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로가 무서운 이유
저는 25년 차 장롱 면허 소지자입니다. 어렵사리 운전면허를 딴 뒤 단 한 번도 운전해 본 적이 없습니다. 미국은 서울과 달라 운전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니 운전 연수를 받고 출국하라는 충고를 지겹게 들었습니다. 모두 귓등으로 흘렸습니다. 원체 겁이 많고 깜짝깜짝 잘 놀라기까지 하는 터라, 운전하다 돌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침착하게 넘길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운전을 일임한 채 미국에서 이동하고 있는데, 조수석에 편히 앉아 있으면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툭하면 느끼곤 합니다. 평온하게 차창 밖 풍경만 감상하기엔, 제 교감 신경을 자극하는 광경이 도로에서 자주 펼쳐지는 탓입니다. 죽은 사슴이 가녀린 다리를 드러내고 처참하게 길가에 누워 있는 것도, 너구리나 오소리로 추정되는 사체가 길바닥에 낭자한 선혈과 함께 나뒹구는 것도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누군가의 유해를 뜯어 먹던 까마귀 떼가 자동차 소리에 푸드덕 날아가는 통에 비명을 지른 적도 있고요. 죽은 동물의 흔적이 며칠, 심지어 몇 주가 지나도록 치워지지 않으면서 ‘분해’되는 과정을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 하기도 합니다.

최상위 포식자인 곰 역시 차량 앞에선 취약합니다. 2024년 10월, 추도객들이 모여 회색곰(grizzly bear) 한 마리를 기렸습니다. 추모의 대상은 와이오밍주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에서 차에 치여 숨이 끊어진 암컷 곰 ‘399(야생동물 연구자들이 붙인 식별 번호)’였습니다. 이 곰은 새끼들과 함께 ‘그레이터 옐로스톤 생태계’를 누비는 모습으로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았지만, 자동차 충돌만큼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동물도 인간도 위협하는 ‘WVC’
2008년 미국 교통부는 연방 차원의 야생동물-차량 충돌(Wildlife Vehicle Collision, 이하 WVC) 연구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이후에 수행된 여러 연구 가운데 이 정도 규모의 연구는 아쉽게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좀 해묵은 감이 없진 않지만, 2008년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 ‘로드킬(roadkill)’이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는 동물의 피해에 집중한다면, ‘WVC’는 야생동물과 충돌하는 차량, 그리고 차량에 탑승한 사람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인간과 동물이 도로에서 만나며 생겨나는 비극에 주목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WVC는 미국 전역에서 해마다 1백만~2백만 건씩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로에서 발견된 동물 사체의 숫자와 자동차 보험 회사 자료, 경찰에 신고된 교통사고 통계 등을 종합해 추산한 수치입니다.
차량과 충돌하는 동물 대다수는 흰꼬리사슴과 노새사슴 같은 사슴류입니다. 미국 자동차 보험 시장 점유율 1위 업체인 스테이트팜(State Farm)의 자료를 보면, WVC에 따른 보험 청구의 99.2%가 사슴 관련인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엘크와 무스가 각각 0.5%와 0.3%로 그 다음입니다. 하지만 대형 포유류가 아닌 중·소형 포유류와 조류, 파충류, 양서류 등은 교통사고나 사체 보고에서 쉽게 간과되곤 합니다. 따라서 이들 동물과의 충돌까지 포함하면 WVC 규모는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차에 탄 사람도 WVC로 큰 대가를 치릅니다. 대형 동물과 차가 충돌했을 때 동물 쪽은 대부분 죽음을 맞이하는 반면, 사람이 숨지는 비율은 상대적으로 훨씬 낮긴 합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매년 200명 정도가 WVC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WVC로 다친 사람으로 범위를 넓히면 연간 2만 6,000명이 꾸준히 피해를 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금전적 피해도 상당합니다. 사슴과 충돌한 사고의 90% 이상, 엘크나 무스처럼 더 큰 동물과 충돌한 사고는 거의 100%가 차량 손상으로 이어집니다. 가장 흔한 사슴 충돌 사고의 경우, 차량 수리비로만 평균 1,840달러가 나갑니다. 물론, 부딪힌 동물이 크고 무거울수록 차는 더 망가지고 고치는 데 돈도 더 많이 듭니다. 여기에다 차량 견인과 동물 사체 처리, 도로 시설 수리에 필요한 비용, 부상자 의료비와 치료 기간의 소득 손실 등도 더하면, WVC로 인한 전체 손실은 연간 83억 8,800만 달러로 추산됐습니다. 게다가, 이 모든 건 보고서가 쓰인 2008년 기준이다 보니, 그간의 물가 상승분을 반영하면 WVC에 따른 비용은 훨씬 늘어났을 게 분명합니다.
WVC, 어떻게 줄일까
미국의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WVC를 줄여 인간의 안전을 지키고 야생동물의 생존을 보호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유도 울타리와 생태통로를 동시에 설치하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치는 첫 번째 목적은 야생동물이 도로에 진입해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울타리는 자칫 동물의 자유로운 이동을 원천 봉쇄하는 물리적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물이 안전하게 도로를 횡단할 수 있는 생태통로를 함께 조성해서 울타리의 맹점을 보완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렇게 되면 울타리는 생태통로가 있는 방향으로 동물을 ‘유도’해 생태통로 이용률을 높이는 두 번째 기능을 수행합니다.
WVC를 줄이려고 아예 야생동물의 개체수를 감소시키기도 합니다. 주로 사슴을 겨냥하는 ‘개체수 조절’로, 동물을 사냥할 수 있는 할당량을 늘리거나 전문 엽사를 고용해 실시합니다. 개체수 조절을 통해 겨울철 사슴의 서식 밀도를46% 낮췄더니 사슴과 차량의 충돌이 30%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다만, 개체수 조절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하지 않으면 야생동물의 수가 다시 증가할 수 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됩니다.
운전하다 야생동물을 만났다면?
매년 10월부터 12월까지는 미국 내 WVC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슴의 번식기입니다. 수사슴이 암사슴을 만나려 활발히 이동하고,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 역시 자연스레 증가세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주들은 가을철이 되면 운전자를 대상으로 안전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진행합니다.

하지만 특정 시기에 운전자들이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게 나머지 기간엔 마음을 놓아도 된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는 없습니다. 휴일이 따로 없는 야생동물은 언제든 예고 없이 도로에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WVC를 예방하고 만일의 경우 안전하게 대처하기 위한 수칙을 소개합니다.
경고엔 이유가 있다
경고 표지판은 야생동물이 많이 서식하고 차량과 충돌이 자주 발생하는 지점에 세워지는 만큼, 간과해선 안 됩니다. 숲이나 습지 인근에서는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황혼부터 새벽까지
해 질 녘부터 새벽 사이는 동물이 먹이를 찾아 가장 많이 활동하는 시간대입니다. 부득이하게 야간 운전을 해야 한다면, 전조등 불빛이 동물의 눈에 반사되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과속은 금물
과속은 제동거리를 늘립니다. 제한속도 준수는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사슴은 한 마리로 끝나지 않는다
사슴이나 엘크, 무스 등은 무리를 지어 움직입니다. 한 마리가 보인다면 주변에 더 많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피하려는 본능을 억제하자
동물을 갑자기 맞닥뜨렸을 때 운전자는 핸들을 꺾어 방향을 바꾸려는 충동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차량과의 더 큰 충돌을 낳을 수 있는 최악의 선택입니다. 동물과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속도를 줄이십시오.
사고가 났다면 이렇게
사고 직후에는 비상등을 켜고 차를 안전지대로 옮깁니다. 동물이 도로를 막아 다른 차량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경찰에도 신고해야 합니다. 동물을 옮기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입니다. 겁에 질렸거나 다친 야생동물이 다리나 발굽으로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