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를 준비하는 이들을 위해

<슈퍼마켓에서>
(여 점원) “옥수수가 모두 몇 개죠?”
(나) “저, 동전 없는데요”
(여 점원) “아뇨, 그게 아니라 옥수수가 모두 몇 개냐구요?”
(나) “주머니를 살펴보니, 동전이 몇 개 있군요”
(여 점원) 짧은 한숨과 함께 비닐백에 들어있는 옥수수를 직접 새고 만다.

재단으로부터 ‘해외연수기’ 부탁을 쉽게 응낙한 뒤, 마치 중간고사를 앞둔 수험생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남들처럼 멋진 해외연수기를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지난 3달간의 연수기간은 위의 에피소드처럼 온통 크고작은 좌충우돌과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을 뿐, 아직까지는(not yet) 무엇 하나, 제대로 내세울만 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수를 준비하는 이들을 위해 저의 지난 3달을 소개할까 합니다.

## 미시간의 첫날 밤
6월23일, 아내와 딸 아이를 데리고 시카고행 비행기에 올라 13시간의 비행 끝에 미국 미시간주 랜싱에 도착했습니다. 1년간 지내게 될 미국은 먼저 강렬한 여름햇살로 우리 가족을 환영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시카고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고 랜싱 공항에 도착하면서부터 덜거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불과 옷가지, 며칠간 먹을 음식 등이 들어있는 짐이 도착하지 않았고, 전화도 인터넷도, 텔레비전도 없는 텅빈 아파트에서 무엇부터 해야할 지 막막했습니다.
저녁은 이웃 아파트에 있는 생면부지의 한국인 부부가 가져다준 카레라이스로 때우고, 맨 바닥에 수건 등을 깔고 잠을 청했습니다. 공중전화라도 하려고 밤 10시께 밖으로 나가 봤으나, 아파트 바깥은 황량한 벌판으로 공중전화는 찾을 수가 없었었습니다. 일교차가 심한데다 때마침 제트 기류가 엄습해 밤기온이 섭씨 10도 가까이 떨어져 딸아이를 우리 부부 사이에 눕히고 서로 꼭 껴안고 자야만 했습니다.
환상적인 외국생활을 꿈꾸며 비행기 안에서 조금 들떠 있었던 아내는 아이가 감기에 걸릴까 노심초사하며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습니다. 행복한 투정이라고 하실진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꿈꾸었던 건 이런 게 아닌데…’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렇게 연수 첫날 밤을 보냈습니다.

## Shopping, Shopping
다음 날부터 텅빈 아파트를 채우는 일이 시작됐습니다.
1년 정도의 연수를 준비하는 이들이 세간살이를 구입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에서 모두 가져간다.
둘째, 연수가 끝나가는 사람과 연락해 그집의 세간살이를 몽땅 물려받는다.
셋째, 현지에서 하나씩 구입한다.

3가지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첫번째 경우는 대개 한국에 있는 집을 팔아 어차피 세간살이를 어딘가에 보관하지 않으면 안될 사람들이 많이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이 방법을 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며가며 운송비가 만만챦고(편도에 200만원 이상 들어간다고 보면 됩니다), 전자제품의 경우 전압이 달라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압기(4만원 정도)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불편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두번째 경우는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방법입니다.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시간과 번거로움을 크게 덜 수 있습니다. 아예 그 집으로 들어갈 경우, 인터넷, 전화 연결 등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시기를 맞추기가 어려워 마땅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고, 하자가 있어도 불평을 할 수 없다는 점은 미리 염두에 둬야 합니다.

저는 세번째 경우였습니다.
현지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방법도 몇 가지로 세분화됩니다.
1) 인터넷을 통해 한국인 연수생, 학생들에게 구입
2) 게러지(Garage) 세일 돌아다니기
3) 중고 가게에서 구입

이 3가지 방법 중, 좋은 물건을 가장 값싸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게러지 세일’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게러지 세일’이란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더이상 쓰지 않는 물건을 주말을 이용해 싼 값에 파는 것을 말합니다. 지방신문 목~금요일자를 보면 게러지 세일 광고가 즐비하게 실려있어 그 주소로 찾아가면 됩니다.
지금 저희 집의 안락의자, 커피테이블, 비디오 플레이어, 가습기, 공기청정기, 커피메이커, 정수기, 주방용품, 옷가지 등이 모두 게러지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대개 1~20달러 선입니다. 이를 통해 외국인들의 집과 생활을 엿볼 수 있고, 초기에 길을 익히는 데도 많은 도움이 돼 처음 몇 주 동안은 주말 가족소풍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들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부피가 큰 물건은 운반에 어려움이 있고, 당장 필요한 물건들이 언제 나올 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게러지 세일의 약점입니다.(만일 게러지 세일에 맘에 드는 물건이 있는데, 옮길 방법이 없다면 주인에게 부탁해보십시오. 미국인들은 대개 승용차 외에 밴이나 픽업을 갖고 있고, 말만 잘하면 별도의 운반비를 받지 않고 옮겨줄 지도 모릅니다)
저는 부피가 큰 물품은 중고 가구점을 이용했습니다. 침대틀, 책상, 식탁, 소파 등입니다. 게러지 세일에 비해 조금 비싼 게 흠이지만,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운반이 편리합니다.

한국인들에게 구입하는 것도 한 방법인데,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자면 가격이 비싸고, 질이 떨어지는 게 흠이라고 합니다.

## 아, 인터넷
미국 초기 정착과정에서 가장 번거로운 게 운전면허 등 자동차에 관련된 것과 인터넷, 전화, 케이블 텔레비전 등 정보통신 관련 사항입니다.
저는 인터넷 설치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도착 다음 날, 곧바로 SBC의 야후 ADSL을 신청했는데, 20일 뒤에 연결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일 쯤 지나 소포가 왔는데, 인터넷 모뎀 관련 기기 뭉치였습니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은 한국과 달리 모든 것을 고객이 직접 연결하는 시스템입니다. ‘기계치’에 가까운데다 한 번도 그러한 작업을 해본 적이 없는 저는 겁부터 더럭 났습니다. 이러저리 선을 끼우고, 배달된 포맷 CD로 연결작업을 시도했으나, 계속 중간에서 끊어지곤 했습니다. 문제는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SBC로 전화를 걸었으나, 이게 또 한번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미국의 고객응대 전화는 대부분 자동응답 시스템입니다.
마치 미로찾기를 하듯 각 단계마다 내게 맞는 분야를 찾아가야 하는데, 대개 7~8개의 과정을 거쳐야만 그때서야 ‘기계’가 아닌 ‘사람’과의 통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통화 직전에 도달하고서도 대부분 ‘지금 모든 상담원이 통화중이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는 내용이 계속 반복되다 ‘나중에 다시 걸어달라’며 뚝 끊어지기가 일쑤입니다.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해 천신만고 끝에 ‘사람’과의 통화에 성공하더라도 ‘정확한 담당자가 지금 없으니, 다시 한 번 걸어달라’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1주일 가까이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저는 거의 홧병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영어가 짧지만, 워낙 전화를 많이 건 통에 나중에는 할 말을 줄줄 외울 정도였고, 통화량이 많은 시간을 피하느라 새벽 2시에도 전화를 걸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물론 영어로) 어필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고객이 아무리 악을 써도 절대로 사람은 오지 않습니다. 모든 걸 그저 전화로 다 해결하려 합니다.
저는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해봤다. 그래도 연결이 안 된다. 집으로 와서 직접 체크를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답은 ‘만일 집으로 갈 경우, 100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만일 인터넷망이 아닌 컴퓨터에 문제가 있어 연결을 못 시키거나, 원인을 찾지 못할 경우라도 지불해야 한다’였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컴퓨터를 갖고 고객센터로 직접 가면 어떻겠느냐’고 문의했으나, 답은 ‘그것은 불가능하다. 고객이 우리 센터로 오는 것은 보안문제를 이유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 회사 규정이다’라는 말만 들어야 했습니다.
거의 보름 가량을 SBC와 입씨름을 하다,(이 덕택에 초기 스피킹 훈련이 많이 됐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서불안과 수면부족을 그 대가로 바쳐야 했습니다) ‘취소’를 결정했습니다.
배달받은 기기를 주섬주섬 싸서 페덱스에 가서 반송하면서 편지까지 써넣었습니다. ‘나는 당신네 서비스에 실망했다. 내 인생에서 당신네 회사를 알게 된 것을 후회한다’ 는 등의 내용을…
그러나 역시 답장은 없었습니다. 저는 4차례의 편지와 3차례의 이메일을 보냈지만, 딱 1번 답장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이메일을 처리하는 부서가 아니니, 다른 곳으로 다시 보내달라’는.

케이블로 인터넷망을 연결해 한시름을 던 뒤, 저는 또한번 경악했습니다.
SBC가 저에게 한 달치 인터넷 사용료와 설치비 등등 모두 89달러에 이르는 청구서를 내놓았습니다. 게다가 자동응답 전화의 지시에 맞춰 ‘취소’를 한 뒤에도 ‘취소’에 대한 확답을 전혀 받은 바가 없어(이런 게 미국 회사의 소비자 서비스입니다) 앞으로 계속 이런 청구서가 날아올까봐도 걱정됐습니다.
한 달만에 또한번 악몽이 반복됐습니다. ‘내가 왜 돈을 내야 하느냐? 나는 당신네 서비스를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고, 사용할 수도 없었다’라고.
돌아온 대답은 ‘일단 한 달치 사용료를 받은 뒤, 나중에 환불해 주는 방식이 우리 회사의 규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한국과 다른 방식입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대부분의 미국 정보통신 관련 회사가 이런 요금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케이블 텔레비전의 경우도 그달 1일, 한 달치를 미리 다 받고, 이사 등으로 중간에 선을 끊을 경우, 일정분을 환불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거의 절규에 가까울 정도로 어필을 했으나, 기어이 50달러 가량의 설치비와 1주일 사용료(?)는 환불받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소비자 천국이라고 말하지만, 슈퍼마켓 등에서 환불(REFUND)이 잘 된다는 것(요즘은 한국의 백화점, 할인점 등에서도 미국만큼 환불이 잘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외에는 오히려 한국의 서비스가 그리웠던 게 저의 아픈 경험이었습니다.

## English, 넘지 못할 산이여!
한국을 떠나면서, ‘영어 하나만 제대로 해도 큰 수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3달간의 짧은 경험에 비춰보자면, 언어란 역시 ‘밑빠지 독에 물붓기’라는 지난한 작업을 계속 되풀이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 미시간주립대에서 하는 정규 수업 이외에 인근의 랜싱커뮤니티 컬리지에서 하는 영어 수업을 1과목 신청해서 들었습니다. 일본, 중국, 태국, 베네주엘라, 아르헨티나,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한국인이 제일 많습니다)과 함께 수업을 들으며 수다를 떠는 것이 때론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수강생이 너무 많아 효과적인 영어능력 향상은 크게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2달이 지나도 큰 진보를 느끼지 못한 저는 튜터를 구할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만만치 않은 생활비 탓에 아직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외국인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 등 수업 이외에 그들의 생활과 삶 속으로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클래스나 모임 등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시간주립대 근처에 혼자 사는, 전직 중고교 영어교사인 한 할머니를 알게 돼 1주일에 한 번씩 할머니 집으로 찾아가 무료로 영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 선거, 미국에 대한 인상, 그리고 제가 생활하면서 부딪치는 문제 등 제가 이것저것 지껄이면 할머니는 간간이 저의 틀린 표현을 고쳐주기도 합니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적적하던 터에 좋은 말벗이 생긴 셈이기도 합니다.
한국 학생들의 경우, 유학생활을 몇 년씩 한 학생들도 스피킹에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흔치 않은 것을 보면서 때로 답답함을 느끼곤 합니다.
특히, 영어 학습에서 어려운 점은 이들의 문화와 연일 생겨나는 새로운 표현들을 따라잡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TV 드라마 등을 볼 때, 특히 그런 느낌을 많이 받는데 어떨 때는 대화 내용 중 모르는 단어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문장의 뜻을 잘 이해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코미디물에서는 리스닝이 제대로 되긴 했지만, 그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왜 웃는 지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습니다. 미국인들의 요즘 생활언어와 젊은이들의 표현법 등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실 영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또다른 장애물인 셈입니다.
연수 1년을 끝마친 뒤에도 영어능력이 크게 향상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해오지만, 요즘에는 ‘영어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합니다.
이렇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그리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공부하는 이 과정을(비록 기대를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껏 즐기고 있습니다. 아직도 신기해 하면서…

## 가족, 축복스런 짐
연수를 떠나기 전, 제 아내의 소박한 꿈은 휴일날 먹을 것 싸들고 공원에 나가 따스한 햇살 아래 온가족이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기자들도 대부분 그러했겠지만, 일이 최우선이었고, 가족은 늘 맨 뒷자리였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내는 그 꿈을 이뤘습니다.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한 최근 직전까지 공원에 나가 고기를 구워먹는 등 간단한 소풍을 평일 저녁에도 간간이 갖곤 했습니다. 저도 그동안의 빚을 조금이라도 덜어보자는 생각인데다, 정착 초기에는 한국에서라면 아내가 혼자서 처리했을 쇼핑이나 공과금 납부, 행정처리 등 하나부터 열까지 부부가 함께 다니며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학이 되면서 공부와 가족과의 시간이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하루 일과는 아침에 딸아이를 차로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또 제가 차를 갖고 가는 덕분에 집으로 올 때 장보기는 제 차지입니다. 이밖에 1주일에 2번씩 교회에서 하는 아내의 영어회화 수업 시간에 아내를 데려다 주기 위해 제가 듣는 수업 1과목을 변경하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아이의 숙제를 봐줘야 하고, 주말에는 차를 타고 20~30분씩 달려 근교 할인점에 쇼핑을 하러 다녀야 합니다. 곧 겨울이 되면 아이의 등교 뿐 아니라 하교까지 책임져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저의 오후 수업을 또 어떻게 해야할 지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또 2학기 때는 이곳의 신문사에 짧은 기간이지만, 인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직접 현장과 부딪쳐 보고, 또 이곳저곳 출장도 갈 계획입니다만, 이것 역시 자동차 문제와 결부돼 제가 며칠씩 집을 비울 수 있을 지 걱정입니다.
그동안 아내가 제게 해줬던 것에 비하면, 견줄 수도 없는 것이고 게다가 저 또한 기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하고 있습니다만, 때론 저를 이곳에 보내준 재단과 또 저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을 제 동료들을 생각하면 알듯모를듯한 죄책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재단이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는 기자로서의 역량을 하나라도 더 키워, 한국언론 발전에 조금이라도 더 이바지하라는 것이었지, 가족들을 돌보라는 것이 아닌 게 아닌가하는…(물론 가정의 화평이 일터의 화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핑계를 찾아봅니다만)
부부가 늘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으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사소한 일에도 언성을 높이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싸움을 피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했습니다. 한 걸음씩만 양보하는 것, 조금씩만 내가 손해보는 것, 내가 좀더 피곤하고 귀찮아지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는…
재단의 언론인 해외연수는 기자로서의 역량 강화 뿐 아니라 늘 어린애같은 성마른 기자를 조금이나마 철들게 하고, 가정을 지켜주는 데도 큰 몫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 미시간 북쪽으로 2박3일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가며 오며 5대호 가운데 휴런, 슈피리어, 미시간호 등 3곳을 모두 돌아봤고, 끝없이 이어지는 단풍 숲에 눈이 멀 지경이었습니다. 1시간을 달려도 차 한 대 마주치지 않는 한적함도 한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신기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동차 바깥의 그러한 요지경보다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와 아이가 모두 잠에 빠져 숨소리만 들리는 그 고요한 가운데 저 혼자 밤길에 차를 몰고 있을 때, 제 마음 속에 밀려오는 평화로움은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행복이었습니다.

영어, 연수주제 연구, 그리고 가족. 어느 것 하나 간단치 않은 것입니다만, 이 귀한 기회를 허락해준 재단과 이사님들, 그리고 모든 분들께서 저에게 쏟는 애정과 기대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을 지금도 계속 찾아가고 있습니다.
다음번 연수기에는 좀더 나은 진보가 있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한겨레 권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