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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350달러가 결제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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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여전히 시차 적응이 덜 되어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새벽 2~3시에 깨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3시, 휴대전화 알림 소리가 가뜩이나 얕았던 저의 잠을 깨웠습니다. 한 의류 브랜드에서 제 체크카드로 350달러가 결제되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며칠 전 온라인으로 주문하며 이미 결제를 마친 상태였기에 당황스러웠습니다. 혹시 금융 사기나 해킹이 아닌가 걱정됐지만, 새벽이라 마땅히 문의할 곳이 없었습니다. 비슷한 사례가 없는지 두 시간 가까이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를 뒤졌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

콜센터는 옛말, 이젠 ‘챗센터’가 대세

초조한 마음에 해당 브랜드의 홈페이지에 접속했습니다. 그런데 채팅을 통한 고객 상담 서비스가 24시간 제공되고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상담을 시도했지만, 상대는 상담원이 아닌 챗봇이었습니다. 번역기를 사용해가며 제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으나, 챗봇은 원하는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대로라면 날이 밝을 때까지 해결책을 찾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상담원과 연결됐다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오전 9시는 돼야 상담이 가능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른 새벽인 6시부터 상담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상담원과 채팅을 시작한 지 5분 만에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제가 사용한 체크카드는 결제 후 ‘보류(pending)’ 상태로 등록됐다가 며칠 후 확정되는 방식이었는데, 해당 브랜드의 시스템 오류로 인해 보류 상태였던 금액이 중복 결제된 것이었습니다. 상담원은 즉시 조치를 취했고, 일주일 내로 초과 결제된 금액이 취소될 것이라고 안내해 주었습니다. 전화 상담에 부담을 느끼던 저에게 채팅 상담은 신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If you don’t ask, you don’t get

아마존의 등장 이후 미국에서도 인터넷 쇼핑이 활성화되면서 택배 오배송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미국에서의 첫 겨울을 맞이할 즈음, 온라인으로 주문한 물건이 잘못된 주소로 배송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택배 기사가 배송이 완료됐다며 보내준 사진. 우리 집 현관문은 흰색이다.

채팅 상담이 익숙해진 저는 즉시 채팅 상담센터에 접속했습니다. 상담원은 배송 직원의 실수로 보인다며 환불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제품을 구매할 당시 무료 배송 이벤트가 진행 중이어서 배송비가 면제됐는데, 환불 후 다시 주문하면 7달러의 배송비를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를 상담원에게 설명하며 기존 주문을 다시 진행하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상담원은 내부 시스템상 불가능하다며 양해를 부탁했습니다. 미국 생활 초기였다면 상담원의 요구를 그냥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생활하며 ‘요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If you don’t ask, you don’t get)는 미국식 소비자 마인드를 익힌 저는 상담원에게 단순 환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상담원은 10달러 상당의 바우처를 제공할 테니 환불에 동의해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전화 상담이 아닌 채팅 상담이었기에 차분히 제 입장을 설명할 수 있었고, 이는 금전적 보상으로 이어졌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자 상담원은 10달러의 합의금을 제안했다. 전화로는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컴플레인도 채팅 상담을 이용하면 문제없다.

고임금과 4차 산업혁명이 불붙인 챗센터

미국 기업들이 고객 서비스에 채팅을 적극 도입하게 된 배경에는 콜센터의 해외 아웃소싱이라는 이벤트가 있습니다. 미국 내 인건비가 꾸준히 상승하면서 기업들이 자국 인력을 고용해 고객센터를 운영하는 부담이 커졌습니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이후 인건비가 저렴하고 영어가 가능한 인도나 필리핀 등으로 고객센터를 이전하는 기업이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상담원의 발음이나 억양이 다르고, 문화적 차이로 인해 원활한 상담이 어려운 경우가 있어 소비자들의 만족도가 떨어졌습니다. 전화 상담이 악성 고객으로 인한 상담원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기업들이 채팅 상담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사용이 어려운 일부 고령층을 제외한다면, 채팅 상담은 고객과 상담원 모두에게 장점이 많습니다. 영어 회화가 능숙하지 않은 고객도 본인의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상담원도 심리적 부담이 덜합니다. 또한, 상담 기록이 문서로 남아 추후 분쟁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도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요소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비대면 근무가 활성화되면서 챗봇과 채팅 상담 서비스는 더욱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이 발전하면서 단순한 문의는 챗봇이, 복잡한 상담은 상담원이 맡는 형태의 서비스가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례를 학습하면서 성장하는 AI의 특성을 감안할 때, 시간이 흐를수록 챗봇 상담은 더욱 정교해질 것입니다. 챗봇이 상담원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고객 응대를 위한 도구로 출발한 챗봇이 이제는 AI 기술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플랫폼이 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