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 최악의 크리스마스
11월 중순 무렵, 마트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분명 크리스마스때 여행을 가거나 가족들이 모여 조촐한 파티를 했을텐데 여기와선 적응하느라 정신없어서 크리스마스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도 미국에서의 인생 첫 크리스마스인데(마지막일지 모를), 그냥 보내고 싶진 않았다. 잊지못할 크리스마스를 위해 가족 여행을 급히 결정했고 분주히 준비했다.
먼저 장소. 하와이, 플로리다, 라스베가스, LA 등 다양한 곳이 후보지에 올랐지만 아이가 좋아할만한 디즈니랜드가 있고, 남편이 한국에서 오기도 편하고 여기서도 직항이 있는 LA로 결정했다. 장소가 결정되고 나니 진행은 꽤 순조로웠다. 렌터카를 예약했고, 오랜 시간 열심히 검색한 끝에 깔끔하고 근사한 에어비앤비 숙소도 찾았다.
우리가 LA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인 디즈니랜드도 예약했다. 넓은 디즈니랜드를 충분히 둘러보고자 디즈니랜드와 어드벤처 파크를 함께 볼 수 있는 호퍼티켓 2일권을 샀다. 줄을 선 채 시간을 다 쓰고 싶지는 않아서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지니플러스‘도 추가했다.
다음은 나를 위한 유니버설 스튜디오. 10여년 전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 꼭 다시 가고 싶었다. 티켓을 예약하려고 보니 VIP EXPEREIENCE 패키지가 있었다. VIP투어는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모든 놀이기구를 기다리지 않고 탈 수 있고, 스튜디오 투어도 전용 차량으로 하게 되고,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곳도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발렛파킹도 할 수 있고, 점심 뷔페도 제공된다. 1인당 469불은 너무 비싸지만, Express 티켓이 299불인걸 감안하면 나름 굿딜이라 합리화하며, 언제 또 가겠냐며 눈 꼭 감고 예약을 했다. 환불 불가라고 쓰여있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당연히 갈 거니깐.
예상보다 많은 지출을 하고 가슴은 떨렸지만 모든 것이 제법 완벽해 보였다.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공항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 순간 비행기가 2시간 지연됐다는 문자가 왔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데 느낌이 왠지 쌔했다. 일종의 직업병이기도 한 그 ’촉‘.. 그리고 시간 맞춰 공항에 갔더니 아직 결정되진 않았지만 항공편이 취소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청천벽력같았다. 전날은 눈폭풍이 조금 왔지만 이 날은 날씨도 괜찮아서 안도했건만 이게 웬일? 크루(승무원)가 도착하지 못했다는게 이유였다. 그래서 대체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설마 파일럿도 아닌 승무원을 못찾겠어? 설마는 현실이 됐다.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지연된 출발 예정 시간에서 10분 정도 지나자 항공편이 취소됐다는 메시지가 왔다.
여긴 미국이라는 게 정말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한국이라면 승무원 한 명이 도착하지 못해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한다는 게 가능할까. 승객들의 엄청난 항의가 무서워서라도 어떻게든 대타를 찾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승객들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가족들에게 오늘 LA에 못 간다는 전화를 하고, 휴대폰으로 대체 항공편을 검색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게이트 앞에 줄을 섰을뿐 화를 내거나 항의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일하게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리다 내 차례가 되자 직원이 취소하고 환불을 받을지 다른 항공편으로 바꿀지를 정하라고 했다. 그 날이 23일이었는데 가장 빠른 가능한 항공편이 28일이라고 했다. What? 사실상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남편은 이미 한국에서 LA에 도착해있는데 이러다 가족이 만나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머리가 하얘졌다. 남편이 LA에서 이 곳으로 오는 항공편도 가장 빠른게 26일이란다. 콜센터는 계속 통화중으로 연결도 안되는데 여기서 결정을 안하면 그나마 환불도 제때 못받을 것 같아 일단 항공편 취소를 선택했다. 밤 10시가 넘어 고요해진 공항에서 무거운 짐들을 다시 끌고 멀기도 한 장기 주차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항공권을 제외하고도 결제한 비용만 5천달러가 넘었기에 환불 걱정이 밀려왔다.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디즈니랜드 티켓이 환불이 안되면 어쩌지? 겁이 덜컥 났다. 하필 가장 비싼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바로 다음날 11시 30분으로 예약되어있었다. 집에 가자마자 바로 이메일을 썼다. 나의 사정을 설명하며 Please를 여러번 쓰며 환불해달라고 거의 애원했다. 아침에 사무실이 문을 열자마자 전화도 했다. 나의 간절함이 통했을까. 담당자는 나의 메일을 읽었다며 바우처는 줄 수 없으니 날짜를 변경해주겠다고 제안했다가 결국에는 환불을 받게 해주었다. 다행히 디즈니랜드는 티켓을 구매한 사이트에 항공편 결항 메시지를 첨부해 보냈더니 바로 환불해주었다. 하지만 렌터카는 하루를 써도 전액 다 내야 한다며 전혀 환불해주지 않았고, 에어비앤비도 처음 3일은 무조건 환불이 안된다며 이후 남은 날짜의 숙박료의 50%만 돌려주었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나 원망했었는데 나만 피해자가 아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갑작스런 폭설로 비행기 수백 편이 결항되서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고, 사우스웨스트 항공편을 예매한 사람들은 며칠째 공항에서 아우성이었다. 또 다른 나의 지인도 오버부킹을 받은 항공사때문에 탑승을 포기할 3명을 찾느라 세 시간째 항공편이 연착되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여기는 이런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미국이다. 늘 항공편이 지연이나 취소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연말이나 연휴에는 오히려 여행을 가지 않고 집에 머무른다던 현지 교민들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하고 외롭고 고요했던 크리스마스가 지나간 뒤, 우리 가족은 만날 수 있었다. 거창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특별한 어딘가를 가지 않아도 가족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일임을 새삼 느끼게 됐다. 아이는 디즈니랜드는 못 갔지만 모처럼 엄마, 아빠와 함께 간 오리건 동물원에서 동물들도 보고 마음껏 뛰어다니며 충분히 즐거워했다.
미국에서의 내 인생 첫 크리스마스는 분명 최악이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기억에 남는, 잊지못할 크리스마스를 만들겠다던 내 계획은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고만큼 최악도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