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로 연수지가 결정됐다고 했을 때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왜 하필 비가 많이 오는 곳으로 가느냐?” 였습니다. 일 년 내내 따뜻하게 해가 내리쬐는 샌디에이고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도시로 연수를 떠나는 사람들과 비교하며 안쓰러워하는 지인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연수 가기 전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나중엔 저도 괜히 심란해지더군요.
저와 비슷한 시기에 시애틀에 온 한 방문학자 가족은 다른 짐은 한국에 많이 두고 왔지만 우산만큼은 6개를 넣어왔다고 합니다. 가족 수는 네 명인데 우산이 고장 날 경우에 대비해 여유분으로 두 개를 더 챙겨 왔다니 악명 높은 시애틀의 비에 대비해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것이죠.
하지만 막상 시애틀에 와 보니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린이들도 레인코트나 방수 기능이 있는 아웃도어 재킷 하나 정도 입고 다닐 뿐 입니다. 시애틀 사람들은 농담 삼아 “시애틀에서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관광객뿐이다”라고 말합니다.
한번은 비 오는 날 시애틀 사람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산을 쓰고 다니는지 스타벅스 카페에 앉아서 걸어가는 사람을 지켜 본 적이 있었습니다. 우산을 쓴 사람 중 절반 이상은 유학생처럼 보이는 동양계 여성이었고, 아이와 함께 걸어가는 여성, 그리고 관광을 온 듯 보이는 중년 부부 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비가 많이 오기로 악명 높은 시애틀에서 사람들은 왜 우산을 쓰지 않는 걸까요. 제가 분석해본 결과는 이렇습니다. 시애틀하면 비를 떠올리는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사실 시애틀에는 실제로 비가 그리 많이 내리지 않습니다. 시애틀의 연간 강수량은 평균 37~38인치 정도인데, 이는 미국 주요 도시 중 44위의 수치입니다. 뉴욕의 경우 연간 43인치의 강수량을 기록하고 있고, 보스턴은 44인치, 휴스턴 텍사스는 48인치입니다. 화창한 날씨로 유명한 마이애미는 무려 58인치입니다.
그런데 왜 시애틀은 비가 많이 온다고 알려져 있을까요. 전체적인 강수량은 적지만 비가 오는 날이 많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강수량이 시애틀보다 많은 뉴욕은 연중 비가 오는 날이 119일, 보스턴은 127일이지만 시애틀은 무려 158일입니다. 이 통계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시애틀의 비는 대부분 부슬비라는 것입니다. 시애틀에 오래 산 사람들은 “시애틀은 하루에 사계절이 다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새벽부터 촉촉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하다가 오전에 해가 비치며 화창하고 따뜻한 날이 되고, 오후에 구름 끼고 흐리며 쌀쌀한 바람이 불다가 밤중에 다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식입니다. 서울에서는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날이고, 맑은 날은 맑은 날인데, 시애틀은 오늘이 비가 오는 날인지 맑은 날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날들이 많습니다.
시애틀의 계절을 간단하게 구분하자면 4월~9월까지의 건기와 10월부터 3월까지의 우기로 나눌 수 있는데, 특히 건기와 우기의 중간인 3~4월과 10~11월에 이 같은 변화무쌍한 날들이 많습니다. 12월과 1월에는 흐리고 부슬비가 계속 내리는 날들이 더 많아집니다.
시애틀은 미국 도시 중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 커피를 사랑하는 도시로 유명합니다. 시애틀에서는 캐주얼한 복장에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른 손에 우산을 들고 나면 너무 거추장스럽겠죠. 커피를 포기할 수 없으니 우산을 포기한 것이 아니겠냐고 한 시애틀 이웃은 농담 삼아 이야기하더군요.
실제로 시애틀에 살아보니 왜 시애틀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는지 이해가 됩니다. 반년 이상 살면서 한국처럼 주룩주룩 내리는 비는 몇 번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장마철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은 하루 동안 서울에서 내리는 양의 비가 와서 ‘오늘은 시애틀 비답지 않다’ 생각했는데, 그날 저녁 뉴스에 너무 많은 양의 비가 한꺼번에 내려 도로 이곳저곳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뜨더군요.
저와 가족들 역시 비가 내려도 우산을 쓰기 보다는 방수 재킷을 하나 걸치고 나갑니다. 우산은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럽고 자칫 잃어버릴 수 있는데 레인코트는 비가 그치면 재킷의 물기를 한번 털어주고 모자만 벗으면 끝이니까요. 이곳 사람들의 전형적인 패션은 보온효과가 있는 플리스 재킷을 입고, 그 위에 방수가 되는 얇은 고어텍스 재킷을 입는 식입니다. 노스페이스나 컬럼비아 같은 아웃도어 패션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라면 비 내리는 날 아이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곳은 맑은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변함없이 세발 유모차를 밀며 조깅하는 여성들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유모차에 비닐 방수커버 하나 씌우고 본인은 ‘이 정도 비 따위는 나를 막을 수 없다’는 듯 힘차게 유모차를 끌며 달리는 여성들을 보면 그들의 강인한 체력이 부럽기도 하고 운동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는 듯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태평양을 끼고 있는 시애틀에 비의 양이 적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시애틀이 위치한 워싱턴주 지도를 보면 주 왼쪽으로 커다란 올림픽 반도가 태평양을 옆에 끼고 시애틀을 막고 서 있습니다. 올림픽 반도는 뱀파이어를 주인공으로 한 인기 판타지 소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배경 무대입니다. 이 소설은 이후 영화로 만들어졌고, 영화의 상당량도 올림픽 반도에서 촬영됐습니다. 그 주 무대가 된 포크스라는 작은 도시는 연중 강수량이 142인치에 달할 정도로 비가 많이 오고, 해가 뜨는 날이 많지 않은 곳입니다. 뱀파이어 가족이 거주지로 삼기에 최적의 장소죠. 태평양의 물기를 머금은 공기는 거대한 올림픽 반도의 산맥에 막혀 비를 한번 뿌린 후 시애틀로 진입합니다. 비구름이 시애틀 하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이 건조해진 후죠. 시애틀이 흐리긴 해도 비가 많이 내리진 않는 이유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