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이제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달이다. 영국에 온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네 달이 지났다. 이곳은 11월부터 온 세상이 크리스마스를 맞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10월 말, 썸머타임이 끝나고 11월에 접어들면서부터 백화점을 비롯한 상점에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 가득했다. 11월 중순부터 옥스퍼드 시티센터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오픈했다. 12월에 들면서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정점을 찍고 있다. 곳곳에서 크리스마스 행사들이 열리고 각 컬리지마다 캐롤 음악회와 성탄 예배를 열고 있다. 아들 학교도 2주 동안의 크리스마스 방학에 들어갔다. 고향에 갈 사람은 고향으로 가고, 여행갈 사람은 여행 계획에 한창이다. 올 한 해, 나름 고군분투했던 내 자신에게도, 아이에게도 격려를 해주고 싶은 요즘이다.
# 영국에서 10살 아들을 키운다는 것
이곳에서는 6살이 초등학교 1학년이다. 10살, 한국에서 4학년이었던 아들은 이곳에서는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 6학년이다. 사립학교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기에, 공립학교에 지원했다. 통학 거리가 멀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도보권에 공립 초등학교가 여럿 있는 곳에 집을 구했다. 내가 사는 곳은 옥스퍼드의 제리코 지역. 이 지역에는 영국 성공회 소속 초등학교가 두 개, 카톨릭 재단의 초등학교가 한 개 있었다. 여기 오기 전 학교 위치를 확인해 보고 1,2,3지망을 썼다. 세 학교 모두 대동소이하게 나쁘지 않다는 평을 들었기에 어디가 되든 감사히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1지망으로 지원한 카톨릭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됐고 지금까지 잘 보내고 있다.
이 학교는 한 학년에 반이 하나다. 아들 반 학생은 모두 33명이다. 국적은 10여 개. 영국,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같은 유럽에서부터 미국에서 온 아이, 중국, 홍콩, 한국 등 아시아에서 온 친구. 그리고 수단, 알제리 등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이토록 다양할 수 있을까? 처음엔 많이 놀랐다. 부모들의 절반 가량은 옥스퍼드대학 종사자인 것 같고, 여기 오래 살며 터 잡고 일하는 로컬들도 절반 가량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두어 명은 옥스퍼드로 배정받은 난민 자녀들이다. 이토록 다양한 국적, 종교, 인종들이 모여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사실 걱정이 됐다. 그런데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아직은 특별히 인종차별이나, 불쾌한 경험 없이 아들은 잘 적응하고 있다. 워낙 인터내셔널한 분위기이기도 하거니와, 학교 차원에서 따돌림이나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정말 엄격하게 못 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다. 흑인도 많고 이슬람도 종종 있기때문에, 인종차별적인 언사나 이슬람 모독 등은 더욱 엄격하게 금지된다.
아들의 영어 실력은 꽤나 걱정거리였다. 아들은 영어를 거의 못 하는 상태로 여기 왔다. 처음 연수를 계획할 때부터, 아이 영어 교육이 첫 번째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들은 말하고 싶은 것도, 표현하고 싶은 것도 많은 스타일이라, 다른 사람과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본인이 많이 답답해했다. 처음엔 나도 조바심 나고 괴로웠다. 집에서 내가 도와주고는 있지만 쉽게 늘지는 않는다. 지금은 서로를 너무 괴롭히지 말고, 여유를 가지자고 다짐하고 있다. 영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인 만큼, 수단으로서의 영어- 주변 사람과 잘 소통하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도구-를 적당히 사용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다짐 중이다. 여전히 아이는 영어를 썩 잘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많이 웃고 (선생님에 따르면 아이가 매일 크게 웃으며 아이들과 잘 지낸다고 한다.) 신나게 축구를 하고 온다. 완벽하게 언어로 소통하지는 못해도, 아이는 손짓 발짓으로, 때로는 눈빛과 브로큰 잉글리쉬로 자기 뜻을 전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있는 것 같다. 큰 탈 없이 무던하고 건강하게 학교에 다니고 있음에 감사하다.
# 이 곳의 학교
영국 학교는 초등학생들 등하원에 매번 부모가 동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예외는 초등학교 5, 6학년. 그때가 되면 학부모 동의하에 아이들이 혼자 등하원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아침 시간, 그리고 오후 3시~4시 사이. 길가에는 아이들과 등하원하는 부모들의 자전거로 가득하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이곳에서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들은 여기서 6학년이기에, 혼자 등하원하는 것을 학교가 허락해줬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나와 함께 등하원한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를 오가는 기쁨이 꽤 크다. 이곳 학교의 특이한 점은 교과서가 따로 없다는 점이다. 대체 학교에서 뭘 배우는 거지? 궁금할 때가 많은 데, 선생님이 주는 자료로 공부하고, 노트에 써가며 공부한단다. 영어, 수학, 과학 등의 과목을 배우고 간혹 시험도 치는 걸 보면 뭔가 학습을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우리나라 학습량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학교 끝난 후에 학교에서 방과후 활동을 하긴 하지만 거의 예체능 중심이다. 학원에 가는 아이도 거의 없다. 괜찮을까? 간혹 걱정되지만, 그래도 이곳만의 학제가 있으니, 그 시기에 맞는 적당한 교육을 받고 있겠지. 마음 편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영국의 두 얼굴
다만, 이곳에는 사립학교가 정말 많다. 현지에 와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사립학교가 훨씬 많아서 처음엔 많이 놀랐다. 영국 분위기가 경제적인 형편이 허락하면, 되도록 사립학교에 보내려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다. 공교육에 대한 지원은 모자라고, 비싼 학비를 받고 운영하는 사립 학교와 교육의 질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그러다 보니 우수한 선생님이 사립학교로 몰리고, 또 그에 따라 우수한 학생들도 사립으로 향하게 되는.. 일종의 공교육 붕괴 현상이 이곳에서도 큰 문제인 듯 보인다. 영국 공립학교 교사들의 퇴직 문제가 심각하다는 뉴스도 종종 접한다. 이런 영국의 교육 시스템을 통해 나는 영국의 두 얼굴을 보는 느낌이다. 평등을 지향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철저하게 계층과 계급을 인정하는 듯한 모습. 전 국민 무상의료를 지향하는 NHS 시스템, 단단한 사회복지 시스템을 추구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진 자들만의 리그를 철저하게 인정하고 더 단단하게 만드는 모습. 어렸을 때부터 1년 학비가 대학 등록금보다 비싼 사립학교를 다니고, 그들만의 교육을 받으며 서로 어울리고,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등의 명문대학을 간다. 영국 총리 등 정치인의 상당수가 이런 부류이고 그들이 영국을 이끈다. 영국의 모순된 두 얼굴이다. 여기 학부모들을 만나면 이 주제로 한참 서로 얘기한다. 누군가는 비판하고, 누군가는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인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는 공립학교들의 퀄리티가 상당히 양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자녀들 교육을 위해 이곳에 살면서 런던으로 출퇴근하는 부모들도 간간히 본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하루 서네 시간의 출퇴근을 감내하는 것이다. 어디든 맹모삼천지교는 존재하는구나.. 느낀다.
#급식
대단한 교육적인 성취는 바라지 않지만,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으로 오긴 했지만, 이곳 학교의 급식은 꽤 문제다. 아이가 몇 번 급식을 먹고 오더니 한국 급식은 이곳에 비하면 정말 진수성찬이었다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달았단다. 냉동 반조리 식품에 지친 아들을 위해 난생 처음 이곳에서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볶음밥, 샌드위치, 유부초밥 등등 간단한 걸 싸주는데, 이곳 아이들은 본인이 도시락을 열면 깜짝 놀란단다. 너무 맛있어 보인다고! 대체 다른 아이들은 얼마나 간단한 걸 싸 오길래 이런 도시락에도 놀라나, 싶은 마음도 드는데. 아들 말에 따르면 ‘저걸 먹고 과연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간단하게 싸온다고 한다. 확실히 영국 사회는 먹는 것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 뭐 먹고 사나
그래서 이것이 참 문제다. 뭐 먹고 사나. 2016년 석사를 하러 한국에 왔을 때는 먹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주로 감자를 구워 먹고, 밥은 가끔 여기서 파는 자쓰민 라이스를 사서 라이스쿠커를 사서 해먹었다. 반찬은 주로 고기나 생선을 사서 구워 먹었다. 점심은 주로 콜리지에 가서 학식을 먹었다. 그리고 간혹 외식을 했다. 먹는 걸로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엔 다르다. 아이가 먹성이 좋다. 영국은 외식 물가가 정말 비싸다. 비쌀 뿐만 아니라 맛이 없고, 양도 적다. 둘이서 그리 화려하지 않은 정말 일반적인 음식점에서 외식을 해도 최소 40파운드 내외가 나오는 데, 한국 돈으로 7만원 가량이다. 외식을 자주 할 수도 없고, 할 이유도 없다. 학식이든 외식이든 밖에서 음식을 먹다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은 대체 음식을 왜 이렇게 하는 걸까. 싶을 때가 많다. 샐러드를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짜거나, 고기를 먹었는데 소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묘한 맛을 내고 있거나, 베지테리언 메뉴를 골랐는데 안에 든 내용물의 조합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맛을 내고 있을 때. 참 난감하다. TV를 보면 요리프로그램은 넘쳐나고 유명한 요리사들도 이렇게 많은데, 왜 현실은 이러할까. 자고로 외국에 가면 그 나라에서 가장 흔하고 맛있는 걸 먹어야지. 영국은 감자가 맛있고, 연어가 맛있다. 그리고 과일이나 유제품이 한국에 비해서 오히려 싸다. 그래서 그걸 많이 먹는다. 김치 없이는 하루도 못 버티는 아들을 위해 한국 식자재점도 종종 이용한다. 한류 열풍은 여기까지 미쳤는지, 옥스퍼드 시내 한 중심가에 서울 플라자라는 한국 식자재 상점이 분점을 냈다. (원래는 시내 외곽에 작게 있었는데 인기가 너무 많아서 한 중심가에 크게 생겼다.) 거기서 김치를 부지런히 사다 나른다. 쌀은 스시라이스를 사서 날마다 밥을 한다. 고기도 부지런히 굽는다. 먹성 좋은 아들을 키우는 데는 정말 많은 에너지가 든다. 뭐 먹고 사나. 아마 귀국할 때까지 고민할 것 같다.
# 인종도 종교도, 국적도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여기 와서 내 인생에서 가장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변호사, 이란 출신 인테리어 아트 전공 석사생, 아일랜드 출신 학부모, 중국 출신 바이오 전공 방문 연구원, 인도네시아 공무원 박사생, 인도인 의사 부부. 타일랜드 출신 국제 결혼 이주 여성. 영국 맨체스터 출신 포닥 교회 자매님. 이스라엘 출신 옆집 아저씨.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온 학부모. 최근 한 주 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이다. 가끔은 입력되는 정보가 과다해서 버겁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을 보며 세상의 다양한 삶의 방식과 고민, 그리고 나름의 기쁨을 함께 본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많은 고민을 가지고 살아간다. 세상은 수많은 정치적, 종교적인 분쟁과 빈부격차와 인종에 대한 차별과 식민 지배의 아픔 등으로 얼룩져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나름대로 분투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오늘의 한국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종종 생각해 본다. 훗날 내 인생에서 영국에서 보낸 2024년의 12월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2024년, 아들과 좌충우돌 함께 했던 올 한 해가 영국에서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