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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프 운전면허 자격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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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시애틀로 연수를 오면서 국제면허로 버텨볼 생각이었다. 시험에 대한 타고난 거부반응때문이었다고나 할까, 하여간 내키지 않아 차일피일 미뤘다. 남편이 운전면허를 딸 생각이 없으니 와이프도 면허 따는데 안달하지 않았다.

운전면허증은 신분증 역할을 하는 게 사실이지만 운전면허증이 없더라도 불편은 없었다. 쇼핑한 물건이 마음에 들지않아 반환할 경우 면허증 같은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권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워싱턴 대학 직원카드(이 대학에서 방문학자는 학생증이 아닌 faculty증을 받는다)를 보이면 무사통과다. 또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는 경우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우리나라도 요즘은 불심검문이 뜸하지만 아무나 붙잡고 ‘민증’을 꺼내라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생각한다.)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여권도 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러다 시애틀에 온 지 석 달쯤 지나 주위에서 교통사고도 일어나고 교통위반 티켓도 받고나서 와이프는 자기라도 빨리 따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며칠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운전면허 사무소에 신청을 하러 갔지만 와이프는 residence(거주지) 증명에 실패해 필기시험도 보지 못했다. 당시 와이프 이름이 기재돼 있던 서류는 아파트 렌트, 차량 보험증서 같은 문서밖에 없었는데 까탈스러운 면허사무소 할머니 직원은 이건 증명서류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JUNG’S WIFE’가 기재된 여권을 들이밀자 “미국에도 ‘BROWN’이란 성을 가진 사람이 수 만 명이 된다”며 이 걸로는 “당신이 JINHOWNG JUNG의 와이프라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행했던 나까지 “이해가 안 된다”고 거들고 나서자 “NO ARGUE”하면서 필요한 서류종류가 기재된 규정을 내밀었다. 거주지 증명을 하기 위해서는 전기세, 물세(상하수도) 같은 공공기관에서 발행한 BILL이 두 가지 이상 있거나 공공기관이 발행한 신분증명서가 있어야 한다고 돼 있었다. 사실 전기, TV, 인터넷 등 각종 BILL은 애초 모두 내 이름으로 돼 있었기 때문에 부랴부랴 뒤늦게 전기를 공급하는 시애틀 CITY LIGHT에 와이프 이름을 추가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서류인 전기세는 두 달에 한번 나오기 때문에 와이프가 전기세 서류에 자기 이름을 갖는 데도 시간이 한 달 이상은 걸리게 돼 있었다. 와이프는 이 일로 며칠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내가 두 손을 들고 필기시험을 먼저 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비지팅 스칼라는 대개 서류가 자기 이름으로 돼 있기 때문에 배우자들이 자격을 얻지 못해 한국에 영문 혼인증명을 보내도록 해 필기시험을 본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SEVIS서류를 들고 가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SEVIS는 미 이민국의 유학생 관리프로그램으로, 면허사무소가 요구하는 공신력 있는 문서다. 특히 미국 도착 후 한달 이내 해당 학교에 도착 등록과 함께 다른 나라로의 여행허가를 받으면서 미국내 주소를 적어내기 때문에 SEVIS는 훌륭한 거주지 증명문서가 된다.

그래서 워싱턴 대학에 들러 운전면허 시험 땜에 SEVIS문서가 필요하다 했더니 밀봉한 채로 와이프 명의의 서류를 한 장 떼 주었다. 면허사무소에 이 걸 내미니 그 직원은 군말 없이 시험을 보게 해 주었다.

부부가 모두 운전면허를 취득하려 할 경우 학교에 등록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부부가 운전 면허용으로 각각 SEVIS 서류를 한 장씩 떼는 게 이래저래 골머리를 앓지 않는 길인 것 같다. 물론 뒤늦게 운전면허 시험을 본 것도 좋은 점이 있었다. 대개 실기시험에서 한 두 번 낙방하는 게 예삿일이지만 서너달 동안 운전을 하고 난 뒤라 사정에 밝은 덕분인 지 떨리는 것이 없어 부부가 모두 한번에 다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