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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시락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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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시락 문화

김보미 경향신문 기자

편의점과 마트. 백화점과 식당. 식료품을 취급한다면 어떤 상점에서나 살 수 있는 도시락.

일본의 弁当(벤또, 도시락)하면 가성비와 편리성이 단연 장점으로 꼽힌다.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고 맛도 나쁘지 않은 한 끼. 점심시간 도쿄 거리는 도시락과 음료수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는 회사원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일본의 도시락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간편한 한 끼’보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한 끼’에 가깝다. 음식의 꾸밈새를 중시하는 일본의 문화가 응축돼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벤또는 일본의 음식 문화의 디오라마(ジオラマ·투시화)’라는 이야기도 있다. 계절에 맞는 요리를 봄이면 벚꽃, 가을이면 단풍이 가득한 자연으로 나가 맛보기 위해 도시락을 쌌던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음식을 정성스럽게 담는 도시락 통에도 벚꽃과 단풍을 옻칠로 그려 넣어 화려하게 장식했다. 눈으로는 아름다운 자연을, 입으로는 맛있는 음식을, 손으로는 도시락 통에 새긴 문양을 만져보며 촉감까지 즐기는, 오감을 위한 도시락이었다.

출처: お辮當箱博物館

교토 도시락박물관(お辮當箱博物館)은 일본의 도시락 역사를 소개하며 ‘도시락은 단순히 음식을 넣어 나르기 위한 용기가 아닌, 사용 후 씻고 반복 사용하는 것을 전제로 해, 매우 정갈하게 손질돼 있다’고 언급한다. 옛날 일본의 도시락은 옻칠 위에 금이나 은가루를 뿌리는 마키에蒔絵나 나전螺鈿 세공으로 벚꽃, 단풍, 반딧불이 등 각 계절에 맞는 문양을 넣었다. 도시락 외관에도 질감을 느낄 수 있게 한 디자인이다. 식사 뒤 사용할 수 있게 바둑판 모양으로 만든 도시락이나 전골도 먹을 수 있게 뜨거운 물을 담을 수 있는 도시락도 있다.

관광용 도시락을 뜻하는 提重(사게주·提げ重/提重箱)는 요리를 담은 함과 함께 각자 쓸 수 있는 접시, 젓가락, 술잔, 물통과 술통으로 구성돼 있다. 겨울철 탕을 끓일 수 있도록 화로가 붙어있는 냄비와 여름철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도시락 내부를 환기시키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것도 있다.

일본에서 도시락 문화가 시작된 것은 헤이안平安시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오니기리(주먹밥) 형태의 頓食(とんじき)와 쉽게 쉬지 않도록 조리한 쌀을 건조시킨 干飯을 휴대용 식량으로 가지고 다녔다. 전국戦国시대에는 무사가 출정할 때 군량을 허리(腰兵糧)에 찼다고 한다. 무사들은 干飯 외에도 볶은 현미(炒米)나 떡, 된장으로 도시락을 쌌다고 한다.

출처:위키피디아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가 그린 벚꽃놀이 그림「江戸名所 御殿山花盛」에도 돗자리 위에 도시락이 놓여있다.

‘弁当’라는 명칭은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때부터 소풍이나 여행, 다과회 같은 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형태로 칠기 등을 이용해 도시락을 만들었다.

상류층들이 벚꽃놀이나 단풍놀이를 가서 예쁜 것을 보며 맛있는 것을, 또 예쁘게, 잘 먹기 위해서 시작된 도시락 문화는 차츰 대중들의 문화로 확산됐지만 맛과 풍류를 동시에 즐기는 것은 그대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여행이나 소풍을 나갈 때 작은 함에 음식을 담아 허리에 매고(腰弁) 다녔다. 에도시대에는 노(能)와 가부키(歌舞伎)를 보러 온 사람들이 막과 막 사이에 특제 도시락을 먹었는데, 현재 ‘마쿠노우치벤또’(幕の内弁当)로 불리는 도시락의 기원이 이 같은 공연 중간에 먹던 도시락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마쿠노우치벤또는 검정깨나 매실 절임(우메보시)을 얹은 흰쌀밥과 생선구 혹은 계란말이나 튀김, 조림 등 반찬으로 얹은 것이다. 현재까지도 가장 보편적인 도시락의 모습으로 떠올리는 종류다.

또 그 시대에 이미 ハウトゥㅡ本(하우투·How to)이라는 책이 유행했는데, 제목 그대로 어떻게 소풍용 도시락을 만드는지, 도시락을 보자기로 예쁘게 싸는 방법 은 무엇인지 등을 설명한 내용이다. 나무상자에 도시락을 담아 파는 전문점도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가 ‘국민 건강 향상’을 위해 도시락을 장려했던 메이지시대明治에는 공무원, 회사원들이 일상에서도 허리에 도시락(腰弁)을 메고 다녔다. 기차를 타기 전 역에서 살 수 있는 駅弁(에끼벤)이 시작된 것도 이 때다. 1885년(메이지 18년) 우쓰노미야(宇都宮)역에서 주먹밥과 무절임을 대나무 껍질에 싸서 판 것이 시작으로 전해진다. 1차 대전 직후 빈곤가정이 늘어났던 다이쇼大正시대에는 ‘도시락의 빈부격차’도 커져 사회문제가 됐다. 이에 따라 급식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고 한다.

쇼와昭和시대에 들어와서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도시락 통이 인기를 얻었기 시작했다. 겨울 난방으로 난로를 떼는 학교가 많아 난로 위에 도시락을 놓고 데워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학교에서도 많이 보였던 풍경이다. 일본은 2차 대전 후 학교에서 점심급식이 전면 도입되면서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와서 먹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었다.

도시락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를 계기로 철도청이 ‘디스커버 재팬(ディスカバ ジャパン)’캠페인을 시작하면서다. 70년대 후반부터 테이크아웃 도시락 전문점(ホカ弁)이 많아졌는데, 지금도 어느 동네나 있는 도시락 전문점 ほっかほっか亭가 창업한 것도 1976년(쇼와 51 년)이다. 1980년대부터 편의점이나 전문점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것이 문화로 정착됐다.

편의점에 도시락을 납품하는 제조공장들이 24시간 가동의 대규모 체제로 확대된 90년대를 지나 2003년 무렵에는 공항 도시락(空弁そらべん), 일본도로공단이 만든 (速弁はやべん)도 나왔다. 나고야돔에서는 2005년 처음으로 야구를 보면서 먹는 球弁(たまべん)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2017년 기준으로 도시락 소매업 판매량은 5000억엔(약 5조원) 규모까지 성장했다.

풍류를 즐기기 위한 일본의 도시락은 리먼 쇼크로 전 세계가 경제위기에 빠져들면서 식비를 절감하기 위한 도구로 재부상했다. 2008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남성들을 부르는 ‘벤오또꼬(弁男子)’라는 말도 생겼다.

지금은 소셜미디어의 시대가 되면서 キャラ弁이라는 도시락이 유행하고 있다. Instagram에 #Kyaraben #キャラ弁를 검색하면 다양한 캐릭터의 얼굴을 음식으로 표현한 도시락 사진이 나온다. 도시락의 대량생산화가 가속화되면서 역으로 집에서 직접 만든 도시락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김으로 캐릭터의 얼굴을 만들 도안, 당근이나 소시지 등에 모양을 낼 수 있는 칼(커터) 등도 판매되고 있다.

출처: flickr @luckysund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