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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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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온 지 만 2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 정도 살았으면 영어가 어느 정도 늘었을까요? 답부터 말하자면 “전혀 늘지 않았다”입니다. 아니 오히려 퇴보하고 있습니다. 공항에서나, 여행가서, 아니면 집 주변 가게들에서 물건 사면서 주고 받는 대화나, 미국인들과의 가벼운 casual talk도 늘 그 모양 그대로이고 미국 생활 초기 의욕에 넘쳐 영어 공부하던 때가 가장 실력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미국 TV도 처음와서 의욕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이 들렸고 지금은 그 때보다 덜 들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영어 공부 손 뗀지 오래고 더 이상 공부해야 할 의미를 상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학교에 다니거나 미국인들과 자주 접촉하는 일 등을 했다면 조금 늘었겠지만 그 정도 영어 구사력이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됐습니다. 제가 아는 분 두 분 정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한 분은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일하던 분이었습니다. 십 수년 전 유학을 와 박사학위까지 받고 미국 생활이 20년 다되어가는 분이었습니다. 1년 전쯤인가 이분이 귀국을 했습니다. 한국의 대학교수로 간 것입니다. 연봉이 3/1 정도 준 것은 물론이고 다른 손해를 감수하고 한국행을 감행했는데 귀국 사유는 영어 스트레스였습니다. 본인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도 잘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미국 생활 20년이 다 되어가고 그것도 그냥 보낸 세월이 아니라 치열하게 공부해서 학위까지 따고 국제기구에서 미국인들과 같이 십년 이상 일했는데 영어가 안돼서 한국 간다는 말이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또 한 분은 지금도 자주 만나고 있는데 이 분도 십 수 년 전에 미국에 유학을 와서 스탠포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십 년 넘게 미국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일 출근할 때마다 영어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감을 안고 간다고 했습니다. 업무상 대화나 일상 대화는 막힘없이 하지만 문제가 생겨 논쟁이 발생하면 자기를 영어로 방어하는 능력이 미국인들만큼 되지 않으니 그동안 불이익이나 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문제만 발생하면 괜히 가슴이 떨린다고 합니다. 이 두 분의 영어실력은? 일반 한국인 기준으로 탁월합니다. 일반인이 느끼기에 원어민에 근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인이 느끼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본인들이 말합니다.

이 두 분 이야기가 대표성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이를 듣고 나니 미국 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해도 영어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엄습했습니다. 이곳 이민 사회 역시 대부분 미국에 오래 살았어도 영어를 미국인처럼 못하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합니다. 이익이 첨예하게 충돌할 때는 외국인이 영어 못하는 게 당연하지 이런 배려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영어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눈 뜨고 당한 억울한 경험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외국인들을 보면 ‘와 한국말 잘 하는구나’했는데 이건 외국인치고 잘한다는 것이지 한국인에 비하면 대부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는 것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대학 다닐 때 화교 학생 둘이 있었는데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국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유창하게 잘했습니다. 화교라고 본인이 밝히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한국 사람이었지만 중국어도 중국 사람처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화교학생들 한국어 실력은 시험 때 드러났습니다. B4 용지 정도 크기의 시험지를 1시간 안에 앞뒤로 빽빽이 채워햐 하는 시험이었는데 앞장 절반 정도 채우고 끙끙 앓더니 거의 포기하는 걸 보고 한국어는 그냥 말만 잘 하나보다 했습니다. 그 때 말만 잘하는 것은 진짜 실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떠올려보니 더 이상 영어 공부할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생활 영어나 조금 난이도 높은 간단한 토론 영어를 더 심도 있게 입에 올려서 좀 유창하게 이야기 하면 주변에서 영어 잘한다는 소리 들을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 하자고 또 영어에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무슨 일 벌어지면 그 때 그 때 적절한 표현 인터넷에서 찾아가지고 가서 말하면 되지 또 무슨 영어 공부를 해야 하나 귀찮아지면서 이런 잔머리도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대한민국의 영어 열병으로 생각이 옮겨 갔습니다. 국민 모두가 외국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미국이나 영국 유학을 할 것도 아니고, 대외관계 업무에 종사하는 것도 아닌데 마치 영어를 하려면 원어민처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무의식에 깔려 영어 정복을 향해 분투하는 현실이 떠올랐습니다. 수 조원인지 수십 조원인지 알 수 없는 천문학적인 돈과 시간, 정열을 영어에 쏟아 부으면서도 실력은 생활 영어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모습들은 안쓰러울 지경입니다. 그러면서 영어를 더 잘 못해 자책하고 조금이라도 유창하게 영어하는 사람 보면 부러워하는 모습은 측은지심까지 들게 합니다.

그러면 저는? 저도 역시 측은지심을 유발하는 사례입니다. 중학교 입학과 함께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 대학교, 또 그 이후까지 10년 넘게 영어공부를 했습니다. 토익, 토플, GRE에서 고득점도 맞아봤지만 실제 영어 실력은 형편없습니다. 순전히 시험용 영어인 셈입니다. 실전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입니다. 미국인과의 대화가 깊어지기 시작하면 버벅대면서 결국에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나중에는 서로 부담스러워져서 이야기를 그만두고 맙니다. 나중에 다시 그 미국인과 만나면 서로 적당히 피해갑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친해질 일도 없습니다. 복잡한 생각과 논리를 영어로 빠르고 정교하게, 물 흐르듯 표현하는 능력은 한국어 대비 10%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라고 하는데 머리 속에서는 수 많은 생각과 정보들이 오고가도 그릇이 형편없이 작으니 영어로 말할 때는 무슨 초등학생이 된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동안 받은 영어교육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영어는 정말 피상적으로만 도움이 되었습니다. 알아듣기 힘든 표현과 말들이 또 쏟아졌습니다. 말을 세련되게 꼬거나 미세한 뉘앙스 차이를 표현하는 이런 표현들, 한국의 어떤 영어책에서도 본 일이 없는 말들이 TV에서 라디오에서, 각종 책들에서 밥 먹듯 쓰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들은 영어 공부를 새로 시작하는 듯한 느낌이 들만큼 많았고 정리해 익히기도 벅차 포기했습니다.

한 가지 의외였던 것은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한 물 간 것으로 인식되는 문법(Grammar) 공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미국 와서 실감한 사실입니다. 미국 교육은 글쓰기(Writing)를 굉장히 중요시하고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대학원까지 글쓰기 훈련을 끊임없이 시키는데 글쓰기의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가 문법입니다. 연수중인 존스 홉킨스 국제대학원(SAIS)에서 고급 영작문(Advanced English Writing) 수업을 한 학기 들었는데 영문법에 관한 사항을 중요하게 다뤘던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도서관에서 작문(English Writing) 관련해 많은 미국 책들을 살펴보았는데 책 내용 대부분이 문법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원어민처럼 아니면 혹은 원어민에 근접하게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어떤 길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내린 답은 어릴 때부터 최소한 매일 6,7 시간 정도는 영어에 노출되어 영어로 수업을 듣고 말하고 책을 읽고 리포트를 써내며 토론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이렇게 초중고 과정을 거쳐 대학까지 나오면 우리가 막연히 바라는 수준에 도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이게 가능할까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마치 영어 공부의 목표가 원어민 수준인 듯한 집단적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영어를 어디까지 공부하고 끝내야 하나 하는 고민과 성찰이 없고 이왕 공부하는 거 원어민처럼 하면 좋지 대충 이런 생각들인 것 같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영어책들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진짜 실력 향상보다는 도토리 키 재기식 내용에 디자인과 편집, 마케팅에 승부를 걸고 어떻게 하면 한 권이라도 더 팔아보나 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듯 합니다.

그러면 어릴 때부터 미국에 살며 대학까지 마친다면? 영어는 원어민처럼 할 수 있겠지만 그 때는 더 이상 사고방식과 문화적 배경이 한국인이라고 하기 어렵고 거의 미국인이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자칫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게 될 수 있으며 영어 하나 잘해보자고 했다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평생 어정쩡한 정체성을 가지고 어느 쪽에도 확실한 소속감을 가지지 못한 채 양쪽에서 주변인으로 살지도 모르는 것이죠. 한국말을 못하는 아이와 영어를 못하는 부모, 이민 사회에 이런 가정이 대단히 많습니다. 말은 못해도 서로 조금씩 알아듣기는 하기 때문에 부모가 한국말과 어눌한 영어를 섞어 말하면 아이는 영어로만 말합니다. 일상 대화는 무난하게 넘어가지만 깊은 대화가 안되니 자녀 교육이 잘 안된다고 합니다. 부모자식간에 말다툼이 나서 속사포처럼 아이는 영어로, 부모는 한국말로 쏘아대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서로 일방적으로 떠들고 끝나버리는 정말 기묘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또 실제로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본 적도 있습니다. 부모의 한국식 사고방식을 답답해하며 튕겨나가는 자녀들 때문에 속썩는 한국인 부모들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이 자녀들이 미국 사회에서 당당하게 실력으로 성공하면 위안이라도 될텐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답이 잘 안나옵니다.

옛날에, 천국 다음 미국이라고 하던 때, 한국이 모든 면에서 내세울 것 없고 미국에 뒤떨어져 있을 때 한국어 못하고 영어만 잘해도 문제없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미국의 쇠퇴와 한국의 발전으로 한국어 구사 능력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시대상의 변화는 영어에 대한 생각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영어만 잘해서는 안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민 사회에는 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한글학교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2세, 3세들이 우리가 마치 영어 공부하듯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공부해도 한국어 실력이 늘지 않으니 우리가 영어 안돼서 답답해하듯 이곳에서도 그렇습니다. 6살짜리 막내가 우리말로 유창하게 말하면 어린애가 한국말 잘해서 너무 좋겠다는 말을 많이도 들었습니다. 한국인이 영어와 한국어 두 가지를 능숙하게 구사하면 미국에서도 직장 구하기가 쉽고 한국으로 진출하기도 쉬워서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만 뜻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이제 무차별적인 영어 몰입에서 벗어나 냉정해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 구사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을 멈추고 각자 사정에 따라 영어 공부의 한계를 정한 뒤 거기까지만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신 다른 전문분야를 개척하면 영어를 잘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큰 데 영어 때문에 낭비하는 자원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원어민 수준 혹은 그에 근접하는 영어 구사력은 필요한 사람들만 갖추면 될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 영문과를 다녔고 입시학원에서 성문종합영어를 강의해보기도 했고 어지간한 영어 시험도 거의 치러보고, 미국에서 2년 정도 지낸 뒤에 두서없이 정리해본 영어에 대한 단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