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장벽보다 문화장벽이 더 무서운 프랑스>
-알쏭달쏭하기만한 `프랑스식` 코드 이해하기
요즘(5월 초) 파리는 봄이 한창입니다. 주말에 집 근처 공원에 나가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 나와 잔디밭에 누운 채 해바라기를 즐기는 진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날씨가 좋아지면서 파리 시내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프랑스 정부는 외국관광객들이 매년 줄어들고 있다면서 비상대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제가 보기엔 배부른 자의 엄살에 가깝습니다. 파리 시내 카페나 식당은 사시사철 외국인들로 붐비고, 지하철을 타보면 항상 승객의 절반 이상은 가이드북을 들고 있는 외국관광객들(매년 7000만명 이상 프랑스 방문)입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파리시민들도 외국인을 접하는 데 매우 익숙한 듯하고, 이 점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외국관광객들에게 파리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제 경우 ‘관광객’과 ‘거주민’의 중간쯤에 위치한 ‘경계인’이다 보니, 갖가지 ‘장벽’과’차별’을 적잖이 경험해야 했습니다. 사회제도나 시스템이 관광객들에겐 후한 인심을 베풀지만, 외국인체류자에겐 더할 수 없이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관광객의 경우 비자없이 3개월동안 체류할 수 있지만, 3개월 이상 외국인 거주자의 경우 무조건 ‘체류증(carte de sejour. 외국인이 프랑스에 합법적으로 거주할 권리를 인증해 주는 문서로 이것이 없으면 은행계좌 개설, 승용차 구입 등이 불가능함)’을 받아야 하는 데 몇 달씩 질질 끌면서 애를 먹입니다. 또 가게나 식당 등에서는 ‘영어’를 쓰면 귀엽게(?) 봐주지만, 어설픈 불어를 쓰면 은근한 ‘멸시’와 ‘차별’을 각오해야 합니다.
지난 4월23일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프랑스정부가 발행하는 정식 체류증을 마침내 손에 쥐었기 때문입니다. 체류증 얘기부터 꺼낸 이유는 프랑스가 얼마나 진입장벽(?)이 높은 나라인지 제 경험담을 통해 알려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파리 도착 후, 연일 섭씨 40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서 어렵사리 집을 구하고, 아들녀석(만5세)을 공립유치원에 등록하는 등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를 갖추느라 두달 정도를 정신 없이 보낸 뒤, 인근 경찰서에 가서 체류증 신청 서류를 접수했습니다. 상담원은 3개월 후 파리경시청에서 있을 인터뷰(정식 체류증을 발급하는 절차)에 갈 때는 결혼증명서와 건강보험 가입증명 서류를 꼭 가져가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3개월 기한의 임시 체류증을 내주었습니다.
3개월 후 저는 주불한국대사관에서 발급한 결혼증명서, 건강보험 가입증, 은행계좌 증명서, EDF(프랑스 전력회사)가 발행한 전기요금 납입증명서, 프랑스텔레콤의 전화요금 납입증명서, 주택임대계약서, 신분증명서 등 체류증 발급에 필요한 서류 10여가지를 챙겨 파리경시청에 찾아갔습니다. 오전 일찍 서류를 접수했지만, 오후 2시가 다 되도록 호명을 하지 않아 애를 태우다 접수데스크에 하소연한 끝에 어렵사리 인터뷰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점심까지 거른 채 무려 4시간이나 기다린 저에게 상담원은 “건강보험 증명서를 다시 만들어 오라”고 한마디 던진 후 ‘다음 사람’을 호명했습니다. 학생(etudiant)용 건강보험은 안되고, 방문자(visiteur)용 보험이라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프랑스의 보험회사는 학생용 보험과 일반인용 보험을 따로 판매하며 일반인용 보험료가 3배가량 비싸다).
“나는 현재 소르본 대학의 학생신분이다. 학생증도 여기 있다””고 항변해보았지만, 상담원은 “당신 비자에 ‘학생’이 아니라 ‘방문자’라고 돼있다”며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3개월 뒤에 다시 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파리 경시청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통해 몇 번이나 필요서류를 확인하고 챙겨왔기 때문에 황당하고 분통이 터졌습니다. 하지만, 칼자루 쥔 쪽은 그 쪽이고, 체류증이 아쉬운 것 내 쪽이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3개월이 지난 뒤 나는 다시 파리 경시청에 갔습니다. 이번엔 물론 ‘방문자용 건강보험 가입증’을 준비해갔습니다. 남은 연수기간이 4개월밖에 안돼 보험가입기간을 4개월로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상담원은 “왜 4개월짜리냐. 원래 1년짜리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고 또 딴지를 걸었습니다. 또다시 3개월 전 악몽이 떠오른 나는 할 말은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나는 한국의 기자인데, 1년짜리 유급휴가를 받아 프랑스에 왔다. 4개월 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왜 1년짜리 보험에 가입해야 하느냐”
‘기자’라는 말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내가 열을 받았다는 걸 감지한 탓인지 상담원은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파리에서 뭘 하고 지내느냐. 학생증 좀 보자, 나중에 특파원으로 다시 올 수도 있느냐”는 등등의 질문을 던지고는 “9월 말까지 체류할 수 있는 5개월짜리 체류증을 줄 수는 있는데 괜찮으냐”면서 마치 특별히 사정을 봐준다는 듯 아내와 나의 ‘시한부 체류증’을 발급해 주었습니다.
파리에서 알게 된 주위 사람들은 체류증이 없어도 출국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에 굳이 600유로(한화 약 85만원)의 거금을 주고 건강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지만, 명색이 현직 신문기자인데 불법체류자가 되긴 싫어 비싼 건강보험에 가입한 터였습니다. 그런데 상담원은 “내가 봐줘서 너희 부부는 400유로 이상의 돈을 절약할 수 있게 됐다(1년짜리가 아닌 4개월짜리 보험료가 그만큼 싸기 때문)”고 잔뜩 생색을 냈습니다.
체류증 얘기가 장황해졌지만, 체류증을 둘러싼 외국인들의 애환은 책으로 묶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실제로, 체류증을 받지 못해 중도귀국하는 한국유학생들이 적지 않습니다. 관광객이 아닌 외국인은 무조건 ‘불법체류 혐의자’로 간주하려는 프랑스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이면에는 ‘인종차별’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몇 달 전 프랑스에선 ‘스타 아카데미’라는 TV프로그램이 대중들로부터 폭발적 인기를 누렸습니다. 채널 1번, TF1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인데 아마추어 가수지망생을 공모해 공개경쟁을 통해 예비스타를 뽑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수천명의 후보군 중에서 10명을 선발한 뒤, 시청자 인기투표(전화투표)를 통해 매주 1명씩 탈락시켜 최종 승자 1명을 선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시청자로 하여금 예비스타를 내 손으로 뽑는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점, 후보자들끼리 벌이는 치열한 신경전과 희비의 순간을 가감 없이 생방송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어필해 매주 시청률 1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공정하게 실력대로 뽑는 듯 하던 프랑스 시청자들은 최종적으로 4명이 남았을 때부터 노골적으로 ‘국수주의’적 경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최종 생존자 4명중 유일한 프랑스 여성을 노골적으로 편애하기 시작하더니, “실력이 제일 뒤떨어진다”는 심사위원들의 혹평에는 아랑곳 없이 벨기에, 모로코, 폴란드 출신 후보를 매주 한명씩 떨어뜨려 결국 자국민 여성을 1위로 뽑고야 말았습니다. 어이가 없어 몇몇 프랑스 사람들에게 “해도 너무 한거 아니냐”고 물어보니까 “노래실력은 조금 뒤지지만, 얼굴은 제일 예쁘지 않았냐”며 억지를 썼습니다. 엘로디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몇 달 뒤 유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세계 각국의 1등끼리 경합한 ‘월드 베스트’라는 프로그램에서 ‘별 볼 일 없는 노래실력’으로 세계 1위를 차지했습니다. 주최측(이 프로그램 역시 프랑스의 TF1이 주관) 프리미엄이 작용한 게 분명했습니다.
이같은 국수주의적 경향은 지난 3월 프랑스 지방선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파 후보들은 점증하는 아랍계 이민자들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거부감을 자극하는 것을 주요한 선거전략의 하나로 활용했습니다. 일 드 프랑스(우리나라의 경기도에 해당) 지역에서 나온 한 우파 후보는 “프랑스가 더 이상 이슬람화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노골적인 인종차별 메시지를 선거구호로 내걸어 제 눈을 의심케 했습니다.
프랑스 국민들의 ‘우리 것이 제일 좋고, 우리 것을 고수해야 한다’는 식의 배타적 애국심은 외국인들을 질리게 만듭니다. 소르본에서 같이 강의를 듣는 외국 학생들은 한결같이 “프랑스는 좋은데, 프랑스 사람들은 싫다”고 말합니다.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사회제도가 초기정착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주택임대 희망자 중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주인으로부터 주택임대를 거절당한 일, 차를 빌리러 렌터카 회사를 찾았다가 “운전은 머리로 하는 것이다. 오토매틱 차량은 머리 나쁜 미국인들이나 찾는 차라서 우리는 한 대도 없다”며 무안을 당한 일, 가구점에서 아이 침대를 주문했는데, 엄청난 배달료(66유로)를 받고도 열흘 뒤에나 배달해 주는 바람에 아이를 한참 동안 카펫 바닥에서 재운 일 등등….프랑스식 사회시스템과 프랑스인의 사고방식에 미처 적응을 못해 애를 먹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파트 관리인, 슈퍼마켓 점원, 유치원 교사 등 일상에서 접하는 프랑스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친절해 프랑스 국민 일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알쏭달쏭하기만 한 프랑스인의 코드를 해독하는 일은 저뿐 아니라 재불 외국인들에게 공통의 고민거리인 모양입니다. 파리에서 18년을 살았다는 한 미국여성이 쓴 프랑스 국민성 분석서 ‘FRENCH OR FOE?(프랑스 사람이냐 적이냐?)라는 책은 재불 외국인 사회에서 14만부이상 팔리며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조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처음 만나는 프랑스인에게 절대 미소를 보이지 마라. 자기를 놀리는 걸로 생각하거나 위선자 또는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여자인 경우 같이 자고 싶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부분부분 과장과 비약이 없진 않지만, 프랑스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9개월 가량 프랑스에 살면서 제가 갖게 된 생각은 프랑스 사람들이 친절하긴 하지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아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한불 간 문화 현안인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이 8년 이상 끌며 지지부진한 것도 프랑스인에 대한 코드해독이 부실한 탓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양국 대통령(김영삼-미테랑 대통령)이 도서반환에 합의했음에도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프랑스도서관 사서들이 파업까지 벌이며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일이 꼬여버렸습니다. 매사에 정치적 해결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여기 와서 살면서 프랑스에선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프랑스의 관공서나 금융기관 등에서는 실무자가 노(No)한 사안은 상급자도 절대 번복할 수 없습니다. 서비스가 불만이라고 “당신 보스 불러!”라고 했다간 무안만 당할 확률이 100%입니다. 이런 경우 실무자를 붙들고 차근차근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소연하는 것이 훨씬 더 잘 먹힙니다.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문제 역시 정부간 외교적 협상채널에 집착할 게 아니라 국내 전문가 다수를 프랑스에 파견해 TV토론회나 공청회에 출연시켜 고문서 반환의 당위를 설명하면서 프랑스 국민들을 직접 설득했으면 문제가 훨씬 쉽게 풀렸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일부 인종차별주의자도 있지만, 프랑스 국민 대다수는 전문가의 논리정연한 반대논리에 대해선 항상 마음을 열고 들어줄 자세가 돼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프랑스의 경우 약탈문화재를 특별법까지 만들어 원래 소유국에 되돌려준 사례가 적지 않음)
남은 연수기간 동안 프랑스 사회의 코드 해독에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일 지 자신할 순 없지만, 이곳 사람들과 부대끼는 기회를 잘 활용해 미로의 출구 쪽에 좀 더 근접해 보고자 하는 게 프랑스 연수자로서의 제 바램입니다.
김홍수(조선일보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