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달 전쯤에 공립학교 8학년(한국에서 중학교 3학년)인 딸 아이가 “6개월쯤 더 있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미국 공립학교는 선생님이 학생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데다 수업 수준은 한국에 비해 쉽고 경쟁도 그다지 심하지 않다. 딸 아이의 학교는 학군이 그런대로 괜찮다 보니 체육관과 잔디밭 운동장 등 기본 인프라도 갖춰져 있고 음악, 미술 등도 즐길 수 있다. 딸 아이 입장에서는 미국 학교 생활이 한국보다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반면 한국의 중학교는 “고등학교보다 교실이 더 무너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학생들은 공격적인 습성이 몸에 배어있고, 선생님들은 학생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잃은 상태라고 한다. 게다가 학원이다, 선행학습이다 공부에 다시 치일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을 법도 했다.
하지만 고심 끝에 1년 연수 기간만 끝나면 한국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미국 대학을 갈 것도 아닌데 어차피 한국 학교 생활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딸 아이가 “미국 학교는 느슨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판단도 했다.
미국에 단기 연수를 온 연수자들은 기본적으로 “아이가 영어 하나만 제대로 배워가도 남는 장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이가 성적표가 좋지 않더라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렇듯 느긋한 마음을 갖다 보니 부모들도 미국 학교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높다.
하지만 이곳 교민들처럼 막상 아이를 미국 대학에 보내려고 할 경우 또 다른 냉혹한 현실을 만난다.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의 공립학교는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기본 소양을 키우는 게 일차적인 목표다. 조금 과장해 얘기하면 미국의 공립학교는 대학갈 아이들은 따로 정해져 있다고 보는 듯하다. 나머지 학생은 고등학교 졸업한 뒤 운전면허 따고 맥도날드에서 서빙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비춰진다.
미국에서 중상류층의 부모들은 자녀를 대부분 사립학교에 보낸다. 상류층의 경우 학비가 3만~10만달러 이르는 기숙 학교(boarding schools)에 넣는다. 이들 학교는 승마장, 골프장까지 갖춘 곳이 많다. 이 같은 능력이 되지 않는 중산층은 내가 사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채플힐의 경우 학비만 대략 1만2,000달러 정도인 사립학교에 보낸다. 여기다 식비, 교재비, 특별 활동비, 서머 스쿨(summer school) 등을 포함하면 1년에 2만 달러는 족히 든다. 물론 백인 부유층이 몰려 있는 지역은 굳이 사립학교에 넣지 않기도 한다. 지자체의 재정이 튼튼해 시설도 좋고 우수 교사도 많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들 사립학교들은 교육 내용이 입학 단계부터 대학 준비를 위한 과정으로 짜여있다. 좋은 교육 환경을 갖추고 공부도 학생들의 혼을 빼 놓을 정도로 많이 시킨다. 둘째 애가 다니는 프리스쿨(pre-school, 한국의 유치원) 선생님이 고등학교 때 가정 형편이 나빠져 사립을 다니다가 공립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가장 놀란 점이 “학생들이 너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들 사립학교의 백인 비율은 평균 77% 정도이다. 나머지는 교육열이 높고 소득 수준이 높은 한국, 중국, 인도 등 아시아계와 소수의 흑인들이 채우고 있다. 반면 딸 아이가 다니는 공립 학교는 좋은 학군으로 분류되는데도 백인 비율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
특히 미국 대학은 고교 등급제를 운영하고 있다. 입학 사정관들이 평가가 낮은 공립학교의 상위 5%에 드는 학생보다 평가가 좋은 사립학교의 상위 20%에 드는 학생에게 더 좋은 점수를 주는 경우가 흔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립학교의 명문대 진학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대학 진학 과정이나 졸업 이후에도 사립학교 동문들의 도움을 음으로, 양으로 받는다. 이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교육 제도가 인종 차별이나 빈부 격차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여기에 공립학교지만 마그넷 스쿨(magnet school)이란 게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일종의 특수목적고다. 과학, 예술 등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을 일찍부터 뽑아 특정 분야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영재 학교다. 이들 마그넷 스쿨은 여러 조사 기관의 ‘미국 100대 우수학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대학에 갈 학생과 가지 않을 학생’으로 구분하는 미국의 교육 시스템은 공립학교에도 강고히 자리잡고 있다. 딸 아이 학교의 경우 4학년 때부터 정규반(regular class)과 우수반(honor class)으로 구분돼 졸업 때까지 유지된다. 정규반에서 우수반으로 옮기고 싶으면 높은 학업 성취도를 증명하거나 우수반에 결원이 생기는 등 소수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우수반의 경우 같은 학년의 정규반보다 공부량도 많고 수업 내용도 어렵다.
또 고등학교에서는 AP(advanced placement)를 운영해 부근 대학 등에서 심화 과정을 듣도록 한다. 같은 과목이라는 AP 과정을 들으면 학점을 더 많이 인정받고 대학 입학 때도 가산점을 부여 받는다.
반면 고만고만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일반 정규반은 공부 잘하는 학생을 따라 배울 수 있는 롤(Role) 모델도 없다 보니 질적 도약의 기회가 차단되기 마련이다. 아울러 일반 정규반은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우수반이나 AP 과정은 백인과 아시아계 비율이 높다. 이 때문에 미국 공립학교의 능력별 수업 시스템 역시 간접적인 인종 장벽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백인 학부모들은 학군이나 능력별 수업을 없애려는 일부의 움직임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이를 테면 미국 교육은 부모의 빈부 격차가 자녀 교육의 질을 결정짓거나 개인적으로 뛰어난 소수의 학생에게만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학생의 한계가 어릴 때부터 결정되다 보니 과도한 경쟁이나 입시 과열도 없다. 반면 한국 교육은 평등 교육의 이념 아래 모든 학생에게 똑 같은 과목과 수업 내용을 강요한다. 비효율적이고 자원 낭비도 많지만 적어도 불완전하나마 기회의 평등이라는 원칙은 남아있다.
교육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어느 교육 시스템이 옳은지 평가하기 어렵다. 다만 확실한 점은 연수자 입장에서는 자녀가 흔히 다니는 공립학교만 보고 “미국 학교는 느슨하다”라는 식의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백인 중산층의 경우 교육열이 한국 부모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고 대학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도 한국 학생들만큼 열심히 공부한다. 미국 교육 시스템의 내면을 보지 않고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자유분방함, 쉬운 커리큘럼이나 느슨한 경쟁 등의 겉모습만 보고 자녀의 진로를 결정했다가는 후회한다는 게 주위 사람들의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