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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연수기1- 막히면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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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연수를 오게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자동차를 사고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다. 미국에선 지하철이 있는 몇몇 대도시면 몰라도 자동차 없인 슈퍼마켓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2007년8월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1시간 거리인 ‘아덴스’(Athens-이곳에선 ‘애띤즈’라고 발음함)에 도착한 나 또한 짐을 풀자 마자 자동차부터 사러 갔다. 2003년식 도요타 캠리로 정하자 중고차상은 한 달간 유효한 임시 번호판을 달아줬다. 이제 한 달 안에 운전면허를 딴 뒤 정식 번호판을 달아야 하는 셈이다.

조지아주에서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필기시험은 도로 표지판이나 신호등과 관련된 40문항 가운데 30문항 이상만 맞추면 된다.

아덴스 운전면허시험장에 도착해 운전면허 시험을 보러 왔다고 하자 필기와 실기를 하루에 모두 볼 것인 지를 먼저 물어봤다. 물론 ‘예스’라고 대답했다. 30분쯤 기다리자 이름을 불렀다. 필기시험은 컴퓨터로 치는 것이었다. 결과는 바로 나왔다. 시험관은 내가 합격했음을 알려주며 다시 이름이 불릴 때까지 로비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름을 부르면 바로 시험관과 함께 차를 타고 실기시험을 보러 나가는 것이다.

미국에선 자신의 차로 운전면허시험을 본다.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었다. 30분은 ‘그러려니’ 하며 기다릴 수 있었지만 1시간이 훌쩍 지나가자 슬슬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 내가 영어를 잘 못 알아 들은 건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나보다 더 늦게 온 백인들이 시험관과 함께 실기시험을 보러 나가는 장면이 반복되자 의문이 증폭돼 참을 수 없었다. 로비에서 기다린 지 1시간30분이 지났을 때 카운터로 다가가 상황을 설명한 뒤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시험관은 계속 기다리라고만 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느냐고 다시 물었지만 시험관의 대답은 자기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 그럼 왜 나보다 더 늦게 온 사람들이 먼저 테스트를 받느냐고 따졌더니 그 사람들은 미리 예약을 하고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한 난 로비의 의자로 돌아와 다시 기다려야 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됐지만 난 언제 이름이 불려질 지 몰라 자리도 비울 수 없었다. 로비에서 기다린 지 3시간이 됐을 즈음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다시 시험관에게 다가가 이렇게 아무 기약없이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 다른 날로 예약을 한 뒤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러나 시험관은 난 소셜시큐리티넘버가 없어 예약 날짜를 입력할 수 없다고 했다.

내 이름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1시간을 더 기다린 뒤에야 불려졌다. 그러나 막상 4시간만에 실기시험을 보게 되자 너무 맥이 빠진 탓인 지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실기시험은 운전면허시험장 안의 코스를 주행한 뒤 실제 로드테스트까지 합격해야 하는데 난 코스에서 이미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시험관은 일렬주차를 할 때 내가 중앙선을 침범했다며 바로 ‘X’자를 표시했다. 시험관은 다만 내가 필기시험을 통과한 만큼 다음날 다시 실기시험을 볼 수 있다고 알려줬다.

다음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운전면허시험장을 찾아갔다. 접수를 한 뒤 오늘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 지 난감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이름이 들렸다. 전날 4시간만에 들은 이름을 이날은 10분만에 듣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었다. 실기시험 결과는 또 다시 낙방이었다. 스스로는 완벽하게 코스 주행을 마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험관은 납득하기 힘든 규정들을 들어가며 다시 불합격 통보를 내렸다.

아무 설명없이 4시간을 꼼짝없이 기다리고, 20년 가까운 운전 경력에도 불구하고 2번이나실기시험에서 떨어지자 힘이 쭉 빠지면서 자괴감마저 들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에 화가 나 참을 수 없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더구나 연이어 불합격한 만큼 다시 시험을 보려면 1주일을 기다린 뒤 재도전하거나 조지아주의 다른 지역으로 가 처음부터 시험을 다시 봐야 했다. 미국은 합리적인 곳일 것이라는 기대는 산산조각났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임시번호판의 한 달 기한도 다가오고 있던 터라 그 다음날 아덴스와 40분 거리인 노크로스란 곳의 운전면허시험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곳에선 아덴스완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됐다. 접수와 동시에 필기시험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잠시 기다리자 연이어 실기시험도 볼 수 있었다. 잔뜩 긴장하며 면허시험장내 코스 주행을 마치자 옆 좌석에 앉아있던 시험관은 곧바로 로드테스트에 들어가자고 했다. 로드테스트란 면허시험장 주변 실제 도로를 주행해 보는 것으로 운전면허시험의 마지막 관문이다. 로드테스트를 마친 뒤 다시 면허시험장으로 돌아오자 시험관은 내 성적표에 ‘99’라는 숫자를 크게 적어 건네줬다. 이후 사진을 찍은 뒤 정식 운전면허증을 받는 데는 고작 3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물론 내 운전 실력이 하루 만에 달라졌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어떤 곳에서는 2번이나 실기시험에서 떨어진 반면 다른 곳에서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덴스 운전면허시험장은 동양인들에게 면허를 안 내주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교민들 중에는 심지어 9시간을 마냥 기다리거나 10번이나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라곤 해도 모든 미국인과 시스템이 세계 최일류는 아니다. 가끔은 아주 이해할 수 없고 황당한 일마저 생긴다. 그러나 큰 나라인 만큼 이곳에서 안되는 것도 다른 곳에선 아무 문제 없이 되는 일도 많다. 미국에서도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