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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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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도 할 수 있다.

연수를 앞두고 아내가 직장에서 신설 조직으로 소속 부서를 옮기면서 동행하기 어려워졌다. 거의 이직에 가까운 인사 이동은 새로운 방면으로 경력을 확장하기 위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그때까지 했던 것과 전혀 다른 업무를 막 시작한 터라 1년 휴직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아내는 일단 한국에서 일을 계속하는 쪽을 택했다. 새 업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면 미국으로 건너와 함께 귀국하려는 생각이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내는 육아 휴직을 1개월만 쓰고 복직했다. 당시 빠른 복직이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1년 가까이 휴직이 남았으니 언젠가 필자가 해외 연수를 가게 된다면 그 때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실제로 연수를 가게 되자 휴직하기 애매한 상황이 된 것이다.

앞으로 해외 연수를 하게 될 기자들 중에도 비슷한 상황을 맞아 고민하는 경우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연수를 준비하게 되는 시점은 보통 입사 10년차 이상이다. 배우자도 비슷한 연차라면 직장에서 중간 관리자급이 돼서 한참 일할 시점일 것이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기가 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업무 스트레스에서 잠시 벗어나 가족과 함께 외국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 것처럼 직장에서의 기회도 쉽게 오지 않는다. 그 기회를 막 얻은 아내에게 그걸 포기하고 같이 출국하자고 할 수는 없었다

혼자서 어린 아이를 데리고 해외에서 연수한 선배 엄마 기자들을 몇몇 알고 있지만 아빠 기자가 그렇게 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아빠 혼자, 더구나 외국에서 어린 딸을 돌보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상식적인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다. “왜 가족이 다같이 가지 않느냐”, “정말 할 수 있겠느냐”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아이와 함께 외국에서 8개월 정도를 보낸 지금 답을 해본다면 “가족이 다같이 오지 못했지만 충분히 보람 있는 시간이었고 아빠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기껏 여기까지 와서 애나 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다짐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가 아니라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은 집안일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하고 혼자 있는 그 시간을 누리기로 했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나면 동네 산책로에 나가 6마일 달리기를 하고, 연구 주제에 포함된 국립건축박물관을 포함해 워싱턴DC의 박물관과 미술관에도 부지런히 다녔다. 동네 도서관에서 하는 영어회화 교실에 나가거나, 때로는 카페에 앉아 ‘멍 때리기’를 해보기도 했다. 연구, 운동, 문화생활, 영어공부. 뭐가 됐든 마음을 쏟을 수 있는 일이 하나쯤 필요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며 충전해야 아이에게도 더 충실할 수 있다.

학기중에는 이런 시간이 자연스럽게 생기지만 방학 때는 그렇지 않다. 미국의 긴 여름방학 내내 여행을 다닐 수도 없는 일이어서 다른 대책이 필요하다. 보통은 서머 캠프를 보내게 되는데, 미리 계획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주마다 또 카운티마다 다르겠지만 필자의 경우 6월 하순부터 시작되는 서머캠프를 2월에 신청했다. 캠프라는 것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등록해야 하는지도 잘 몰라서 한인 단체카톡방에서 오가는 이야기들을 참고삼아 밤늦게까지 검색했다. 그때는 여름이 멀게만 느껴져서 서머캠프라는 것이 도무지 실감도 나지 않았고 귀찮게만 느껴졌지만 여름방학이 시작하고 나서야 미리 신청해두길 잘했다고 느꼈다. 캠프를 여는 기관이나 학원, 업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언제 등록이 시작되는지,, 비용은 얼마나 되는지, 거리가 멀지는 않은지 잘 따져봐야 한다. 늘 귀를 열어두고 ‘안테나’를 세워놓는 게 좋다.

혼자서 아이를 돌보며 연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 지인은 ‘해외 독박육아’라고 했다. 왠지 아이를 짐짝 취급하는 느낌이 들어서 독박육아라는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와 종일 같이 있다보면 분명 지치기도 하고 아쉽고 불편한 순간들도 있다. 하지만 언제 또 이렇게 아이와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