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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가지’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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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가지’를 보고

16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매형은 할 줄 아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레슬링을 했던 매형은 미국 애들이 영어로 말을 걸면 단 한 문장만 반복했다.
“Will you fight?(싸울래?)”
그리고 매형은 실제로 그들과 싸웠다. 1992년 LA 폭동 당시 만 20살이던 매형은 폭도들이 한인가게만 골라 털고, 경찰들이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보고 총을 들었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1년 온다고 할 때 누구보다 기뻐했고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던 매형은 우리가 도착하기 한 달 전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반백년도 채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매형에 대해 한인 신문은 LA한인회 초대 청년단장의 부고기사에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썼다.

매형을 다시 떠올린 것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본 연극 때문이다. 필자가 연수 중인 UC Irvine 로스쿨의 ‘Korea law center’는 2019년 11월 방문학자들을 초청해 연극 ‘가지(Auberrgine)’를 보는 문화행사를 개최했다.

‘가지’는 한인 2세인 줄리아 조씨가 극본을 쓴 영어 연극이다. 한인 극본가와 미국 연출가(리사 피터슨)가 함께 만든 이 연극은 요리사 아들 레이(진 김씨 분)가 죽음을 앞두고 의식불명에 빠진 아버지를 위해 ‘자라탕’을 요리해 마지막 식사를 대접하려 하지만 끝내 먹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내용이다. 아들이 요리사가 되는 것을 싫어해 갈등을 빚었던 아버지의 시신은 사망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달려온 삼촌(브루스 백씨)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아버지를 고국으로 보내면서 아들은 아버지를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게 된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세 단어는 음식, 사랑, 죽음이다. 우리는 먹고 사랑하다 죽는다. 이 명확한 사실은 고국을 떠나 사는 한인들에게도 같다. 하지만 그들에게 음식은 그리움의 빛을 띠고 있다. 아들인 레이가 아버지를 위해 만들려 한 자라탕의 근원은 고국이었다.

한인 2세로서 30년 동안 노골적이거나 혹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었던 매형에게 ‘자라탕’은 만두였다. 매형은 살아생전 한국에 방문을 하면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명인만두 가게를 찾아갔다. 만두를 좋아했던 매형은 열판 가까이 만두를 먹은 뒤에야 고국에 온 걸 실감한다고 했다. 지금도 만두를 보면 매형의 둥글둥글한 얼굴이 떠오른다.

사진 1미주 중앙일보의 매형 부고기사. 내가 썼다면 살아 생전 고국의 만두를 그리워했다는 내용을 넣었을 것 같다.

제목인 ‘가지’는 아버지를 돌보는 호스피스 루시앙의 독백에서 내용이 나온다. 프랑스계 미국인인 루시앙은 야채 가지가 미국식 표현인 ‘egg plant’가 아닌 프랑스식 표현인 ‘Aubergine’으로 불러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어릴 적 어머니가 해줬던 가지 스프의 잊을 수 없는 맛이 떠오른다고 했다.
이 연극 극본가인 줄리아 조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제목 Aubergine는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임시로 붙여놓은 제목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글 가지는 내게 뿌리라는 단어와 이어졌다. 고국이라는 뿌리에서 멀리 떨어져 살지만 뿌리로부터 물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는 가지. 야채 가지가 아닌 나무의 가지가 이 연극과 더욱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매형에게 뿌리에서 오는 자양분은 만두가 아니었을까).

연극이 끝난 뒤엔 korea law center 김성은 교수님과 함께 연극 주연배우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인들이 주연을 맡은 이 연극은 절반은 영어, 절반은 한국어로 이뤄졌다. 관객의 절반정도가 미국인이었는데 한국에서 온 삼촌은 극중 내내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하고, 이는 영어 자막으로 풀어졌다. 한인 2세인 주연배우들 역시 영어가 더욱 편하지만 이 연극을 위해 사투리를 열심히 배웠다고 했다. 사투리 공부하느라 힘들었다고 토로하는 그들의 서툰 한국말이 그 어느 때보다 듣기 좋았다.

사진 2연극 공연을 마친 뒤 주연 배우들과 사진을 찍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UCI Korea law center 김성은 교수. 오른쪽에서 세 번째 서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가 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