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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서 바라 본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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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에 끼여서 선택을 강요받는 위기에 직면했다”
(risks being ‘coerced’ into choosing between the U.S. or China as the two powers jostle
for influence in Asia) 싱가포르 총리 리센룽이 며칠 전 영국 언론 BBC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싱가포르는 중국과의 밀착 경제로 부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에 의지해 ‘중국 흡수’라는 안보위협
을 해결해 왔다. 어찌 보면 아시아의 대부분 중·소국이 비슷한 국가 전략을 써왔고 그로 인해 경제를
키우고 전쟁도 비껴왔다. 이젠 더 이상 이런 전략이 유효하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일까? 싱가포르 뿐 만
이 아니다. 필리핀도 최근 미국을 자극하며 미중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해 말부터 아세안 국가들은 미·중 양국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제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이 뉴스와 오늘날 한국의 상황이 겹쳐졌다. 한국은 실제로 싱가포르 등 동남아 국가들이 우려한 ‘선택
의 시험’에 직면해 있다. 사드 때문이다. 대안도 없이 어정쩡한 줄타기로 일관해 온 한국 외교가 오늘
의 처참한 현실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혹자는 “사드 하나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시간이 구
한말로 되돌려졌다”며 한탄했다. 열강의 숫자는 그때보다 줄었지만 수퍼 파워가 가해오는 압력의 강도
와 우리가 처한 운명의 절박함이 해방이후 최고조에 달했다는 설명이다. 중국의 경제 보복은 극에 달했
고 미국은 한미일 동맹을 중심으로 한 전방위적 한반도 개입(Engagement) 전략을 펴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워싱턴에선 관련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이제 사드를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방어 무기’
라는 액면으로 보는 시각이 크게 줄었다. 한미 군사 전략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 퇴역 장성은 현재 상황
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은 사드의 본질을 한미동맹, 그 자체로 보고 있다. 미사일 방어로만 말하면
다른 대체가능한 옵션도 많다”     


이곳의 전문가들은 사드를 미중간 충돌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총성만 들리지 않을 뿐이지 미국과 중국
이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국력을 휘둘러 벌이는 소리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사드문제에서
‘로우 키(low key)’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의지는 수년 전부터 매우 완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도 넘은 보복 경고 역시 전략적으로 보면 ‘한미 동맹 흔들기’로 평가된다. ‘사드가 자국의 안보
이익을 심각하게 해친다’는 중국의 주장은 명분이며 도 넘은 경제 보복과 살벌한 비판은 힘의 과시로
받아들여진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사드와 북핵 등 미중이 벌이는 이번 갈등을 예사롭게 보지 않고
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지금의 중국은 30년 전, 아니 10년 전의 중국과 전혀 다르다는 설명이다. IMF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이미 2015년에 국민총소득(Gross National Income PPP) 17조 9200억 달러를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미국(17조 8100억 달러)을 앞질렀다.  미국이 1872년 영국에게서 빼앗은 지위를 143년 만에
중국에 빼앗긴 것이다. 미국의 주요 씽크 탱크들이 예상한 2017년 중국의 국방 예산은 약 2000억 달러
로 미국의 1/3 수준까지 치고 올라왔다. 보고되지 않은 실제 예산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는 관측
이 나온다.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로 상징되는 공격적 해외 인프라 건설은 중국에 대한 세계
각국의 경제 의존도를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


둘째, 미국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전략적 이해관계의 우선순위를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긴 것이다.
NATO로 대변되는 유럽 우선주의 정책은 건국 이후 미국 외교의 근간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로의 전향(Pivot to Asia)’정책을 기점으로 실질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들은 안보, 경제 등 국가 이익 핵심 요인을 따져보고 ‘아시아가 답이다’라고 강조한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이런 기조를 강화해 갈 것으로 보인다. 제임스 매티스(James Mattis) 미국 국방부 장관이 예상
을 깨고 첫 해외 방문지로 한국과 일본을 선택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렉스 틸러슨(Rex Tillerson)
국무장관도 이달 중순 한중일을 전격 방문할 예정이다. 
 
이곳 워싱턴에선 남중국해나 한반도에서의 미·중간 군사충돌 가능성을 언급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미국 내 매파가 행정부와 의회를 장악하면서 중국에 대한 경계와 함께 억지 전략(Contain-
ment)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미국 정보국에서 수십 년 간 활동해 온 저술가 마이클
필스버리(Michael Pillsbury)는 최근 저서 ‘100년의 마라톤’(The hundred year of marathon)에서
중국이 1949년 공산당을 세울 때부터 미국을 100년 뒤 제압할 적국으로 규정했다고 폭로했다. 트럼
프 행정부의 외교를 막후에서 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진 스테판 배넌(Stephen Bannon) 수석자문역
역시 비슷한 중국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운영하는 웹진 브라이바르트(Breibart News)
에는 중국에 대한 경고가 가득하다. 온건파 학자로 꼽히는 존스홉킨스 대학의 램튼 교수(David Lamp-
ton)는 현재의 아시아 상황을 ‘미국이 그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곤란한 환경’이라고 규정했다.


사드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국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 운명을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돼 왔음을 알 수 있다. 1890년대 서구 열강 제국주의에
문호가 열리고 수탈을 당했다.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과 한국을
나눠 갖기로 했다. 한일 합방의 계기가 된 것이다. 나라를 잃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찾을 때
도 강대국의 힘을 빌렸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해 민간인 24만 명이 학살
되지 않았다면 독립은 요원했을지 모른다. 이후 국가 수립과 한국 전쟁, 분단의 고착화 모든 과정
도 마찬가지다. 1949년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Dean Acheson)이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국을 빼버리
자 러시아와 중국은 안심하고 북한에게 남침을 허락했다. 지금도 적지 않은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을 ‘예상 밖’의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휴전선(그 전엔 38선)은 우발적 전쟁
(accidental war)을 했던 미·중·러 간 타협의 산물이다.


사드를 취재하고 관련 기사를 써 왔지만 아직도 ‘정답’을 모르겠다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오히
려 사드의 군사적 효용성 등을 단정적으로 설명하는 전문가들을 보면 불신과 반감이 생길 정도다.
사드는 정말 북한 핵을 막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사드의 명중률은 미국도 잘 모른다. 실전에서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 과정은 최악이었다. 북한의 핵
실험과 미사일 개발, 그 성공 공식은 이미 수년전부터 예상돼 왔던 것이다. 실험 몇 번 더 했다고
해서 ‘한·미간 논의조차 없었다’던 사드를 몇 달 만에 도입하는 과정을 납득할 국민은 많지 않다.


사드 문제로 우리의 국론은 찢기고 국민은 서로 싸우고 경제는 상처를 입고 있다. 아쉽게도 우리
에겐 싱가포르처럼 ‘선택을 강요하지 말라’고 얘기를 꺼낼 지도자도 없다. 새 대통령은 국가 대외
전략(national foreign policy)을 완전히 새로 짜야 할 것 같다. 국제 정치 현실은 동물의 세계와
같다. 약하면서 빠르지도 않으면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 원칙도, 철학도 없이 ‘미국도 좋고 중국
도 좋고’ 라는 식의 안이한 대응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부를 뿐이다. 북한, 미국 관계에 실무
를 담당했던 한 전직 외교관이 사석에서 한 얘기가 떠오른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는 그동안 ‘외교’란 게 없었다고 봐야죠. 70년간 미국이 하라는 대로만
했으면 되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