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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선 관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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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지금 총선이 한창이다. 하지만 길거리에선 선거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떠들석한 연설이나
운동원들의 캠페인은 없다. 우편물에 투표 신청 안내 서류가 온 것 빼고는 선거와 관련된 어떤 구호도 들
리지 않는다. 신문이나 TV를 봐야만, 그나마 지금이 선거철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선거운동원들이 가가
호호 방문하며 지지를 호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돈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정당활동을 하는 자
원봉사자들로, 영국 풀뿌리 정치를 지탱하고 있다. 최근 젊은이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사회 이슈로 등
장하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영국 젊은이들은 의외로 정치에 관심이 많고 모든 사회 이슈를 꿰차고 있다.


총선 얘기를 하려는 이유는, 이들의 토론이나 인터뷰에서 현재 영국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사회 이슈들이
총출동하기 때문이다. TV에선 각 당의 당수들이 단체 토론이나 1대1 토론, 또는 앵커와의 인터뷰에 나서
자신들의 비전을 얘기하고 있다. 물론 이 글에서 영국의 전 사회 이슈를 건드릴 생각은 없다. 다만, 인상
적인 부분만 몇 가지 끄적여보려고 한다.


현재까지 현 수상인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보수당 당수와 제1야당인 노동당 당수 에드워드
밀리반드(Ed Miliband)의 대결 구도가 팽팽하다. BBC 여론조사에 따르면, 4월 28일 현재 보수당 지지율
이 34%, 노동당 지지율이 33%로 1% 앞서있다. 한달 전에는 딱 그 반대였는데, 지지율이 계속 엎치락 뒤치
락 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당이든 제1당이 되더라도, 정부를 구성하려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해야 하는데,
보수당 노동당 모두 이정도 지지율로는 과반수를 채우기에 한참 모자란다. 그래서 군소 정당들과 연정을
해야 하는데, 이때문에 영국 선거의 셈법이 매우 복잡해졌다. 이때문에 세번째로 많은 의석을 차지할 것
으로 예상되는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보수당의 경우 연정 가능한 노선이 비슷한 정당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노동당은 SNP와 연정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둘다 SNP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이렇게 군소정당이 부
상하고 연정이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영국 양당제가 중요한 시험대 위에 올려져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양당제가 위기에 처한 이유는 영국 유권자들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정당에 충성심 높은 유권
자들이 줄어들고, 뚜렷한 지지정당 없이 그때그때 정책이나 공약에 따라 움직이는 유권자들이 늘었다. 여
론조사 결과도 각 정당이 어떤 새로운 공약을 내놓았느냐에 따라, 토론에서 누가 설득력있게 말을 했느냐
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고 있다. 이렇게 자유롭게 지지정당을 왔다갔다하는 부동층(floating voters)이 늘
어나는 것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장점은 유권자들이 특정 이념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보다, 정책과 공
약에 따라 지지 정당을 선택하게 되면서 정책 중심의 합리적인 정치가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권자들이 한 정당의 철학과 전통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지지정당을 시시 각각 바꾸면서, 대중영합주의(populism)와 이기주의가 노골화되는 부작용
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영국에서는 이민자들에 대한 배격 정책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늘고 있고 그들의 지지도
도 올라가고 있는데, 영국독립당(UKIP)의 나이젤 파라지가 대표적이다. 영국독립당은 영국의 EU 탈퇴와
반이민정책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현재 13%의 지지율을 얻고 있다.
 
이민자 문제는 영국 경제와 공공의료개혁 문제와 함께 영국 총선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해도 영국 사람들은 이민에 대해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이 ‘인종주의(racism)’로 비춰
질수 있다고 생각하고 금기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 실업과 범죄율 등 사회 문제의 원인을 이민자 증
가로 돌리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반이민 정서가 커졌고 영국독립당은 이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
이다.


각종 코믹한 행동으로 주목을 받는 괴짜 런던 시장 보리스 존슨 역시 이민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피력해
‘솔직한 정치인’이라며 인기를 얻는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가 확산된 탓인지, 보수당, 노동당 할 것 없이
대다수 정당은 이민 억제 정책을 주창하고 있다. 에드 밀리반드 노동당 당수도 캐머런 총리에게 “이민자
줄인다고 해놓고, 약속을 안지켰다”고 따진다. 영국에선 ‘좌편향’으로 인식돼 있는 BBC 방송조차, 최근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탄 난민선 전복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민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피력하는 UKIP의
나이젤 파라지의 멘트를 딸 정도다.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은 영국의 무상의료 제도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NHS라고 불리는 영국의 공공의
료 시스템은 “영국 땅에서 위급한 상황에 처한 누구도 적절한 응급조치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게 하지 않
겠다”는 철학 위에 지탱되어 왔지만, 예산 부족에 따른 인력, 시설 부족으로 비효율과 질 낮은 서비스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NHS 예산을 갉아먹는 사람들이 이민자들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
는 것이다. 영국은 NHS 철학을 바탕으로 거주자 뿐 아니라 잠시 머무는 여행객에게 조차 위급한 상황인
경우 무상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주변국에서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영국으로 ‘헬스 투
어’를 오는 경우도 많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 NHS 때문에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이 더 커진 게 아닌가 싶
을 정도다.


자신을 ‘진보’라고 표현하는 젊은이들도 이민 문제에서 만큼은 ‘반이민’ 정책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이 가질 취업 기회를 이민자들이 빼앗고 있다는 의식 때문이다. 한나라의 이민 억제 정책에 대해
외국인으로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의식이 위험한 수준으로 변질되질 않길 바랄 뿐이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다른 집단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모습은 지난 역사에서도 있었
다.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당이 초기에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위기를 유대인들의 음모 탓으로 돌리며
배타적 공동체 의식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식은 인종주의로 변질돼 최악의 인간 본성을 드
러냈다. 물론 지금의 영국이 그정도는 아니지만, 일부 정치인과 유명인들이 반이민정서를 노골화하면서
인종주의 발언을 서슴치 않는 모습은 위험해보인다.


하지만 깨어있는 젊은이들도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최근 만난 한 20대 청년은 “현재의 경제 위기의 원인
은 이민자 때문이 아니라 양극화 같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 있다는 것, 적당한 수의 이민자들은 경
제에 활기를 준다는 것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것 같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