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는 역시 애증의 관계다. 영국에 올 때도 토익은 간신히 950점을 맞았지만, 대학원 입시에 필요한 IELTS라는 생소한 시험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시험을 봤는데 전체 평점과 듣기, 말하기, 읽기는 모두 기준을 넘겼지만 쓰기가 0.5점 모자랐다. 영어로 작문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보니 단기간에 점수 높이기가 쉽지 않았다. 시험을 한두번 더 보면 될 것 같았지만, 응시 비용(33만원)이 만만치않고 출국 시점도 얼마 남지않아 대학에서 제공하는 pre-session 과정을 듣는 것으로 갈음했다. 대신 출근길에는 팟캐스트로 BBC 뉴스를 들으며 현지 영어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해외에서 학위 과정을 하는 것이 처음이라 살짝 걱정도 했는데, 막상 영국에 와보니 수업을 이해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교수들의 정직하고, 한 템포 느린듯한 영국식 발음이 또렷해 이해하기가 쉬웠다. 여기에선 영어를 할 때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그리고 정확히 발음하려고 노력하는데, 마음도 의사소통도 한결 더 편해진 것 같다. 아마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식 영어보다 영국식 영어를 더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장 먼저 ‘버터 발음’부터 지웠다. ‘워러’ 대신 ‘워터’를 여러 번 쓰다보니 어렵지 않게 입에 붙었다. 늘 혀 굴리느라 힘들었던 ‘R’ 발음도 영국에선 아예 발음하지 않거나, 길게 ‘아’ 하는 식으로 단조롭게 처리했다. here를 미국에선 ‘히얼’이라고 한다면, 영국은 ‘히아’ 정도로 내뱉는 식이다. garden도 ‘가아든’, party도 ‘파아티’라고 말하니 속이 다 편했다. dance는 ‘단스’, ask는 ‘아스크’, pass는 ‘파스’로 읽는다.
철자가 다른 것도 신경써야 한다. IELTS에서도 영국식 철자를 따르지 않으면 가차없이 틀린 것으로 처리된다. 석사 학위 논문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초등학생 딸 아이의 단어 공부를 도와줄 때도 꽤 신경이 쓰였다. 예를 들면 center 대신 centre, meter도 metre다. behavior은 behaviour, color는 colour로 쓴다. Realize도 realise다.
쓰는 단어나 표현도 꽤 다르다. 엘리베이터(elevator) 대신 리프트(lift)를 탔고, 서브웨이(subway) 대신 튜브(tube)를 애용했고, 아파트먼트(apartment) 대신 플랫(flat)에 살았다. 줄 설 때는 라인(line)이 아니라 큐(queue)에 섰다. 치어스(cheers)는 건배할 때만 외치는 줄 알았는데, 감사 표현이나 헤어질 때 인사로도 자주 들었다. ‘러블리(lovely)’ ‘브릴리언트(brilliant)’ ‘블러디(bloody)’ 같은 표현은 하루도 안 듣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뭔가 얘기를 한 뒤에 ‘Isn’t it?’ 같은 추임새나, 제안 혹은 부탁을 한 뒤 ‘Are you sure?’ 같은 확인이 번번이 돌아오는 것도 특징이었다. 아이 학교 친구 아빠가 만날 때마다 ‘Are you alright?’ ‘Are you ok?’라고 해서, 내가 힘들어 보이나 했는데 그게 미국의 ‘How are you?’ 같은 인사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아이도 학교에서 새로운 표현을 많이 배워왔는데, 그 때마다 나도 함께 배웠다. 어떤게 정말 쉽다고 말할 때 ‘이지 피지 레몬 스퀴지(Easy peasy lemon squeezy)’라고 한다든지, 실수했을 때 ‘웁시 데이지(oopsie daisy)’라고 하는 것도 재미있는 표현이었다.
영국식 영어를 배우기 좋은 영화, 드라마들이 여럿 있는데 즐겨 보는 것은 ‘페파 피그(Peppa pig)’다. 아이들에게도 자주 틀어준다. 최근에 화제가 된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에도 영국 문화, 영어가 녹아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