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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 그리고 아리조나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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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년의 주 아리조나.
나에겐 원로 가수 명국환 씨의 김치 웨스턴 트로트 ‘아리조나 카우보이’로 다가왔던 그 주가 새로 제정된 ‘주 이민법’ 논란으로 소란스럽습니다. 남북 전쟁 때 텍사스 서쪽 지역 가운데 유일하게 남부 연맹 군에 소속돼 북군과 싸웠고, 1990년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기념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을 거부했던, 내가 아는 미국의 가치와는 사뭇 동떨어져 보이는 가치가 보편적인 지역입니다.

지난 4월 아리조나 상원은 주 경찰에 불법이민자로 의심되는 사람에 대해 영장 없이 신문하거나 합법적 체류자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여기에, 만약 경찰이 이 같은 활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을 경우 이를 제소할 수 있도록 하는 강제조항까지 포함시켰습니다.

법안의 효력이 생기는 8월부터 그야말로 피부색이 하얗지 않은 사람은 미국 시민이든 아니든 적법한 서류 없이 아리조나 주를 돌아다니기가 꺼림칙해졌습니다. 법안 반대론자들이 이 법을 구소련의 여행증명서나 인종차별국이었던 남아공의 통행증 제도와 비교하며 이민자 마녀사냥법이라고 부르는 이윱니다.

법안은 불법이민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지만 조건상 이는 멕시코계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공화당 소속 주지사인 브루어 여사는 상원을 통과한 법안에 서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마약 상들의 살인적인 탐욕에 우리의 안전을 희생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법안의 명분을 마약과 관련된 멕시코인 그리고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의 범죄 저지에 두었는데 법안 내용은 불법이민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법안으로 구체화된 것입니다. 여론조사기관 라스무센에 따르면 아리조나 주 유권자 가운데 53%가 이 법안이 잠재적으로 미국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것이라고 답변하면서도 70%는 어쨌든 법안에 찬성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아리조나주 히스패닉계 주민 30%를 제외하면 거의 다 법안에 찬성하는 셈입니다. 아리조나 주지사를 비롯해 법 제정을 주도한 정치인들은 당장은 느긋해 보입니다. 정치적으로 이만한 성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아리조나 주 외부의 반발은 히스패닉 계를 중심으로 점차 거세지고 있습니다.
아리조나 보이콧 운동도 본격화 될 조짐입니다. 당장 아리조나에서 예정됐던 대형 컨벤션 행사가 잇따라 취소되고 있습니다. 예약된 호텔의 취소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여행업 등 서비스업에 의존하는 아리조나의 경제구조상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리조나 주가 이민법 위반으로 잡아들인 사람들을 구금할 때 연방정부 시설에서 이들의 구금을 거부할 경우 아리조나 주는 이에 따른 추가비용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할
판입니다.

아리조나 주가 킹목사 생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것을 거부했던 지난 1990년, 3년 후 아리조나에서 열리기로 예정됐던 프로풋볼 결승전 슈퍼볼 경기가 항의 표시로 보이콧됐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지금 내년 아리조나주 피닉스 체이스필드에서 열릴 예정인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경기의 보이콧 움직임도 일고 있습니다. 아리조나 보수파가 정치적 이득을 챙겼다지만 주 자체가 짊어져야 할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을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어찌됐건 미국의 고질적 불법 이민자 문제가 아리조나 주 법 제정을 계기로 미국사회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전국적인 논쟁이 촉발되면서 그동안 Tea Party Movement의 놀이터였던 워싱턴 캐필털 힐은 대형 성조기를 앞세운 反 아리조나 이민법 시위자들로 뒤덮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법안이 잘못됐다(mislead)며 연방정부 차원에서 대응할 방침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건강보험개혁법안에 이어 금융규제법안을 다루고 있는 의회도 서둘러 이민법 개정을 우선 다뤄야 할 사안으로 정했습니다. 블룸버그 뉴욕시장,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등 보수인사들까지 아리조나 주의 법제정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극우파 라디오쇼 진행자까지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논평할 만큼 보수 파내에서도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상황에서 지난 대선 때 오바마와 맞섰던 아리조자 연방 상원의원 존 맥케인의 행보는 단연 눈길을 끕니다. 공화당 내에서도 정파적 이익보다는 자신의 소신을 곧 잘 표명한다고 해서 매버릭(Mebric)으로 불리던 맥케인 상원의원은 재빨리 아리조나 이민법을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올 가을 중간선거에 나가기위해 치러야 하는 공화당 프라이머리 선거에서 강경 보수파 후보에 고전하는 것으로 알려진 맥케인이 지역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5월 1일 백악관 출입기자 만찬행사장에선 오바마 대통령이 이런 맥케인의 행보를 유머 소재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자유와 평등 인권의 가치는 미국 건국의 토대이며 미국의 외교정책이 힘을 바탕으로 할 때나 명분을 바탕으로 할 때나 늘 상대에게 들이대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은 내 코가 석 자인 처지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리조나 주 법이 목표로한 불법이민자들의 범죄행위는 표면적 이유일 뿐 이민자들로 인한 중. 하층 미국인들의 일자리 기회 박탈과 평균 임금 저하, 그리고 왜 내가 낸 세금이 그들에게 써져야 하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항변까지, 여기에 좋지 않은 경제현실은 이런 생각들을 더욱 강고하게 하는 요인입니다 비록 미 연방대법원이 이민자 정책은 연방정부의 권한이라고 못 박은 판결을 이미 오래전 확립했지만 이를 뻔히 아는 아리조나 주는 보란 듯이 주차원의 이민법을 제정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자유의 땅 미국, 인권국가 미국, 기회의 땅 미국, 그리고 바로 이런 미국의 가치가 미국인들을 다른 나라 사람들과 구별지어주는 우월한 자부심으로 여기며 살아온 미국인에게 현실의 고통은 이상과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아리조나 이민법 논란이 보여주고 있는듯 합니다.

미국은 바로 이민자들이 싸워 건설한 나랍니다.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에서 이민자 문제가 나라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된 역설 속에 미국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