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워싱턴 연간 행사 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벚꽃 축제(Cherry Blossom Festival)를
다녀왔다. 행사 기간 중 100만명이 찾는다는 벚꽃 축제는 DC 관광 수입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큰 이벤트다.
축제 마지막 주 토요일인 지난 12일. 필자는 일찌감치 집에서 출발했다. 지역 일간지에서는
주차 전쟁을 피하려면 지하철을 이용하라고 거듭 당부했지만, 네 살배기 큰 아이와 돌이 갓
지난 둘째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려니 시쳇말로 ‘어마무시한’ 고생길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필자는 아침 일찍 나서 점심을 먹고 들어오겠다는 요량으로 길을
재촉했다. 메릴랜드에서 DC로 들어가는 도로 중 하나인 Cabin John Parkway는 다행히 한산
했지만, 비교적 가까운 뉴저지부터 일리노이와 미주리 번호판을 단 차량을 보니 벚꽃 축제의
인파를 짐작할 수 있었다.
DC 프레스빌딩 인근 주자창에 도착해 급하게 주차를 한 뒤 벚꽃 퍼레이드가 펼쳐질
Constitution Avenue로 향했다. 한쪽으로는 즐비한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반대편에는
워싱턴 모뉴먼트와 2차대전 기념공원을 끼고 있는 Constitution Avenue는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을 상징하는 도로라고 할 수 있다. DC에 도착한 9시30분경에는 이미 거대한 인파가
Constitution Avenue 양쪽에 늘어서서 10시에 시작할 퍼레이드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퍼레이드가 시작되고, 미 육해공 의장대 사열과 군악대의 연주, DC 경찰 기마대의 행렬,
거대한 애드벌룬이 지나가면서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일본 기모노를 입은
Cherry Blossom Queen의 행렬은 구경꾼들의 탄성을 자아냈고, 일본 마츠리(축제) 전통 복장을
한 일군의 젊은 남성들은 북을 치며 흥을 돋웠다. ‘한복과 사물놀이가 저들을 대신했으면’
하는 생각이 일순 스쳐 지났지만, 워싱턴 벚꽃의 유래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문화외교의 첨병인 워싱턴 벚꽃 축제의 상징성은 벚꽃 길이 조성된 ‘타이덜 베이슨’에
가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2차 대전 기념공원을 가로질러 타이덜 베이슨에 접어들면 일본
신사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탑과 워싱턴 벚꽃의 역사를 설명하는 조형물이 있다.
조형물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주인공으로, 밀약 당시 미 육군 장관을 지냈고 이후 미 27대
대통령이 된 인물)의 아내(헬렌 태프트)가 환히 웃고 있는 사진과 함께 미일 우호
(Friendship)의 상징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헬렌 태프트는 190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벚꽃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를 간파한 일본은
헨렌 태프트가 영부인이 된 후인 1912년 양국 우호의 표시로 3천 그루의 벚나무를 미국에
기증했다. 100년 전 선물이 결실을 거둬 미국 심장부에서 일본 문화 외교가 거리낌 없이
꽃피게 된 셈이다.
벚꽃 축제의 공식 퍼레이드가 끝난 뒤에는 몇 블럭 떨어진 곳에서 ‘사쿠라 마츠리’
(Sakura Matsuri)가 열렸다. 워싱턴 벚꽃 축제 기간에 열리는 행사로, 일본 문화를 소개
하고 일본 기업을 홍보하는 장으로 활용된다.
입장료는 어른 10달러, 12세 이하 아동은 무료다. 필자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티켓을
미리 끊어 입장했는데 여기에도 미국인들의 발길은 끊이질 않았다. 현장에서 현금으로
티켓을 사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고, 행사장 입구 한 켠에 비치된 현금 인출기 앞에는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 현금을 뽑는 인파가 꼬리를 물었다.
Japanese Street에 들어서자 일본 철도회사와 민영항공사인 ANA의 홍보 부스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좀 더 안쪽으로는 전통 야채절임과 과자, 요리를 판매하는 부스가 눈에
띄었다. 어떤 미국 여성은 야채 절임을 보자 ‘이게 김치냐’고 물어보는 통에 필자의
씁쓸함은 더욱 커졌다.
일본의 소프트 외교는 사쿠라 마츠리 행사에서도 어김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일본 공관
에는 별도의 다도 공간이 있어 공관을 방문하는 외교 사절에게 다도 체험의 기회를 제공
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행사장 중간쯤에는 다도와 기모노
체험 부스가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은 미국인들은 길게 줄을 선 채로 자신의 차례를
끈기 있게 기다렸고, 기모노를 입고 찻잔을 든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또 다른 아동 체험 코너에서는 어떤 미국인이 ‘하지메 마시떼’(はじめまして.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미국 아이들에게 간단한 일본어를 가르쳐주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일본의 모기업체 홍보 요원이 거리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쇼핑백을 거머쥐고 서둘러
행사장을 빠져 나왔지만 왠지 모를 답답함은 여전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푸드코트에
들러 쇼핑백을 열어보니 일본 지도제작 업체의 홍보 책자와 지도가 들어 있었다.
벚꽃 축제의 마지막 한방이라고 해야 할러나. 혹시나 해서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지도를
펼쳐 보니 역시나 동해는 일본해로 표기돼 있었다. 버지니아 동해 병기 법안의 성과에
맞서 일본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축제에 참석한 백만 미국민을 겨냥해 영리한 민간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나마 푸드코트에서 만난 한 미국 여성의 말이 약간이나마 위안이 됐다. 그 여성은
사쿠라 마츠리 행사 입장에 20달러를 썼는데 내용에 비해 돈이 아깝다라는 촌평을
내놓았다.
하지만,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일본 벚꽃 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 왕벚나무’
라는 뉴스가 생각나면서 마음속에 꾹꾹 눌러뒀던 착잡함은 더욱 커졌다. 워싱턴 벚꽃
축제를 앞두고 한국에서는 일본 벚꽃의 원산지가 제주도 왕벚나무라는 소식이 전파를 탔고,
‘사실을 왜곡하고 벚꽃을 자국의 꽃으로 홍보하는 일본은 파렴치하다’는 논조도 이어
졌다. 그러나 이날 필자가 워싱턴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 했고, 따사로운 햇살에 빛나는 눈부신 벚꽃을 바라보며 그저 행복한 주말을
즐길 뿐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으면 사실이 된다’라는 명제 앞에 ‘일본 벚꽃의
원산지는 제주도 왕벚나무’라는 외침이 공허하게 느껴진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