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갱. 어수룩한 손님을 지칭하는 말. 유의어는 호구.
어감이 좋지 않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는 이 단어들이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로 따라붙은
건 공교롭게도 쇼핑의 천국, 미국에서다. 미국의 최대 쇼핑 시즌인 블랙프라이데이를 앞둔 지난해
11월 하순. 버지니아주의 한 아파트에 모여 사는 한인 엄마들 사이에선 “득템하세요”라는 인사가 오
갔다. 여기서 득템이란 평소 사고 싶었던 물건을 정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사는 것을 말할 터.
그때부터 고민은 시작됐다. 한국에서도 주말마다 대형마트에 가서 마감시간에 쫓기듯 진열대 맨 앞줄
에 놓인 물건들을 대충 쓸어 담으며 일주일 치 장을 보던 내가 아닌가. 더군다나 이곳은 미국. 득템을
할 만한 아무런 정보도, 취향도 없었다. 아쉬운 대로 귀동냥을 해보니 한국 사람들은 미국에서 그릇,
접시와 같은 주방용품과 신발, 가방, 옷 등을 많이 사간다고 했다. 같은 브랜드라 하더라도 한국보다
값이 월등히 싸고 종류도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하필 첫 쇼핑 품목으로 주방용품을 선택한 것이 스트레스의 발단이 됐다. 결혼할 때 혼수
로 반상기를 산 이후 제대로 된 그릇이나 접시를 사본 적이 없는 나는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백화점
‘메이시스’ 사이트에 들어가 정가보다 25% 정도 싼 가격에 나온, 비교적 저렴한 축에 속하는 접시세트
를 골랐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결제 버튼을 누르기 전,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오르더
니 주문 수량이 나도 모르게 10세트로 늘어났고, 최종 결제액은 400달러로 불어났다. 어차피 귀국용
선물을 사야 하는 만큼, 쌀 때 한꺼번에 사두자는 심산이었지만, 막상 접시가 담긴 대형 상자 3개가
집으로 배달되자 심란해졌다. 상자들을 위로 쌓으니 천장 밑까지 왔고, 무게까지 엄청나 한국에 가져
갈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그나마 싸게 샀다고 위안을 삼았던 접시의 가격이 시간이 갈수록 하향 곡선
을 그린 것이다. 처음에는 등락을 반복하는가 싶더니 연말 즈음에는 정가보다 75%까지 떨어지면서 나
의 최대 ‘스트레스 유발자’로 변해 있었다. 수시로 변하는 가격 때문에 날마다 사이트에 들어가서 접
시 가격을 확인하는 것이 일과가 될 정도였다.
그렇게 접시 가격이 연중 최저점을 찍은 날. 가만히 앉아서 100달러 이상을 손해를 보게 되자 나는
반품을 할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접시 고민을 전해 들은 이웃들은 당장 반품하라고 성화
였지만, 막상 무거운 상자 3개를 들고 백화점까지 가려니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렇게 쓰린 속
을 달래며 차일피일 반품을 미루던 중, 그동안 통 얼굴을 못 봤던 이웃집 아저씨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게 됐다. 내 소개를 하자 그분은 대뜸 “아! 물건 비싸게 주고 사신다는 그분이시군요?”라며 아는
체를 했다.
아니, 이게 웬 수식어란 말이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왔다. 몇몇 사람들에게 접시
상담을 한 것이 아무래도 ‘한국에서 온 호구’로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다음 날, 백화점 문이 열리
기가 무섭게 나는 남편과 아들 손에 박스를 하나씩을 들려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동양인들이
낑낑대며 박스를 들고 오는 모습을 지켜본 백화점 직원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 챘는지 군말 없이
환불을 해줬다. 환불에 걸린 시간은 5분. 그렇게 나는, 석 달 가까이 시달리던 접시 스트레스에서
5분 만에 해방될 수 있었다.
■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반품’
미국이 쇼핑의 천국이 될 수 있었던 게 바로 이 ‘관대한’ 반품제도의 힘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
이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영수증이나 물건을 구입한 신용카드 명세서가 있으면 반품, 환불, 교환을
쉽게 할 수 있다. 물론, 판매처마다 환불 정책은 다르겠지만 상당수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 등은 구
입후 90일 이내이면 전액 환불해 준다. 반품하러 왔다고 인상을 찡그리는 직원들도 없고, 고작 물건에
무슨 하자가 있는지 물어보는 게 전부다.
반품이 쉽다 보니 이를 적극 이용하는 ‘똑똑한’ 쇼핑객들도 많다. 특히 블랙프라이데이와 같은 대대
적인 할인 행사 기간에는 물건들이 금방 동나기 때문에 싸게 나온 상품들을 일단 주워담은 뒤 필요 없
는 물건은 차차 반품하는 방식은 고전에 속할 정도.
주변에서도 ‘반품 무용담’은 쏟아졌다. 인근에 사는 A씨는 한 달 전에 산 로봇 청소기가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나사를 삼켜 고장이 나자 새 것으로 바꿔왔고, B씨는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사서 가격표
를 떼지 않고 입은 뒤 하루 만에 교환하기도 했다. C씨는 코스트코에서 히터를 샀으나, 날씨가 더워
포장도 뜯지 않고 보관했다가 무려 1년 뒤 반품했다고도 한다. 한국에서라면 ‘블랙컨슈머’나 혜택만
쏙쏙 골라 먹는 ‘체리피커’라는 비난을 들을 법도 한데, 이런 식의 쇼핑 방식은 일상화 돼 있는 듯
보였다.
가격 조정 제도(Price match)라는 것도 있다. 물건을 산 뒤 가격이 더 내려갈 경우 떨어진 만큼의 돈
을 돌려받을 수 있는 제도다.(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은 접시세트를 환불한 뒤에야 알았다.) 접시 반품
을 계기로 자신감을 얻은 나는 ‘제 가격을 다 주고 산’ 물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환불하기 시작했다.
게 중에는 겨울코트도 있다. 강추위에 대비해 미국에 오자마자 장만했지만, 올 겨울 이상 기온으로
한번도 입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구입한지가 석 달이 넘어 돈으로는 돌려받지 못하고 그
브랜드의 상품권으로 받았다.
■ 반품의 ‘두 얼굴’
미국에서 반품 제도가 왜 이처럼 관대한지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곳에서
제법 오래 산 지인은 미국이 신용사회여서 소비자가 반품을 요구할 때는 그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암묵적으로 믿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또 해당 업체는 반품이 들어오더라도 물건을 판
직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관대한 반품 제도가 미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소비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반품이 자유롭기 때문에 소비자들도 지갑을 여는 데 큰 거리낌이 없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연말만 되면 산더미처럼 쌓이는 반품 물건들은 미국 유통업체들에 큰 골칫덩이다. 그
물건들을 처리하는데 또다시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미국유통협회는 지난 한해 반품된 물건 규모
를 2천605억 달러로 추정했다. 전체 거래금액의 8% 정도인데, 거래된 물건 10개 중 1개꼴로 반품이 이
뤄진 셈이다.
이렇게 반품된 물건들은 반품업체로 넘어가 온라인에서 헐값에 유통된다고 한다. 종종 대형 온라인
쇼핑몰에서 ‘Like New’라고 적힌 중고제품을 싼값에 건질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쇼핑 팁 “기다려라. 더 내려간다”
여러 백화점과 할인점, 각종 브랜드숍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미국의 쇼핑몰에서는 연중 내내 경쟁하듯
할인 행사가 진행된다. 연말 재고떨이, 새해맞이, 밸런타인데이, 프레지던트 데이 등 온갖 ‘무슨 무슨
데이’에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80%까지 세일을 한다. 하나를 사면 다른 하나는 공짜로 주거나, 다른
하나는 훨씬 싸게 주는 등 세일 방식도 다양하다.
이메일과 우편함으로 날마다 날아드는 각종 할인 쿠폰들 역시 물량 면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마치
‘이래도 지갑을 안 열래?’라며 소비자들에게 으름장을 놓는 듯하다. 이런 쇼핑 천국에서 쇼핑으로 인
한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는 팁을 몇 가지 적어본다.
▲첫째, 계속 기다려라. 기다리면 가격은 더 내려간다. 50% 할인에다 추가로 25% 더 할인할 때까지
기다려라.
▲둘째, 한번 싸게 산 물건에는 미련을 버려라. 계속 가격을 추적해봤자 스트레스만 쌓인다.
▲셋째, 득템을 하려면 평소에도 주식 하듯이 쇼핑 종목을 봐둬라. 그래야 어떤 물건이 얼마나 값이
내려갔는지, 언제 사야 하는지 타이밍 등을 알 수 있다. 단, 돈 몇 푼 아끼려다 소중한 연수 시간
을 다 빼앗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라.
▲넷째, 그루폰 등 소셜 커머스에 접속해 할인쿠폰을 챙겨라. 계산할때 할인쿠폰 안내는 사람은 나
밖에 없더라.
▲다섯째, 자신이 자주 이용하는 브랜드는 꼭 온라인으로 회원 가입을 해라. 첫 가입시 15~20% 할인
쿠폰을 받을 수 있다. 한 지인은 모 브랜드에서 무려 10개의 이메일로 회원가입을 해 10개의 쿠폰
을 챙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