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보기

워싱턴 DC에서의 하프 마라톤

by

“쓰리(Three), 투(Two), 원(One)!”

다른 사람들과 함께 큰 소리로 숫자를 외치며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의 ‘스타트’ 버튼을 눌렀습니다. 30분 넘게 같이 서 있던 일가족이 먼저 앞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 뒤를 따라 출발선을 넘으며 이미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해 본 친구의 조언을 떠올렸습니다. “초반에 절대 오버 페이스 하면 안 돼. 흥분하지 말고 무조건 천천히 뛰어.”

하지만 두 발은 자꾸 빨라졌습니다. 4차선 도로 위를 가득 채운 사람들과 함께 뛴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더 크게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앞서 여러 번 달려서 지나갔던 길인데도 구경하러 나온 이들의 환호 소리가 더해지자 큰 축제의 한 조각이 된 듯 했습니다. 처음으로 뛰어보는 하프 마라톤이라 완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목표 완주 시간보다 더 빨리 결승선을 통과해야겠다는 욕심이 서서히 들어찼습니다.

‘페이스 메이커’를 찾을 수 없었던 DC의 하프 마라톤

출발선 앞에서 참가자들이 새로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발선에서 열심히 찾아봤던 ‘페이스 메이커’가 아쉬워졌습니다. 페이스 메이커는 특정 완주 시간이 적힌 풍선을 매달거나 조끼를 입고 달리는 사람입니다. 그를 따라 뛰면 자연스럽게 그 완주 시간에 맞출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한국에선 마라톤을 뛰면 대개 페이스 메이커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번에 참가한 ‘록 앤드 롤(Rock n Roll) 워싱턴 DC 하프 마라톤’에선 페이스 메이커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출발 전 제 나름대로 정해뒀던 페이스 메이커가 속도를 늦췄습니다. 등에 물통까지 달린 러닝용 조끼를 입은 근육질의 그는 먼저 달려 나갔던 일가족 중 한 명인 중년 남성이었습니다. 그를 페이스 메이커로 선택한 건 전문가 느낌이 물씬 나는 겉모습과 달리 저와 같은 ‘17그룹(corral·울타리)’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룹은 마라톤 참가 신청 때 적어냈던 예상 완주 시간에 따라 나뉩니다. 제가 제출한 시간은 2시간 50분이었는데, 저와 비슷한 시간대를 써냈다는 뜻입니다. 함께 달리러 나온 어머니와 딸에게 맞춘 속도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속도를 늦춘 그가 어머니 옆으로 가 말을 건넸습니다.

17그룹은 뒤에서 네 번째로 느린 속도로 달리는 그룹이었습니다. 제일 빨리 뛰는 1그룹이 시작 시간인 오전 8시에 출발선을 넘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음 그룹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각 그룹이 출발할 때마다 매번 카운트다운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문득 마지막인 20그룹은 얼마나 뒤떨어져 뛰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30분 넘게 기다렸다가 출발할 바에야 그룹 출발 시간을 대략 계산해보고 그 시간에 맞춰 대기 장소에 들어서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도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링컨, 흰머리수리와 나눈 ‘하이 파이브’

12㎞ 지점이 가까워질 때쯤 러닝 벨트 주머니에 넣어둔 에너지젤 하나를 꺼내 먹었습니다. 에너지젤을 먹으면 달리면서 쌓이는 피로를 빨리 회복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주머니 지퍼를 열고 닫는 데 정신이 팔린 사이 옆에서 같이 뛰던 사람들이 갑자기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꽤 가파른 오르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달리기를 멈추고 걸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에너지젤을 믿고 앞서 달리던 사람들을 제치고 경사가 급한 길을 뛰어올랐습니다.

짧은 고개를 넘자마자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다리가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괜히 걷는 게 아니었구나. 같이 걸어서 올라올 걸….’ 후회를 애써 외면한 채 5분 정도 천천히 달렸습니다. 스마트워치에 표시되는 심장 박동 수가 조금 낮아지자 다시 도로 양옆에 늘어선 사람들에게도 눈이 갔습니다. 한 여성이 손에 쥔 작은 종을 흔들었고, 아내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적힌 피켓을 든 한 남성은 고래고래 소리를 쳤습니다. 집 계단 앞에 의자를 꺼내놓고 달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응원하러 나온 사람들이 주는 재미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거리를 뛰었는데도 그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특히 피켓에 적힌 문구를 읽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관세 때문에 이 레이스는 15마일이야’라는 피켓에는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21.0975㎞인 하프 마라톤은 마일로 표시하면 13.1마일입니다. 미국이 세계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며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몫이 커진 것처럼 완주해야 할 거리도 그만큼 늘었다는 미국식 유머였습니다.

캐릭터 분장을 하고 참가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손바닥을 마주쳐오는 사람들 역시 또 다른 즐거움이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분장을 한 남성 앞에는 ‘하이 파이브’를 하려는 사람들로 짧은 정체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와 손바닥을 마주치고나서도 사진으로만 봤던 링컨 대통령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서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살펴봤습니다. 성조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미국의 국조 흰머리수리 탈을 쓴 이들도 참가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로 새 울음소리를 내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평소 차로만 지나다녔던 길을 사람들과 같이 달리니 낯설지만 설렜습니다.

“오늘의 두 배는 못 뛰겠어”

달린 거리가 18㎞를 넘었는데도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진 않았습니다. 속도를 더 높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꽤 많은 이들을 제쳤는데도 다리가 무겁진 않았습니다. 하프 마라톤에 참가하기 전에 16㎞만 한 번 뛰어보면 된다는 말이 맞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마라톤 당일에는 아드레날린이 나와 그 이후부터는 그저 달리게 된다는 건 정말 사실이었습니다. 길을 따라 늘어선 바리케이드에 붙어선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뒤에서 빠르게 달려오던 동양인 남성이 제 옆으로 오더니 “앞으로 얼마나 남은 거냐”며 힘들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이제 300m 남았어요. 정말 다 왔어요.”

제 첫 하프 마라톤은 시작처럼 끝도 특별한 의식 없이 마무리됐습니다. 결승선을 지나며 양손을 하늘 위로 들어 올리는 저만의 작은 퍼포먼스가 전부였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나눠주는 물을 한 병 받아 들고 마시면서 더 앞으로 걸어나오자 메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 손에 여러 개의 메달을 건 자원 봉사자들이 미소만 띤 채 하프 마라톤을 마친 사람들에게 메달을 나눠줬습니다. 탁자 위에 쌓아둔 바나나를 하나 챙겨 들고 출구를 빠져나오는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한국 마라톤에선 앞뒤로 이런저런 행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날 아침에도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집에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대기 장소에 도착하니 아무런 행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각자 자기의 그룹을 찾아가 기다렸다가 출발하는 게 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만큼 검색대도 설치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경찰은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현지 언론 매체에 따르면 이날 하프 마라톤에 참가한 사람들은 약 1만8000명이었습니다.

하프 마라톤을 뛰고 난 지 이틀이 지나자 제 공식적인 기록이 담긴 이미지 하나가 메일로 왔습니다. 제가 제출했던 예상 완주 시간보다 30분가량 단축된 시간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전체 순위도 표시돼 있었습니다. 7612등이더군요. 제 기록과 순위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니 “내년에는 같이 풀코스 마라톤을 뛰자”는 말이 되돌아왔습니다. 바로 답해줬습니다. “아니야. 이걸로 충분해. 오늘의 2배는 못 뛰겠어.”

첫 하프 마라톤을 뛰고 난 뒤 받은 완주 메달입니다. 메달 뒤로 워싱턴 기념탑이 보입니다.

혹시 워싱턴 DC에서 풀코스 마라톤을 뛰고 싶으시다면 올해 10월 25일 열리는 ‘해병대 마라톤(Marine Corps Marathon)’을 추천 드립니다. 지난해 구경했던 대회의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응원하러 나온 사람들의 숫자부터가 이번 하프 마라톤과는 비교가 되질 않습니다. 풀코스 마라톤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저처럼 하프 마라톤도 좋은 대안이 될 듯 합니다. 내년에는 3월 20일에 열립니다. 참가하시려면 가급적 빨리 신청하시는 게 좋습니다.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참가비가 점점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당장 지금 신청하면 103달러면 됩니다. 제가 낸 금액은 170달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