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연수생이 특파원은 또 뭡니까? 깜짝 놀랐습니다.”(E-MAIL에서)
그러나 워싱턴에 도착한 저는 더 이상 연수생이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워싱턴에서 종군기자로 뛸 것을 명받은 것으로 원래의 제 자리로 잠시 돌아간 것이었죠. 그런데 제가 출근한 프레스 센터 건물이 미국의 자본주의를 선전 선동하고 국제적으로 양산하는 매개라는 점에서 아랍 테러리스트들의 2차 보복대상 리스트에 들어가 있다고 한 소식통이 슬쩍 찔러주더군요..겁 주려고 빈말을 하는 쪽이 아니어서 매일매일 저는 폭탄테러의 가능성을 실감하며 프레스 센터 정문을 들어섰고 하루에 16-18시간을 매일같이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탄저병 환자가 발생하면 현장으로 가기도 했는데, 미 의회가 그 곳이었죠. 가뜩이나 의회에서 발견된 탄저균은 테러무기용의 미세한 가루여서 공기 중에서 급격히 확산된다고 기사를 써놓고 간 터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현장취재를 마치고 난 며칠 뒤부터 탄저균 감염증상과 흡사한 감기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연의 일치였지만 많은 생각이 오가더군요. 병원엔 가지 않았고,(수선스러운 테러공포에 휘둘려서 나약해지기 싫었구요.) 갔으면 꽤나 빈축을 샀을 정도로, 며칠 뒤 감기가 보란 듯이 낫습니다.
테러는 미국의 자존심을 구겨놓았지만 미 언론에게는 그간의 시름을 펴게 하는 전기가 됐습니다. 당장 테러가 난 9월 11일, 96년 O.J.Simson 판결을 제외하고는 195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 영 힘을 못 쓰던 석간 신문들의 special edition들이 불티나게 팔렸고
(T.V는 똑같은 화면만 반복돼 물리고 정보와 분석을 목말라하는 독자층들이 주 고객이었습니다.) 기자들에게는 짧은 시간안에 얼마나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전달해줘야 하는지 집중적인 훈련을 받는 소중한 기회가 됐습니다.(테러 당일, 신문들은 한 시간 혹은 두시간 간격으로 증보판을 찍어냈습니다.) 뉴스에 대해 전례없는 관심이 쏟아지면서 9월 10일 까지도 sensational한 뉴스에 흠뻑 빠져있던 television local 뉴스들이 자못 진지한 hard 뉴스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10월말에 이들 local 뉴스 프로그램에서 hard 뉴스는 7%에서 58%로 뛰었고 과거에 뉴스를 내내 도배하던 사회명사들의 사생활 뉴스는 72%에서 12%로 주저 앉았습니다. 전대미문의 피해를 낸 이 현실이 바로 hard news 그 자체이고 시청자들의 필요와 요구도 hard뉴스로 돌아선 만큼 참을 수 없이 가벼웠던 이들 방송의 이상기후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 지켜볼 일입니다.
테러로 network 방송사들의 시청률도 동반상승했습니다. 2001년 4/4분기 현재 ABC가 1년전에 비해 18%가 올랐고 NBC는 13% CBS는 11%의 오름세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테러의 덕(?)을 본 것은 아침뉴스로 ABC의 ‘Good Morning America’가 1년전보다 8%의 시청자를 더 끌어모았고 CBS의 ‘The Early Show’가 15%의 기록적인 상승세를 나타냈습니다.
스탠포드에 돌아와서 보니 communication 학과는 떠들썩했습니다. 교수들이 수업시간마다 언론의 이번 테러 보도를 토론주제로 내걸고 이후 신랄한 평가를 하지 않고는 진행을 안 시켰을 정도입니다. 다음 겨울 학기에 전쟁 보도론을 신설하는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대학들도 있습니다.
분출하는 뉴스거리와 이를 정교하게 조명해 보도해야 하는 기자의 사명에 대한 논란도 뜨겁습니다. 이번 테러는 미국 언론의 성숙함과 지나친 보호본능이 동시에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테러가 터지자마자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top 기사로 비중있게 다루어졌었을 희생자 가족들의 절규가 어느 한번 report의 형태로 화면에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있다면 비행기안에서 테러범들과 격투해 더 큰 참사를 막은 자신의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진작에 슬픔을 삼키고 이제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속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치는 60대 어머니의 담담한 소회정도라고나 할까요. 탄저병 사태가 일어났을 때 탄저균과 유사해 보이는 흰가루 소동이 적지 않게 일어났었죠. 모든 소동을 정밀하게 보도하는 탄저균 기사가 오히려 시민들의 공포를 촉발시킬 수 있다는 반성아래 The Salt Lake Tribune과 The Houston Chronical은 그 지역의 가짜 탄저균 소동과 테러 공포 소식을 무시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정한 차분함’이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하더군요. 아프간 공격 시점에 대해서도 미국 방송들은 부시대통령 기자회견 생중계일정을 잡으면서 완벽하게 인지를 했으나 단 한마디도 사전에 언급하지 않는 절제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은 fact provider로서의 기자의 정도를 넘어 국익보호에 지나치게 앞장섰다는 비아냥도 샀습니다. 미국의 오폭을 두고 NBC의 기자는 다음 말로 리포트를 시작했습니다. “전쟁이란 다 그런 것입니다.. 어느 누가 공격목표를 100% 정확하게 맞출 수 있겠습니까?”
맞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자가 할 말입니까? 군인이 할 소리이지….
더욱 신기한 것은 오폭으로 숨진 희생자가 났는데 이를 두고 미 국방부 대변인이 쓴
완곡어법, “collateral damage”를 모든 기자들이 그대로 기사에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니, 죽으면 죽은 거지, “collateral damage”는 또 뭡니까?
지난 Gulf War에서는 정부의 지나친 언론통제가 미국 언론 사이에서 도마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그 같은 장악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걸프전쟁은 미국이, 당시 행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미국 주요 대기업들의 대주주였던 쿠웨이트의 사바트 일가에게
후세인에게 밀렸던 정권을 되찾게 해주겠다고 밀약하고 그 계산 아래 밀어붙인 것이어서
언론통제가 필요했지만 이번은 피해자의 입장이어서 좀 누그러진 셈이었지요. 국방부와
언론과의 관계가 다소 불편한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언론사들간의 경쟁에 인한
전술의 지나친 공개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지금 사상 초유의 일을 겪고 있는 미국에서 언론도 또 하나의 시험대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중립성과 객관성 그리고 공정성이라는 언론의 정도를 매일 매일 평가할 수 있을 만큼 fact는 넘쳐나고 있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하는 가치관의 혼란이 산재해있으며 이를 평가할 시청자들의 관심도 준비돼 있습니다. 폭발하는 수요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 거리를 두고 관망하고 있는 이 한국 연수생도 자못 진지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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