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매로 삼은 사진, 과제
영어가 짧다. 별로 늘지도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곳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알고, 이해하고 싶다. 사진을 찍기로 했다. 이미지는 말의 벽을 넘어설 수 있으니까. 화학 반응에 촉매가 도움이 되듯 나는 미국, 미국인을 만나는데, 사진을 매개로 삼기로 했다.
무턱대고 카메라를 들이댈 순 없었다. 낯선 이의 얼굴을 찍는 건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치가 필요했다. 내게 적당한 구속과 압박이 되고, 상대에게도 적절한 이유가 될 수 있는 것, 학교에선 ‘과제’였다.
포토저널리즘 입문을 택했다. AP 사진기자 출신인 마크 E. 존슨이 가르치는 수업이다. 과제를 학생들과 똑같이 해내는 조건이다. 그게 목적이었으니 거부할 이유가 없다. 이제 카메라를 메고 교정을 누빌 시간이 됐다.
“36명의 머그샷을 찍어라”
첫 번째 과제는 처음 만난 36명의 얼굴을 찍는 과제였다. 광각과 표준, 망원렌즈로 북향의 창가와 그늘, 햇볕 아래에서 각각 4명씩 찍는 조건이다.
이 과제가 달성해야 할 기술적 목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사람의 정수리부터 어깨까지 같은 크기의 사진을 찍으려면 렌즈의 초점거리가 변화할 때 피사체와의 거리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초점거리의 변화에 따라 입체감과 압축 효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북향 창가의 확산광, 그늘의 반사광, 햇볕 아래 직사광의 차이를 이해하고, 이에 따라 피사체의 표정과 그림자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기술적 목표보다 더 어려운 저널리즘적 목표는 2가지다. 먼저, 정확한 캡션을 작성할 수 있도록, 피사체의 이름, 나이, 소속, 고향, 전공 또는 직업, 연락처, 웃옷의 색을 적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어렵고 많은 학생을 난처하게 한 건, 낯선 이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고, 이러한 정보를 36차례나 요구할 수 있는지다.
이 과정에서 고민했던 건 내 사진이 담을 사람들의 다양성이었다. 무심코 다가가 말을 걸고 사진을 찍다 보면 얼굴이 닮은 재미교포나 동양인을 찍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아직은 낯선 유럽계 백인은 물론 아프리카계, 의외로 많이 만났던 인도계 등 교내의 다채로운 민족성을 담기로 했다. 결과는 히스패닉을 포함한 유럽계 56명, 아프리카계 11명, 인도계와 아랍계 등 아시아계 11명이었다. 비율은 각각 72%, 14%, 14%다. 참고로 실제 조지아대학교에 재학 중인 유럽계 학생 비율은 히스패닉을 포함해 72.5%, 아시아계는 9.5%, 아프리카계는 8.2%다.
포토제닉 경제학도, 엘롬
사진을 찍다 보면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흙 속엔 항상 진주가 있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는 물음에 포즈부터 취한다면 이 친구는 포토제닉이다. 엘롬이 그랬다. 올해 스물둘, 전공은 경제학, 내년 봄학기를 끝으로 학부를 졸업한다. 가나의 수도 아크라 동쪽의 항구도시 테마에서 나고 자랐다. 어머니는 가나 전통 방식으로 염색한 옷을 만들고, 아버지는 그 옷을 애틀랜타 아프리카계 사회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10년을 고생해 아버지는 엘롬과 언니를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인 엘롬은 졸업과 함께 잠시 고향 가나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고, 그곳에서 여성을 위한 마이크로 크레딧 프로젝트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나의 요가 선생님, 루스
미쟝센을 활용해 인물과 인물의 개성, 상황을 살린 포트레이트는 많은 사진을 찍는 이에게 꿈이자 도전이다. 수업 시간에 본 사진 중에는 미군 전사자의 얼굴을 고향 집 외벽에 프로젝터로 쏘고, 창문에 유족이 서 있는 모습을 촬영한 게 기억에 남는다. 내게도 그런 포트레이트를 찍는 게 과제였다.
일단 포트레이트를 찍을 모델을 찾아야 했다. 그 모델의 조건은 조지아대학교 학생이나 애덴스 시민들에게 알려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일단 평범한 학생은 제외했다. 고민 끝에 이른 건 학교 체육관인 램지 센터에서 내가 듣고 있는 요가 수업의 선생님이었다. 이름은 루스, 2000년 8월부터 20년 넘게 이곳에서 조지아대학교 학생과 교직원들에게 요가를 가르치고 있다.
계획은 이랬다. 북향 창가의 확산광이 들어오는 거실, 빛과 그림자가 가부좌를 튼 루스의 얼굴 위를 지난다. 창틀이나 문틀, 벽엔 과거 수련할 때 찍은 사진이 붙여져 있다. 나는 이걸 루스의 전경이나 배경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계획은 머릿속에 있을 뿐, 과거 사진도 마땅한 장소도 없었다.
논의 끝에 선택한 곳은 루스가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애덴스 북쪽의 샌디 크릭 공원이었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인 2020년까지 루스가 애덴스 시민들에게 패들 보트 위에서 요가를 가르치던 곳이기도 했다. 구름 낀 흐린 날의 늦은 오후, 확산광이나 미쟝센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수십 년 수련해온 요가 선생님의 몸짓은 역동적이었다. 덕분에 아직은 많이 부족한 첫 포트레이트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식당 앞마당서 만난 ‘고수’와 ‘야수’
애덴스는 인구 13만 명의 작은 도시다. 그러나 조지아대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까닭에 대학이 키워낸 많은 음악도가 함께 공연 문화를 발전시켜 가는 이색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이 공간이 만들어낸 음악 축제가 ‘히스토릭 애덴스 포치페스트’다. 포치페스트(porchfest)란 집 현관이나 차고 앞에 모인 소규모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하는 걸 의미한다.
포트레이트 다음 과제는 이벤트 촬영, 음악제는 항상 좋은 소재가 된다. 축제는 2023년 10월 15일 토요일 정오부터 시작됐다. 카메라를 메고 읍내 같은 시내로 나갔다. 처음 찾은 무대는 풀라스키 하이츠 바베큐 식당의 앞마당이었다. 무대에 오른 팀은 ‘코리앤더’, 음악의 고수가 아니라 쌀국수에 넣어 먹는 그 ‘고수’였다. 멤버는 보컬과 리듬 기타에 앨리, 리드 기타에 코리, 베이스 기타에 헨리, 드럼에 기도다. 이 팀은 포치페스트에서 공연하는 게 꿈이었던 앨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축제를 앞두고 급조됐다.
음정은 불안했지만, 열정만큼은 남달랐던 ‘고수’의 무대가 끝나자 밴드는 ‘야수’가 됐다. 앨리가 객석에 앉고, 객석에서 가족과 함께 손뼉 치던 캐머런이 합류하자 팀은 헤비메탈 밴드 ‘비스트모드’로 돌아왔다. 관록 있는 메탈 밴드답게 연주는 힘이 있었고, 공연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도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미’ 대신 ‘김미’ 헨드릭스
‘고수’와 ‘야수’를 뒤로 하고 찾은 다음 무대는 헨드릭스 거리의 한 가정집 차고에서 열렸다. 밴드의 이름은 ‘지미(Jimi)’가 아닌 ‘김미(Gimme) 헨드릭스’였다. 1970년 27살에 요절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에 대한 헌정 밴드다. 멤버는 보컬과 리드 기타에 에릭, 드럼에 저스틴, 베이스 기타에 애덤이다. 이들의 목표는 밴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분위기나 음악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지미 헨드릭스를 닮고 싶은 에릭의 모습을 정원수를 전경으로 활용해 흐릿하게 담아봤다.
동료에게 선물한 프로필
함께 사진 수업을 듣다 보면 같은 장소에서 촬영하다 만나게 되는 친구가 생긴다. 잭슨이 그랬다. 내성적인 친구지만, 사진을 찍는 감각이 훌륭하다. 하루는 조지아대학교 정문인 아치에서 잭슨을 만났다. 잭슨은 조지아대학교 학생신문인 ‘레드앤블랙’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는데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에 나왔다. 비슷한 집회를 여러 번 찍다 보면 여유가 생긴다. 짬이 나면 틈틈이 현장에 나와 있는 다른 예비 언론인들을 찍기도 하는데 그날도 그랬다. 가로수 나뭇잎 사이를 지나는 석양의 빛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잭슨의 뒤에서 보케를 만들 때 셔터를 눌렀다.
졸업 사진도 도전
포토저널리즘 수업과 함께한 첫 학기는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사진을 찍으며 이곳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고 알게 된 건 소소한 재미였다. 그 끝을 장식한 건 졸업 사진이었다. 하루는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이 왔다.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을 취재하다 알게 된 야라였다. 졸업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느냐, 페이는 얼마냐고 물어왔다. 뭘 이런 걸 돈을 받느냐며 무료로 찍어주겠다고 했다. 알고 보니 조지아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거나 개인적으로 배운 학생들이 회당 150~200불 정도 받으며 졸업 사진을 찍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시장 교란 행위에 나서기로 했다.
첫 장소는 샌퍼드 스타디움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와서 다른 팀을 관찰해봤다. 대부분 표준이나 망원렌즈를 들고 와서 눈높이나 앙각에서 찍고 있었다. 이 경우 스타디움의 필드는 잘 보이지 않고 대부분 전광판이나 관중석을 배경으로 삼게 된다. 그래서 안전요원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접이식 의자에 올라가 광각렌즈로 피사체와 관중석, 필드를 함께 담아봤다.
다음 장소는 짓는데 10억 원 넘게 들었다는 밀리언 달러 계단, 도서관과 학생회관을 잇는 길목에 있다. 이미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시간에 도착해 구성이 쉽지 않았다. 과감히 계단을 포기하고 망원렌즈를 활용해 단풍으로 배경을 단순화하고 바스트샷으로 타이트하게 들어갔다.
마지막 장소는 조지아대학교의 상징인 정문 아치다. 이미 해는 떨어졌지만, 박명과 조명을 활용했다. 광각렌즈로 앙각에서 잡아 인물과 팔레스타인 지지 문구가 적힌 스카프, 아치, 건물, 양념 같은 조명까지 한 폭에 담았다. 이제 한 학기가 마무리됐다.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