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반기는 지상 낙원 ‘채널 아일랜즈’
LA에서 가장 가까운 국립공원은 ‘채널 아일랜즈’다. 다만, 샌터바버라해협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섬 무리다. 모두 다섯 개 섬으로 가장 큰 샌터크루즈(Santa Cruz), 두 번째로 큰 샌터로자(Santa Rosa),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애너카파(Anacapa), 가장 먼 샌미겔(San Miguel), 가장 작은 샌터바버라(Santa Barbara) 등 5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미국에서 동부인 조지아에 살다 보니 서부에서도 바다를 건너야 하는 이곳은 찾아갈 수 있는 국립공원 가운데 가장 먼 곳에 속한다. 서부인 LA까지 온 김에 벤츄라 항구에서 채널 아일랜즈로 가는 배에 올랐다.
벤츄라를 출발한 배가 처음 닿는 곳은 샌터크루즈 섬이다. 항구에서 1시간 반 거리다. 이 섬은 동서로 길게 뻗어있고, 남쪽 사면의 융기가 계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완만한 북쪽 사면에 접안 할 수 있는 선착장이 대부분 있다. 이 가운데 북동쪽의 스코피온 만(Scorpion Cove)과 북쪽 가운데에 있는 죄수의 항구(Prisoner’s harbor)가 대표적이다.
샌터크루즈섬을 걷다 보면, 강아지치곤 얼굴이 뾰족하고, 여우치곤 살집이 있는 동물을 만난다. 이 동네 누렁이인 섬여우(Island Fox)다. 과거 채널 아일랜즈에선 목장을 하던 사람들이 뿌려댄 살충제 때문에 흰머리수리(Bald Eagle) 개체수가 급감했다. 그 빈자리는 바다 건너 캘리포니아에서 날아온 검독수리(Golden Eagle)가 채우기 시작했다. 흰머리수리와 달리 검독수리는 섬여우를 사냥하기 시작했고, 섬여우는 멸종 위기까지 몰렸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검독수리를 수십 마리를 생포해 캘리포니아로 돌려보내고, 흰머리수리와 섬여우 복원에 정성을 쏟았다. 덕분에 이제는 섬여우의 개체수도 상당히 늘어 야영장 주위에선 자주, 탐방로 근처에선 가끔 만날 수 있게 됐다.
샌터크루즈섬에서 샌터로자섬까진 배로 1시간을 더 가야 한다. 길쭉하게 뻗은 샌터크루즈섬을 따라 샌터로자섬으로 가다 보면 융기와 침식이 함께 이뤄지고 있는 샌터크루즈섬의 남쪽 사면을 볼 수 있다.
샌터크루즈 섬과 샌터로자 섬 사이 바다는 혹등고래(humpback whale)와 회색고래(grey whale)가 출몰하는 곳이기도 하다. 2마리에서 3마리 정도 짝을 이룬 고래 떼는 상대적으로 얕은 이곳 바다를 헤엄치며 먹이를 사냥한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엔 이들 고래가 숨 쉴 때마다 피어나는 무지개를 볼 수 있다. 다만, 고래의 입 냄새는 상당하다.
우리가 몰랐던 역사 ‘앨커트래즈’
서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샌프란시스코를 택하겠다. 바로 금문교(Golden Gate Bridge) 때문이다. 다른 명소도 아름답지만, 금문교가 없는 지금의 샌프란시스코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름다움과 상징성 때문에 이 다리는 많은 영화에 등장했다.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Vertigo, 1958)부터 스타트렉과 엑스맨, 혹성탈출, 퍼시픽림 같은 SF물의 단골손님이 됐다. 그런데 금문교만큼 영화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샌프란시스코의 명소가 또 있다. 바로 영화 ‘The Rock’의 주 무대였던 앨커트래즈섬이다.
1996년 개봉한 영화 ‘The Rock’은 숀 코너리와 니콜라스 케이지, 에드 해리스가 출연했던 영화다. 줄거리는 에드 해리스가 이끄는 해병대가 앨커트래즈섬을 점거한 채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신경가스가 담긴 로켓을 쏘겠다고 위협하고, 숀 코너리와 니콜라스 케이지가 이끄는 특수부대와 FBI팀이 이를 막는 내용이다.
그런데 영화처럼 앨커트래즈섬이 점거된 적이 있다. 다만, 주체는 악당이 아니라 약자였다. 때는 1969년 11월 20일이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학생이자 모호크족 출신인 리처드 오크스(Richard Oakes)는 UC 버클리 학생이자 쇼숀-배넉족 출신인 라나다 민스(LaNada Means)와 함께 80여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데리고 이 섬에 상륙했다.
오크스 등의 요구는 앨커트래즈를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 센터이자 학교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원주민 문화를 부흥시키고 후손들에게 교육하겠다는 꿈도 밝혔다. 아울러 미국 정부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존중해 자치권을 줄 것도 요구했다. 이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물론 아프리카계, 아시아계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이 이어졌고, 한때는 4백여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과 지지자들이 앨커트래즈섬에 머물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심드렁했다. 대통령은 특별 고문을 파견해 협상을 이어 나갔지만, 정부는 전기와 물, 전화를 끊어 압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국 1971년 6월 11일 섬에 남아있던 활동가들이 퇴거하면서 점거는 19달 만에 끝났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실패한 게 아니었다.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1950년대 이래 지속해오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종결 정책(Termination Policy)을 폐기한다. 종결 정책은 보호구역으로 대표되는 원주민과 미국 연방 정부와의 특별 관계를 매듭짓고, 원주민을 미국 사회에 동화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원주민 부족의 주권을 제한하고, 연방 정부가 원주민에게 제공하던 지원을 철회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당연히 원주민 사회의 광범위한 반대에 직면하게 됐고, 앨커트래즈섬 점거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대신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자주-결정 정책(Self-Determination Policy)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원주민 부족의 자치권과 주권을 인정하고 강화하는 게 목표로 원주민 부족이 자신들의 교육, 보건, 법률 등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게 했다. 또한, 부족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과 전통을 보존하며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결국 오크스 등의 요구안이 일부나마 반영된 셈이었다.
사실 오크스는 점거 기간 앨커트래즈섬 안에서 의붓딸이 의문사했고, 자신도 1972년 9월, 서른의 젊은 나이에 살해당했다. 심지어 살인자는 정당방위를 주장했고, 배심원단이 무죄로 판단해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처럼 오크스 자신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그의 이름도 앨커트래즈섬에 새겨진 점거의 흔적과 함께 계속 기억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