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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칫솔을 맡기지_마세요 – 치과 치료비 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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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칫솔 맡기지 마세요: 치과 치료비 폭탄

적응할 만하면 일이 터지는 통에 지겨울 시간이 없던 시애틀. 그중에서 대박은 아이의 병원 치료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 악명 높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한국에서 괜찮은 보험을 꼭 들고 가자고 결심했습니다. 특히 신경 썼던 부분은 아이의 치아였습니다. 유치가 빠지기 시작하는 초등 1학년이어서 발치 비용 등이 걱정됐거든요. 하지만 별도의 치과 보험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3개월에 한 번씩 정기 검진을 받으면서 충치 치료를 꾸준히 했기에 다른 치료는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입국 직전에 받은 마지막 검진에서도 이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유치만 잘 뽑으면 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거기서 비극은 시작됐습니다.

*앗 까만 점, 이게 뭐야
워싱턴주에선 올해 9월 새 학기부터 전면 대면 수업으로 전환했습니다. 그 덕에 아이는 다양한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미국 생활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새 학기부터 소득과 관계없이 전 학생들에게 무료로 아침과 점심이 제공되면서 부모들은 도시락 노동에도 해방됐습니다. 아이는 점심때 주는 피자, 핫도그, 타코 등은 물론 초코 우유, 에너지바, 영양 젤리 등이 너무 맛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들이 일종의 경고였건만 아이가 미국 와서 학교 적응은 물론 스스로 치실도 잘하고 양치질도 해낸다며 흐뭇해하기만 했으니….
12월 아이 학교 방학이 다가오면서 문득 양치질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더 늦기 전에 그런 생각이 든 게 천만다행입니다). 치실을 해주는데, 어금니 사이에 까만 점이 보이는 겁니다. ‘아니 이게 뭐지, 음식물 찌꺼기인가?’ 이러면서 양치질을 했는데 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없어지길 바랐던 검은 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충치임을 직감하고, 추천받은 한국계 치과와 아동 전문 치과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냥 엑스레이 찍는 데만 100달러가 훌쩍 넘더군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한국계 치과는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데가 아니어서 아동 전문 치과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치과 직원들은 대단히 친절했습니다. 워낙 인기 있는 곳이어서 2주 뒤에나 예약 날짜가 잡힌다고 했습니다. 아이 치아 건강 상태를 말하며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워킹맘임을 강조하자 당일 오후 4시로 예약을 잡아줬습니다. 이메일로 일종의 문진표를 보내줬는데 작성하는 데만 30여 분 소요됐습니다. 총 3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아이의 치아는 물론 식습관, 양치습관, 이전 병력기록까지 요구하는 게 인상적이더군요.

*엑스레이, 스케일링, 불소 도포만 400달러 가까이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를 데리고 당장 치과로 갔습니다. 아이는 처음엔 살짝 겁을 먹었지만, 한국과 비슷한 치과 모습에 좀 안심하는 눈치였습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스케일링한 뒤 불소 도포를 받을 동안 아이는 천장에 달린 모니터를 통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즐겁게 있었습니다.

다 마치고 기다리니 마침에 의사 선생님이 들어왔습니다. 빠르게 쏟아내는 말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치료받아야 할 이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향후 진료 계획에 대한 말도 한 듯하지만 짧은 영어 실력을 한탄하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칫솔, 치약, 치실 세트 등을 받아 나왔습니다. 의료비 계산 창구는 별도로 마련돼 있었고, 담당 직원도 따로 배치돼 있었습니다.

비용 청구서를 보니 무려 400달러에 가깝더군요. 이걸 우리나라에서 받았다면 얼마인지를 생각해보니 속이 쓰렸습니다. 할인을 좀 받을 수 있냐고 했더니 10% 할인을 제시했습니다. 10%라도 어디냐며 바로 결제했습니다.

*치료비는 무조건 깎자

첫 치료비는 약과였습니다. 향후 지급해야 할 치료비 청구서를 받아들자마자 한숨만 나왔습니다. 레진과 크라운 치료가 전부이건만 총비용은 1,600달러가 넘었습니다. 일단 생각해보고 결정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그러라고 하더군요.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습니다. 왜 치과 보험을 별도로 들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지요. 크라운까지 다 벗겨진 상태에서 치료를 마냥 미룰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 고민 끝에 결국 치과를 다시 찾았습니다. 아이 치료를 빨리 받고 싶다고 말하면서 사정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습니다. 여러 차례 협상 끝에 300달러 정도를 깎았습니다. 더 깎을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영어에 한계를 느끼고 300달러 할인에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의료비를 개인이 깎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좀 생소하긴 했지만, 청구 금액을 다 받아들이지 말고 할인받을 수 있는 데까지 계속 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병원에 가면 무조건 깎자는 교훈을 얻었습니다(물론 병원을 가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요). 맞습니다. 보험이 있든 없든 무조건 할인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동 전문 치과 덕분인지 의료비가 비싼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료진은 정말 친절하고 꼼꼼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치료를 했고, 어떤 효과가 있는지 정말 상세하게 말해줬습니다. 아이 역시 치과에 대한 불안감을 이제는 가지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든 보험 덕분에 첫 진료비 전액이나마 환급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열심히 아이 치료에 전념하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문득, 우리나라의 의료 체계가 떠오릅니다. 개인 의료보험에 전적으로 기대지 않고, 국가 의료보험으로 언제 어디서든 의료 혜택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이 무척 그립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이 외국인에게는 어떻게 비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외국살이해보니 외국인 신분으로 타국에서 생활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병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병원비 부담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아이 덕분에 값비싼 경험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나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