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전 다른 연수생들보다 좀 늦은, 8월14일에야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날 당일 저녁, 현지에 사시는 한국 교수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해 셔서, 첫날부터 와인과 위스킨에 서서히 젖어들며 시차 적응에 자연스럽게 성공했습니다.
저는 다른 연수생들과 달리, ‘솔로연수’이기 때문에 세간살이를 많이 장만하거나 아이를 학교에 보내거나 할 일은 없었습니다. 또한 아파트가 가구와 일부 살림살이가 딸려있어 첫날부터 편히 잘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는 워싱턴DC에서 포토맥 강 바로 건너편인 알링턴시에 있어서 시내로 가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편히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아, 편한 이야기만 했나요? 그렇진 않고요. 아파트가 워낙 낡아서 방의 스탠드 불이 잘 안 켜지고 부엌에선 수도꼭지가 줄줄 새고 목욕탕은 물이 잘 안 빠지고 이것저것 불편한 것이 많더군요. 아파트 매니저에게 전화를 통해 문제점을 얘기하면 반응이 오긴 하는데, 고쳐주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결국 이메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듣기론, 미국은 시스템과 매뉴얼이 잘 갖춰져있다고 했는데, 막상 짧게나마 일상 생활을 해보고 나니, 결국 ‘사람’에 달려있단 생각이 드네요. 할 수만 있다면, ARGUE하고 APPEAL하고 PERSUADE하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가령, 운전면허증과 관련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사는 버지니아는 올해 초부터 한국면허증을 미국면허증으로 교체해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알게 된 버지니아 한인회 사무총장님은 버지니아 주정부와 한국 정부 공무원들이 만나 협정을 맺는 자리에 참석해 이 광경을 직접 목도했다고까지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찾아간 디엠비(Department of Motor Vehicles·우리나라의 운전면허시험장 같은 곳인데 여기에서 운전면허 시험도 보고 면허증도 발급·교체해주고 하는 곳입니다)에선 영 딴말을 했습니다. 디엠비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번호표를 받기 위해 긴 줄에 서서 기다리다가 제 차례가 왔는데, 데스크 직원 왈 “버지니아는 한국 면허증을 교체해줄 수 없다. 다만 30일 동안만 한국 면허증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지 반드시 시험을 봐서 미국 면허증을 따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도가 바뀌었다고 여러차례 말해봤지만, 그 직원은 눈을 부릅뜨며 “내가 17년간 ‘이 일을 해봤는데’ 한국 면허증을 인정해주는 사례는 한번도 없었다”고 우겼습니다.
결국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직원이 저를 매니저에게 데려갔고, 매니저가 “버지니아에선 한국 면허증도 통용된다”고 확인해 줬습니다. 다시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가서 “왜 내게 잘못된 설명을 해줬냐”고 따지려고 하자, 그녀는 더욱 크게 눈을 부릅뜨며 “번호표나 빨리 받고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알고보니, 다른 한국인도 이 인포메이션 데스크 직원을 만났다가 돌아간 사례가 있더군요. 앞으로 2주일 쯤 뒤면 운전면허증을 받기 위해 다시 그 디엠비에 가야 합니다. 과연 그녀에게 제대로 항의할 수 있을까요? 9월6일부터 영어학원 수업이 시작되니 선생한테 사정을 얘기하고 강한 항의 문구를 준비해야겠습니다(정 안되면 LETTER라도 써야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영어 얘기가 나오네요. 전 미국에 와서 제 영어실력의 9할은 reading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listening과 speaking은 ‘영 아니올씨다’라는 겁니다. 특히 스타벅스 언니 오빠들이 하는 얘기는 도통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커피 달라고 하는데 왜 french roasted이니 new brand이니 하는 설명을 붙여서 혼란스럽게 하는지요.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와이파이(WI-FI)서비스가 잘 되는 곳이 스타벅스라서 하루에도 두차례 이상 스타벅스에 갈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결국 영어학원에 등록을 했는데요. 물론, 제가 연수를 하게 된 존스홉킨스 대학도 ESL프로그램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학비가 한 학기에 7000달러 이상 되고 주로 대학원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을 위한 전문적 과정입니다. 이 때문에 존스홉킨스 대학 직원은 아예 다른 학원을 다니는 게 낫겠다며 여러 프로그램을 참조하라고 정보를 줬습니다.
이곳 영어학원은 크게 보면, 유학비자(F1)를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과 비자를 못 받는 프로그램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자가 나오는 건 통상 INTENSIVE 과정으로서 매일 서너시간씩 강의를 듣는, 빡센 프로그램이고 학비도 한달에 600달러 후반대~800달러에 이릅니다. 반면 SEMI-INTENSIVE는 학원마다 차이가 있지만 월~목요일까지 2시간~3시간 가량 수업을 합니다. 제가 알아본 학원들만 보자면, SEMI-INTENSIVE는 한달에 200달러 중반대~400달러 후반대 가량입니다. 학원에 등록하기 전 등록비(50~80달러 가량)를 내고 레벨테스트(PLACEMENT TEST)를 받은 뒤 수업을 받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엔 학원에 오기 전까지는 주절주절 말 빠른 스타벅스 언니 오빠들만 보다가, 학생들의 눈을 쳐다보며 진심으로 천천히 말해주는 학원 선생들을 만나니 ‘울컥’ 고마운 마음까지 일더군요. 저는 집 근처인 ROSSLYN역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LADO라는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남들보다 정착 절차가 간단했기 때문에, 저는 지금까지 계속 워싱턴시내를 걷고 또 걸으며 관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도시와 달리, 워싱턴디시에 있는 미술관은 모두 ‘공짜’입니다. 보스톤이나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공짜 미술관’이지요. 다만, ‘공짜’의 대가는 엄격한 소지품 검사입니다. 미술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찰 복장을 한 직원들이 입구에 버티고 서서, 가방을 다 뒤집니다. 부피가 좀 큰 백팩 같은 것은 물품보관소에 맡겨야 합니다. 저는 내셔널갤러리에 작은 가방 2개를 갖고 갔는데, 담당 직원은 “우리 미술관에선 사람 1명마다 가방을 1개씩 드는 것이 규정”이라면서 옆에 있는 가방 없는 친구를 가리키며 “저 사람에게 가방을 하나 주라”고 하더라고요. 눈 가리고 아웅인 셈인데 규정상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워싱턴디시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워싱턴 기념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곳 사람들이 편하게 ‘펜슬’이라고 부르는 이 기념탑은 지난 23일 동부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윗부분 에 균열이 가서 전망대 관람이 중지됐습니다. 워싱턴디시는 계획도시이다 보니 중요한 건물들이 반듯반듯하게 축으로 연결된 점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나라 서울에 종로 청계천 을지로 충무로 등 가로로 이어지는 길과 1가 2가 3가 등이 세로로 나누는 길이 있듯이 , 워싱턴디시는 가로는 알파벳으로, 세로는 숫자로 나눠집니다. 이 반듯반듯한 길 위에, 각종 정치 기념물들이 반듯반듯하게 축을 그리며 서 있습니다. 링컨기념관-펜슬-국회의사당이 동서로 주요 축을 형성하고 있고, 백악관과 토머스 제퍼슨기념관이 남북 축을 그리며 마주보고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이 백악관을 마주보는 이유는 제퍼슨 대통령이‘후배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감시하기 위해 그렇게 지었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미국 사람들은 자기들 역사가 짧아서 그런지, 이런 기념관을 만들 때는 미국 각지에서 데려온 분홍색·하얀색·라임색 등 다양한 대리석을 사용해 네오클래식 스타일의 웅장함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최근 워싱턴디시의 중요한 뉴스 중 하나가 바로 마틴 루터 킹(MLK) 기념관 개장입니다. 이 기념관 또한 링컨기념관과 제퍼슨기념관 사이를 연결하는 일직선 축에 놓여있습니다. 절망의 산(MOUNTAINS OF DESPAIR)과 이를 뚫고 희망을 제시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념해 ‘STONE OF HOPE’로 나뉘어져 있지요. 거대한 절망의 산을 뚫고 나온, 약 28피트에 이르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팔짱을 끼고 워싱턴디시의 인공연못인 타이달 베이슨(TIDAL BASIN)을 내려다보며 서 있습니다. 중국 출신 조각가인 LEI YIXIN이 만든 이 동상은 보기에 따라선 너무 위압적이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인근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기념공원의 경우엔, 루즈벨트 대통령이 비록 근엄한 표정이긴 하나 자신의 애완견 ‘팔라’까지 데리고 앉아있는 인간적 동상이지요. 여하튼 마틴 루터 킹 기념관을 찾은 25일은 개막식 전이었고, 비가 왔는데도 관람객들로 붐볐습니다. 워싱턴에서 2년째 공부하고 있는 한 유학생은 “이처럼 관광지에 흑인이 많은 것은 처음 봤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워싱턴DC는 기념의 도시다, 새로 개관하는 마틴 루터 기념관은 저멀리 링컨기념관과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지난 8월 25일은 비가 내렸는데도 28피트에 이르는 마틴 루터 킹을 보러온 사람들로 붐볐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가 생전에 사랑했던 ‘팔라’와 함께 앉아있다.
며칠 돌아본 워싱턴디시는 정치와 역사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도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버지니아의 주도인 리치몬드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수도였고, 남북간 첫 전투가 발발한 매나서스도 인근에 있습니다. 처음으로 영국인들이 만든 식민지인 제임스타운도 가깝고요. 우리 눈으로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 많지만 곳곳에 ‘HISTORIC SITE’가 무척 많습니다. 워싱턴 주변 곳곳을 다니다보면 미국이라는 나라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외국에서 사는 생활이 처음이다보니,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매우 어렵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국식으로 치환해 생각하는 일이 잦습니다. 가령 제가 살고 있는 집 근처 지하철역이 로슬린역인데 여기는 블루라인과 오렌지라인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저는 ‘어, 여긴 3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충무로구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식이지요. 또 제가 일주일 전쯤 갔던 워싱턴디시의 워터프론트는 메릴랜드에서 잡아온 블루크랩을 비롯해 수산물을 현장에서 즉시 쪄서 파는 곳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아, 노량진에 왔네’하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워싱턴DC를 흐르는 포토맥 강변의 워터프린트. 노량진 수산시장을 떠올리게 한다
아직 제 손목시계는 한국 시각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시계를 볼 때마다 ‘아 지금 한국은 지금 어떤 어떤 일들이 벌어지겠다’하며 궁금해집니다. 과연, 손목시계를 미국 시각으로 맞추는 때가 언제쯤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