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휴전 촉구한 팔레스타인계와 유대계
2023년 11월 4일 토요일 정오였다. 워싱턴 D.C.의 프리덤 플라자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불과 3시간 전만 해도 한산했는데 금세 광장과 인근 도로는 보행이 어려울 만큼 붐볐다. 집회 측이 추산한 참가자는 30만 명, 눈대중으로도 십수만 명은 족히 돼 보였다.
팔레스타인 국기를 손에 들거나 두 어깨에 감은 사람이 많았다. 위에서부터 검은색과 흰색, 녹색까지 3색 선에 빨간 삼각형이 왼쪽에 그려진 깃발이다. 일부는 아랍인들이 쓰는 스카프인 케피예(Keffiyeh, Kufiya)를 머리에 둘렀다. 팔레스타인 전통의 흰색 바탕에 검은 격자무늬나 흰색 바탕에 검은색, 녹색, 빨간색의 3색 격자무늬였다. 피부색은 미국인들이 말하는 기준으로 갈색(Brown) 계통, 팔레스타인계나 아랍계로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와 함께 애틀랜타에서 버스를 타고 D.C.까지 온 조지아주 학생들처럼 미국 내 유럽계, 아프리카계, 아시아계도 함께 했다. 그리고 유대계도 있었다. 자신들을 정통 랍비라고 부른 유대인들은 “항상 시오니즘과 이스라엘 국가, 그리고 이스라엘의 잔혹 행위에 반대했다”라는 피켓을 들고 집회에 참여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여대생으로 보이는 2명이 단상에 올랐다. 둘 다 키가 160cm가 안 될 정도로 보이는 미국인치고는 왜소한 체구였지만, 절규에 가까운 이들의 목소리는 폐부를 찌를 만큼 우렁차고 날카로웠다. 이들의 선창은 메아리가 돼 광장을 구호로 가득 메웠다.
“Free, Free, Gaza! Free, Free, Palestine!”
(가자를 해방하라!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라!)
“Lift the siege on Gaza now! Ceasefire now!”
(가자 포위를 거둬라! 즉각 휴전하라!)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멈추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고, 팔레스타인계부터 유대계까지 참여한 모든 이들은 한목소리로 휴전을 촉구했다. 비록 2024년에 접어든 지금까지 전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날은 팔레스타인계를 포함한 범 아랍계 미국인들에겐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범 아랍계 미국인들은 2001년 9·11 사태 이후 제국의 이등, 삼등 시민으로 숨죽이며 살아왔는데 20여 년 만에 제국의 수도에 결집해 존재감을 드러냈고, 팔레스타인계로서는 유대계를 비롯한 다양한 혈통의 미국 시민과 함께 제국의 수도에서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해방을 촉구한 날이었다.
“우리 세금으로 아이들을 죽이지 말라”
오후 4시 반을 넘어서자 군중은 백악관을 향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기 시작했다. 행렬은 백악관 동쪽의 14번가에서 북쪽을 향해 출발해 K스트리트에서 왼쪽으로 꺾었다. 그렇게 백악관 뒤편을 크게 돌아 백악관 서쪽에서 H스트리트로 진입했고, 철책과 라파예트 광장 너머로 백악관이 보이는 곳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Not a, not a nickle, not a, not a dime, no more money for Israel crime!” 백악관 앞에서 외쳐진 구호 가운데 하나다. 미국 시민이 낸 세금은 5센트(Nickel)도, 10센트(Dime)도, 단 한 푼도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를 위해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구호다. 여기서 전쟁 범죄는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에 따른 민간인, 특히 어린이 피해에 초점이 맞춰진다. 집회 당일까지 가자지구에서 어린이 3천6백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1월 중순까지 5천5백 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됐다.
이와 관련해 미국은 2016년 이스라엘과 체결한 양해각서에 근거해 2019년부터 2028년까지 해마다 38억 달러, 우리 돈 5조 원가량을 군사 원조하고 있다. 아울러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알아크사 작전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다.
참고로 2023년 미국 연방 예산은 6조 달러가 넘는다. 이 가운데 38억 달러는 0.6% 수준으로 미미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2023년 국방 예산이 236억 달러로 추산되는데, 미국의 군사 원조 금액 38억 달러는 전체 예산의 16%에 해당하는 상당한 규모다. 그리고 이 자금 가운데 상당액을 현재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는 하마스와의 전쟁에 사용하고 있다.
75년째 이어진 불의(不義) ‘나크바’
이들을 취재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2023년 10월 19일, 사진 수업 과제를 위해 교정에서 사진을 찍다가 한 무리의 집회를 보게 됐다. 장소는 조지아대학교 북측캠퍼스 안뜰, 저녁 6시부터 시작됐다. 팔레스타인, 특히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교전 중인 가자지구의 평화를 촉구하는 집회였다. 팔레스타인계를 비롯한 아랍계와 아프리카계가 주축이었고, 아시아계와 유럽계, 유대계도 함께했다. 그들은 어떤 얘기를 할까 궁금했다.
노령의 목사가 확성기를 잡았다. 파헤드 아부-아켈 박사였다. 1944년 4월 13일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카프르 야시프(Kafr Yasif)에서 태어났다. 예수가 태어난 나사렛(Nazareth)에서 북서쪽 25마일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부모님은 팔레스타인계 아랍인으로 정교회(Orthodox Church) 신자였다. 그가 네 살이던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됐고,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난 다음 날부터 그와 그의 가족의 수난도 시작됐다. 아랍어로 대재앙을 뜻하는 ‘나크바(Nakba, النكبة)’다.
그는 기억한다. 아버지에게 업혀 7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아크레(Acre)에 있던 집을 떠나 산속 난민촌으로 가던 날이다. 어머니는 집에 남기로 했다. 울면서 집을 나서는 남편과 자식들을 배웅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이 우리 땅이고, 집이고, 교회다.”
75년이 지나 그 어머니의 아들은 학생들에게 외쳤다.
“1948년 이래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불의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점령지역 주민이었고, 이스라엘 군정 책임자의 허가 없이는 마을을 떠나 15마일 거리의 하이파(Haifa)까지도 갈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국민이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아래 살았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핍박 속에 고통당한 팔레스타인 사람의 얘기를 처음으로 눈앞에서 들을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조지아대학교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테러로 하마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팔레스타인 사람에 대한 혐오가 높아지던 시기였다. 이어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으로 미국 사회 내 이스라엘 지지 세력과 팔레스타인 지지 세력의 갈등과 긴장도 높아졌던 시기였다. 이들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고 싶었다.
연대하는 마이너리티
집회는 매주 계속됐다. 조지아대학교 정문인 아치에서, 테이트 학생회관 광장에서, 총장 집무실 앞에서, 애덴스 시청 앞까지 이어졌다. 조지아대학교가 있는 애덴스 지역 주민들도 합류하기 시작했고, 미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라고 할 수 있는 그룹의 학생단체들이 규합하기 시작했다. 색으로 보면 브라운과 블랙, 레드의 결합이 눈에 띈다.
브라운은 팔레스타인계를 주축으로 한 아랍계와 인도계를 의미한다. 미국 남부인 조지아에 2차 대전을 전후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입되고 있는 이민자 2~4세대들이다. 이들의 거주지는 애틀랜타 북동쪽의 드루이드 힐즈와 노스 드루이드 힐즈부터 존스 크릭과 알파레타 사이에 주로 분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학창 시절 교우관계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끈끈하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바쁜 일과 중에도 시간을 쪼개 연대하는 배경엔 이들의 유대관계가 있다.
다음으로 미국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인권 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블랙 아메리칸이 있다. 특히 2013년부터 시작된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지역사회나 대학 내에서 이끌어온 학생들이 미국 내 팔레스타인 지지 세력으로 결합하고 있다. 그동안 블랙 아메리칸으로 겪었던 차별과 위협, 이에 대한 대응의 경험과 전략을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브라운 아메리칸들에게 전수하며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레드가 상징인 사회주의나 사민주의 계열 학생 그룹이 있다. 미국 내 많은 대학 사회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이 때문에 블랙 아메리칸과 함께 사회주의나 사민주의 학생 운동 그룹이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을 이끌거나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조지아대학교에서도 이들 그룹의 협력이 팔레스타인계나 아랍계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하마스에 동조하나?…“내 가족 24명이 죽었다”
물론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들의 집회나 행진을 불쾌하게 바라보던 학생이나 시민이 내게 다가와 자신은 찍지 말아 달라고 한 적도 있다. 하루는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는 백인 남성 여럿이 집회 현장 맞은편에 확성기를 설치하고 회개하라고 외치기도 했다. 심지어 한 여성은 애덴스 시청 앞 집회 현장에 난입해 집회 참여자들을 증거를 수집하듯 영상을 찍다가 경찰에 의해 밀려나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에게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알아크사 작전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조지아대학교에서 ‘팔레스타인의 정의를 위한 학생들’을 이끄는 사라가 답했다.
“미국인으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너는 하마스를 지지하니? 10월 7일 하마스의 테러를 지지하니? 나는 되묻고 싶어요. 당신들은 내 가족을 죽인 사람들을 지지하느냐고…”
사라는 미국 이민 2세대다. 할머니는 1938년 팔레스타인의 알 리드(Al-lid)에서 태어났다. 열 살이던 1948년 나크바가 일어나 마을은 이스라엘군에 의해 파괴됐고, 10살 소녀는 걸어서 요르단 국경을 넘었다. 그녀의 가족이 정착한 요르단 암만에서 사라의 어머니가 태어났고, 사라는 가족이 미국으로 건너 온 뒤 태어났다.
평범한 미국 대학생이었던 사라의 삶도 2023년 10월 7일 이후 바뀌었다. 하마스의 테러 이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으로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던 친척 24명이 숨졌다. 팔레스타인계라는 이유로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는 방문할 수 있어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는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만날 수 없었던 친척들이다.
이런 아픔은 사라만의 것이 아니었다. 상당수 팔레스타인 학생이 이민 2세대이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친척이 요르단강 서안이나 가자지구에 살고 있다. 미국행 티켓을 거머쥐었던 부모 덕분에 전쟁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은 지옥과 같은 모국에 남겨진 친척들에게 마음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이들에게 목표는 무엇인지 물었다. 답은 명료했다. 미국의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이스라엘에 원조하는 자금을 끊는 것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이스라엘에 지원하는 군사 원조 38억 달러 외에도 많은 지방정부가 이스라엘 정부나 군과 교류하며 미국 시민의 세금을 지원하고 있다. 일례로 조지아주는 애틀랜타에 캅시티라는 훈련 시설을 만들어 이스라엘 방위군과 합동 훈련하고 있다. 애덴스시도 이 훈련 시설 이용과 상호 방문 연수를 위해 매년 180만 달러를 쓰고 있다.
논리도 선명했다. 미국 내 유대계나 팔레스타인계를 포함한 아랍계가 똑같이 미국 시민인데, 함께 낸 세금을 한쪽의 조국이 다른 한쪽의 조국 사람들을 죽이는데 지원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급증하는 노숙자 문제, 부실한 급식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그 예산을 애덴스시를 비롯한 미국 시민들에게 쓰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전략도 명확했다. 이런 여론이 받아들여져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원조를 줄이게 되면 그 자체로 큰 전환이다. 이 때문에 여론 조성을 위해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과 인근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현실을 알리고, 교육하는 게 이들의 방향이다. 다만, 미국 사회 내 마이너리티의 연대와 결집을 통한 이 운동이 미국 주류 사회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 같다.
“기억은 프로파간다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가자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라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기억하는 한 학생의 얘기를 소개한다. 17년 전 여섯 살의 나이로 가자지구에서 탈출한 한나가 2023년 11월 15일 집회 때 한 발언이다.
“나를 포함해 여기 우리 가운데 가족의 피로 대가를 치른 학생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가족들을 기억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기억은 프로파간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내 이야기 중 일부를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가자지구에 살던 6살 때, 나는 우리 집 화장실 타일의 총알구멍을 셌습니다. 탄피로 목걸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폭탄이 하늘에서 비명을 지르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모두 같은 방에서 잤습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함께 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밤에 잠을 자다 깨곤 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밤중에 미국 시민으로 탈출했던 날도 기억합니다. 우리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는 내게 할머니가 작별 인사하며 울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내 앞에서 폭사한 소년의 얼굴도 기억합니다. 바지를 올리느라 두 손을 들 수 없었던 내 얼굴에 총을 겨눈 이스라엘 군인의 얼굴도 기억합니다.”
“이런 기억은 17년 전의 일입니다. 이것은 10월 7일에 시작된 게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나의 경험은 유일한 게 아닙니다. 만약 가자지구의 모든 아이가 자신이 겪은 공포에 관한 책을 쓴다면, 이 캠퍼스의 모든 도서관에 그것을 채울 공간이 부족할 겁니다.”
“나는 여기 서서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기억에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임에는 힘이 있습니다. 힘은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이 “힘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는 애덴스 시민들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180만 달러를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낸 애덴스 시민들을 위해, 여전히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목소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