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저는 연수중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UNC) 구내에서 운전을 하다가 ‘정지’ 표지판 앞에서
차를 멈추지 않고 지나쳐 200달러가 넘는 범칙금 티켓을 받았습니다. 캠퍼스의 한적한 도로였지만
변명할 여지가 없어 뒤따라온 순찰차에 이의 제기도 않고 법원에 순순히 벌금을 냈습니다. 속은 쓰
렸지만 미국 생활에 대한 수업료로 여기고 잊어버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미국 미주리
주 퍼거슨시에서 발생한 백인 경찰관의 10대 흑인 총격 사망 사건 후 이뤄진 퍼거슨시와 경찰에 대
한 미국 법무부의‘인종차별 실태조사 보고서’를 이달초 접하면서 흑인은 아니지만 “나도 혹시?”
그 때 여기서 표적단속을 당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가벼운 의심을 품게 됐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도 어쨌든 남북전쟁 당시 북부와 싸웠던 ‘남부’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교통 단속 적발
을 계기로 저는 몇 달간 미국의 치부인‘인종차별’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인종차별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인종차별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어떤지 등을 주의 깊게 지켜 봤습니다. 흑
인은 물론 소수인종(히스패닉, 아시안)들에 대한 주류 백인사회의 차별의식이 뿌리 뽑히지 않은 것
은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는 이에 대한 자기반성, 자기교정 능력을 갖고 있는 것
도 분명해 보입니다.
인종차별…은밀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흑인 대통령이 여유 있게 재선에 성공하고 큰 잡음 없이 국정운영을 하고 있는 점을 보면 미국사회
에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인종주의의 장벽은 허물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차별을 금지하는 강력한 제
도가 존재하고 흑인 뿐 아니라 히스패닉, 아시안 등 비(非) 백인인종들의 증가라는 인구사회학적 배
경(2000년 29%였던 비백인종 비중은 2012년 33%로 증가했습니다)도 과거와 같은 노골적인 인종주의
의 발호를 불가능하게 만든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종주의는 사라진 것일까요?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은밀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흑인
과 비백인종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이뤄지고 있기 떄문입니다. 퍼거슨시에 대한 미 법무부 보고서
는 매우 함축적입니다. 인종차별은 노골적이었습니다. 퍼거슨시 당국은 가난한 흑인들에게 교통 범
칙금과 경범죄 범칙금을 집중적으로 물리는 방식으로 부족한 시 재정을 메웠습니다. 퍼거슨시의 흑
인 인구는 67%이지만 과태료 부과 대상 위반행위로 소환장을 발부받는 사람은 90%가 흑인, 차량 불
심검문자의 85%가 흑인이었습니다. 퍼거슨시의 경찰의 흑인 비율은 7%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제가 사는 채플힐시처럼 흑인이 소수인 곳의 상황은 어떨까요? UNC의 학교 신문인‘데일리
타힐’은 지난 2월 관련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채플힐시의 백인 인구는 67.8%,
흑인 인구는 9.7%입니다. 그러나 차량 불심검문을 받는 사람의 25%가 흑인(2014년)이었습니다. 교
통법규 위반으로 법원 소환장을 받은 흑인(13.4%)의 비중은 인구비중보다 높았고, 반대로 법원에
소환되는 백인은 42.2%로 인구비중에 크게 미달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경찰들이 인종적 편견(bias)
에 빠져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최근 잇따라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대학내 남성 사교클럽(fraternity) 회원들의 행각도
미국 백인사회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의 일단을 드러냅니다. 이달초 오클라호마대의 남성 사교클럽
인 ‘시그마 알파 엡실론’(SAE) 소속 대학생들이 버스 안에서 “깜둥이는 우리 회원이 될 수 없
다”는 구호를 외치고 흑인들에 대한 사형(私刑) 암시하는 노래를 부른 동영상이 공개됐습니다.
파문이 확산된 가운데 매릴랜드 칼리지의 사교클럽인 ‘카파 시그마’ 소속의 한 학생도 흑인과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폭행을 권유하는 저속한 이메일을 회원들에게 보낸 일이 적발됐고, 노스캐
롤라이나주립대(NCSU)의‘피 카파 피’라는 사교클럽에서도 인종차별을 암시하는 노트가 발견됐습
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불거지자 계기로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NotJustSAE 라는
제목 아래 미국 대학의 사교클럽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포스팅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SAE
는 폐쇄조치를 당한 오클라호마대의 사교클럽입니다.
미국 대학내 사교클럽은 친목 위주로 운영되는 우리 대학의 동아리와는 좀 다르게 학교와 지역사회
의 인적ㆍ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며 졸업생들은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네트워크를 형성
합니다. 명문사교클럽은 일종의 지역사회 내에 ‘이너서클’을 형성하게 된다고 보면 되겠지요.
이들 사교클럽 내 인종주의를 연구해 온 코네티컷대 사회학과 매튜 휴이 교수에 따르면 100년 이상
된 유서 깊은 사교클럽들은 1960년대 후반까지 백인 이외에는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회칙을 갖
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흑인이나 아시아인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됐지만 이들 소수인종들은 클
럽에서 ‘마스코트’취급을 받거나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흑인과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과 배제에 의한 은밀한 왕따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지요. 휴이 교수는 이 클럽들이 몇 세
대에 걸쳐 백인들의 부, 지위, 권력을 전파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봅니다. 다소 과하게
평가하자면 이들 클럽들이 직간접적으로 미국 일부 백인 주류계층의 의식에 잠복돼 있는 인종주의
의 숙주 노릇을 해왔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호한 조치, 인종주의에 대한 반성능력
이처럼 인종주의는 미국 사회 저류에 잠복해 있지만 일단 이 인종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를 경우 이
에 대한 제재조치는 단호합니다. 인종주의는 그만큼 예민한 화두라는 반증이지요. 예를 들어 오클
라호마대 사교클럽 사건의 경우 문제의 발언을 한 2명의 학생은 바로 퇴학당했는데 공개적인 행위
가 아니라는 점에서, 미국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수정헌법 1조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 측은 돌아보지도 않고학생들에게 퇴학조
치를 했고 학생들은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으며 클럽은 폐쇄됐습니다.
퍼거슨시 논란과 관련해서도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지난달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제임스 코미 국장
이 공개석상에서 “미국의 법집행에는 인종적 편견이 있다. 미국이 기로에 서 있고 사회적인 토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인종주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아온 FBI의 수장으로서는 이례적
인 언급이었습니다.
인종주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기반성 노력은 이곳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에서도 실감할 수 있습니
다. 지난달 이 대학 농구팀을 36년간 이끌었던 감독 딘 스미스(1931~2015)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역
신문들은 몇 개면에 걸쳐 그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등 추모열기가 뜨거웠습니다. 딘 스미스 감독은
이 대학 농구팀을 이끌면서 879승을 거뒀고 1976년 올림픽에서 미국대표팀 감독도 맡았던 명장입니
다. 하지만 언론은 딘 스미스 감독의 농구 감독으로서의 역량만 평가하지 않고 인종차별에 강력히
반대해 온 인생역정을 비중있게 소개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1960년대초 이 대학 농구
팀을 이끌면서 대학 최초의 흑인 선수를 선발했고(1967년) 흑인 선수들에게 많은 기회를 줬습니다.
또한 이 지역 최초의 흑인 시장이 된 하워드 리가 채플힐에 정착할 때 끊이지 않던 백인 인종주의자
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기도 했습니다.
한편 현재 노스캐롤라이나대 캠퍼스에서는 이 대학의 유서깊은 건물인 ‘사운더스 홀’의 이름을
바꾸자는 개명 운동도 한창입니다. 건물의 이름을 딴 윌리엄 사운더스(1835~1891)가 과거 이 지역
에서 KKK단을 이끌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건물에 붙은 인명(人名)이 인종주의와 관련 있다는 이
유로 대학 내 다른 몇몇 건물들도 개명 대상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미국을 여행할 때마다 많은 도시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이름이 붙어있는 거리를 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을 암살했으면서도 마틴 루터 킹을 추모하는 나라. 인종주의에 대한 미국의 두 얼굴입
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