민족의 역사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한국의 전설에서 그 원인을 얼마간 엿볼 수 있다. ‘자라와 토끼 이야기’이다.” (이하 생략)





실제로 이 글은 북경대학의 전도유망한 한 젊은 교수가 썼다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논리의 취약함과 사고의 천박함이 두드러집니다. 그렇다고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에 사는 한 중국인이 단순히 생활습관 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불편함과 황당함을 토로한 것이라거나, 고국에 대한 향수가 과장된 조국애로 승화된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고 말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 글의 가장 큰 오류는 한 개인의 제한적인 경험을 말이 안되는 근거를 바탕으로 무리하게 일반화시켜 민족성 자체를 왜곡시켰다는 점일 것인데, 이는 이른바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의 고질적인 병폐이기도 하지만, 이 글에는 중국인의 한국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단면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만난 중국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예의바른 편이지만, 개인 대 개인의 차원을 벗어나 국가 대 국가, 또는 민족 대 민족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한국은 여전히 중국의 문화적 속국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중국은 오랜 기간 서방을 능가하는 동방의 문화적 중심지였으며 아직도 문화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가 중국의 문화적 시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단순히 민족적 감정을 내세워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중국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긍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며, 개인적으로는 이같은 자부심이 그리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과거 자신들이 ‘돌봐줘야 했던’ 주변의 작은 나라가 어느 날 갑자기 돈 좀 벌었다고 와서 거들먹거리고 자신들을 무시하려 한다면 이 얼마나 황당하고 기분 나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중국에 들어와 있는 많은 한국인들은 중국의 낙후한 모습에 자신감이 넘쳐서 중국을 후진국의 하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북경대학의 모 교수가 한국인을 ‘약속 안지키고 식언을 일삼는’ 민족이라고 생각했다면, 한국인들이 중국인에대해 갖는 생각은 ‘더럽고, 위생관념 없고, 느려터진’ 민족이라는 것이지요.

각 나라와 민족마다 고유한 문화가 있으며, 이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경제 못지 않게 그 나라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나라와 민족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애를 쓰기 마련이지요. 막강한 경제대국인 일본이 끊임없이 문화유물을 날조해서 고대사를 왜곡시키려 하는 것도 경제수준에 비해 빈약한 자신의 문화적 위상을 어떻게든 높여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중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경제적인 콤플렉스를 숨길 수 없듯이, 우리도 이 거대한 문화대국에 대해 어쩌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문화적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국이 경제적 콤플렉스를 문화적 자부심으로 위로받는다면, 우리는 거꾸로 경제적 우위로 위로를 삼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 점을 국가 대 국가의 냉혹한 경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우리가 영 불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화적 우위는 그 유구성으로 인해 좀처럼 역전되기 힘들지만, 경제적 우위는 어는 순간에 뒤바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리가 우위에 설 수 있는 길은 지금 그들이 가진 콤플렉스를 수용하고, 우리의 콤플렉스를 스스로의 저력으로 극복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더 이상 문화적 속국이 아니라고 보여주는 길은, 금전을 동원한 과시나 물량 공세 같은 것으로는 어려운 일이지요. 경제력의 이면에는 진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과연 그런지 뒤돌아볼 일입니다.



‘今晩報’에 북경대 모 교수의 글이 나가고 며칠 뒤 천진 지역의 한국 신문인 ‘중국경제’는 편집국장 명의로 반론문을 실었습니다. 반론문은 상당히 정확하고 타당성 있게 문제가 된 글의 논리적 허점을 지적하고 그의 잘못된 생각에 대해 따끔하게 경고했습니다. 모 교수가 이 글을 봤다면 아마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쯤 지난 뒤 같은 신문에서 읽게 된 천진의 한 유학생 대표의 다른 반박문은 거의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한 수준 이하의 것이었습니다. 모 교수의 글을 보고 치밀어 오른 한국인으로서의 분노가 한국인에 대한 실망과 자괴로 바뀌며 양국의 앞 날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었습니다…(끝)



추가 사항:

지난 12월 22일 진완빠오(今晩報)에는 이례적으로 사과문이 실렸습니다. 짤막한 사과문의 대강은 “콩칭뚱(孔慶東) 교수의 기고문은 자신의 생각을 적은 것으로 신문의 논지와 무관하며 이 글로 인해 한국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내용입니다. 제가 연수기를 쓸 때에는 중국 천진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중국경제’와 서울대 중문학과 홈페이지 등 일각에서만 제한적으로 이 문제가 거론된 점을 고려해 실명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 사건이 비교적 여러 곳에서 다뤄지며 공론화됐고 해당 신문에 사과문까지 실리게 됨에 따라 실명을 밝힙니다. 콩칭뚱은 북경대 중문학과 소속이며 현재는 이화여대 교환교수로 한국에 체류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