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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생활 꼼꼼히 준비하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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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동아일보 윤희상입니다. 너무 오랫만에 뵙는 거 같습니다. 지난 번까지는 연수신청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신청할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미국 학교에서 친구사귀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제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이뤄진 것이므로 일반화하는 데는 무척 어려움이 있겠습니다만 혹시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데비(Debbie)를 처음 만난 것은 낯설고 사람설은 대학원생 첫 상견례 시간이었습니다. 다들 미국 애들 처럼 생겼는데 미국 아이 치고는 ‘허겁지겁’형으로 생겼고 나이도 꽤 들어 보이는 여자 하나가 자기 소개를 하는데 “뭐, 나 시카고 사람, 이곳 수도권에 박사과정 하러 왔는데 다들 좀 잘 지내자구요”하는 식이었어요.

행색을 보아하니 학교 근처에 사는 것이 틀림없었어요. 왜냐면 머리를 감고나서 말리지도 못하고 온 뭐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행사장에 온 박사과정 학생은 데비하고 저 뿐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밖에서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나이가 좀 많아서 (공부하기가) 두렵다”는 저에게 그는 “늬 나이가 뭐가 많아.

난 12월이면 마흔 넷이야”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데비는 과학전문 프리랜서입니다. 시카고 트리뷴,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지에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죠.

데비는 지금도 일을 겸하면서 공부를 하는 예컨대 ‘주경야독’스타일입니다.

데비는 수업시간에 좀 산만한 편입니다. 미국교수들이 지독하게

싫어하는 10분 지각을 밥먹듯이 하고, 비록 좀 일찍 도착했다고 하더라도 꼭 책과 노트를 강의실에 놔둔채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어쨌든 제시간에 오질 않습니다.

그 뿐입니까. 늦게 도착하면서 “Sorry, I’m being late.”라고 한마디 한 뒤 자리에 앉습니다. 교수가 끊어졌던 강의를 계속할 즈음, 어김없이 그는 일어섭니다. 소다를 사러가는 것이죠. 캔에 담긴 자판기 콜라는 60센트(약 720원)입니다. 데비는 3시간 수업 도중 ‘diet 콜라’를 꼭 2개씩은 마셔야 합니다. 물론 동전은 늘 충분하게 갖고 다니는 눈치입니다.

데비가 다이어트 콜라를 고수하는 이유는 지방성분이 빠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데비는 75Kg은 족히 돼 보입니다.(만약 이 사실을 데비에게 고자질하는 분이 계시면 3대가 재수없을 줄 아십시오. 정말 큰일 납니다.)

수업중 데비는 가만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활발하게 질문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긴 것은 기다고 하고, 예도 잘 듭니다. 그러나 약간 형이상학적인 수업, 이를테면 커뮤니케이션 이론(정말 장난치려고 어렵게 써놓은 것같은 article들이 종횡무진하는 과목)시간이나, 질적 조사방법론 등 시간에는 꼭 사고가 납니다.

데비는 늘 엉뚱하고 현재 다루고 있는 주제와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를 꺼내면서 교수에게 마구 공격적인 질문을 해댑니다.

이쯤 되면 참을성 많은 교수가 한마디 합니다. “So what? What’s your point?”하거나 “Oh,Debbie! What’s your theory? Could you give me an example of it?” 이러는 거죠.

데비는 맹렬하게 공격도 잘하지만 금방 자신의 야마(일본말 써서 죄송함다)없음을 깨닫는지 못깨닫는지, “OK,then….” 이러면서 물러서기도 잘 합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미 민주당에 가깝고, 유태인이면서도 중동사람들에게 상당히 동조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데비는 자기 리서치도 바쁜데 제가 알고 싶어하는 분야에 관한 아티클을 어디서라도 발견하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복사해서 갖다줍니다. 저는 처음에는 데비가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데비는 남편하고 헤어진 뒤 학교 부근 대학원생 아파트에서 혼자(사실은 길에서 주운=자신은 불쌍한 어린 것들을 자신에게 돌보라는 계시로 알고 데려왔다지만 중개 만한 고양이 두마리와 함께 살고 있음)사는 이혼녀이지만 저야말로 저만 바라보고 미국까지 함께 온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사람이잖습니까.

아는 한국 유학생들이 저에게 드러내놓고 “애인으로 사귀느냐”고 짓궂게 물어올 때면 농담마라고 해줬지만 제가 생각해도 정말 튀는 미국사람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데비는 자기 press card(기자증) 유효기간이 끝나기 전에 꼭 데리고 갈 데가 있다면서 하루는 화요일날 시간을 내라고 했습니다. 알고보니 워싱턴에 있는 미 상하원 탐방이었습니다. 데비는 “당신 기자증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비경찰의 말에 “2주일이나 남았다”고 받아치는 기자다운 기자입니다.

데비는 상원기자실과 붙어 있는 공보실(상원 본회의장과 문하나로 통하게 돼 있음) 에서 다짜고짜 저더러 소파에 앉으라는 것입니다.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는 것이죠. 저는 아무래도 뒷골이 당기길래 “저 공보실 사람에게 물어보고 찍자”고 했죠.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어서 소파에 앉아서 자기 렌즈를 쳐다보라는 것이었죠. 그때 아니나다를까 여자 공보계원이 “안됩니다”였습니다. 그 때 빠알간 색 정장차림의 데비는 육중하게 몸을 움직여 그 사람에게 가더니 “이 사람은 한국에서 왔는데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이 사람에게 이 사진을 찍어주면 나중에 한미관계(?)에 관한 중요한 저서에 꼭 넣으려는 것이니까 말리지 말라”라는 취지로 허풍을 떨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데비는 “그럼 한 커트만 찍으라”는 그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세 커트를 촬영했습니다. 그날 언제, 어느 틈에 샀는지 미 의사당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가운데 꽂을 수 있는 간이 사진틀에 끼워서 제가 그 사진을 받은 것은 다음 주 월요일이었습니다.

데비는 결국 지난 학기 제 기말 페이퍼 3개를 모두 proofreading+ copy editing 해줬습니다. 저는 데비가 자신도 써야할 페이퍼를 젖혀 둔 채 제 페이퍼를 보고 손질하느라 꼬박 사흘을 고생한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는 스트레이트 A를 받을 수 있었지만 저는 아직까지 데비의 지난학기 성적을 물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데비도 성깔이 있는 친구라 건드리지 못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같습니다. 그러나 데비의 표정을 보아하니 분명히 세과목 가운데 B가 최소한 하나는 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죠.

데비는 조교지만 저는 납부금을 전액 내는 ‘부자학생’입니다. 따라서 저에게는 조교실의 컴퓨터를 쓸 자격이 없지요. 근데 이 문제도 데비가 제기해서 지도교수를 통해 어렵사리 출입 열쇠를 받게 됐고 데비 책상에서 필요할 때면 인터넷도 하고 워드로 문서도 작성하고 그러죠. 뭐네뭐네 해도 저는 집이 학교에서 멀기 때문에 그저 급한 프린트물 있을 때는 데비가 고맙기만 하죠

나의 든든한 원군, 미국에서 사귄 거의 유일한 친구, 데비가 이번 학기에는 제 학교에서 차로 30분은 가야하는 Howard University로 Qualitative Research Design 과목을 들으러 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 밖에 만나지 못합니다.

그럴 뿐 아니라 이번 학기 한 과목 첫시간이 지난 뒤 데비는 엄청난 선언을 했습니다. “희상, 이번 학기엔 늬 페이퍼 못 봐줘. 나 너무 바빠서..” 아, 이런 청천벽력이 있나.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페이퍼를 낸 뒤에는 전화 한 번도 안한 저니까 징계를 받을 만 합니다. 그래서 한 2주일 인가를 약간 냉랭하게 보냈습니다.

어느 날 데비는 칠판에 자신의 새로운 aol.com 이메일 주소를 쓴 뒤 누구든지 자신에게 이메일을 하려면 새 주소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흘 쯤 뒤 저는 다섯줄 정도의 메일을 보냈습니다.

“데비, 너 이메일 주소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려고 메일한다. 이번 학기는 어때? 하워드대학은? 건강해라…희상”

데비의 답장은 이튿날 아침에 왔습니다. 한 100줄 됩니다. 곧바로 답장하라는 당부와 함께… 근데 저는 또 기회를 놓친 거 같습니다. 이 답장을 못하고 클래스에서 데비를 만나고 말았거든요. 저는 데비가 하루빨리 근사한 남자친구나 아니면 남편을 만나기를 빌고 있습니다.

데비는 요즘 대학원 학생대표가 되겠다고 출마했습니다. 이곳에서 대학원생 대표는 막강합니다. 교수 신규채용 때는 한사람의 면접관으로서 단독 면접을 하는 등 대단합니다. 저는 데비가 자기 이름을 이미 써 넣은 투표용지 그 이름 옆에 ‘OK’라고 써 주기만 해서 지지표를 던졌지만,지금 추세라면 아마 당선할 겁니다.

내가 “늬가 그거 되면 뭐 좋은 일 있냐”고 물었더니 데비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너나나나 지긋지긋해 하는 Quantitative Research Methods(통계학을 응용하는 조사방법론으로 담당교수가 하도 독종으로 소문 나 전반적으로 인기가 없는 과목)를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바꿔줄 께.”

그러면 뭘해. 나는 이미 시달릴만큼 시달리고 있는데….

하지만 데비, 화이팅. 미국식으로 Debbie, Go,Go,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