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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함께 살아가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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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함께 살아가는 미국

미국에서 재난은 생활 속의 일부다. 여름과 가을마다 찾아오는 동부의 대형 허리케인, 잊을 만하면 서부를 때리는 산불과 지진, 불시에 나타났다가 지역을 초토화하고 사라지는 내륙의 토네이도, 오대호 인근 곳곳을 마비시키는 강추위, 사계절이 따뜻한 남부의 교통을 마비시키는 기습 폭설 등 미국은 연중 크고 작은 자연 재난·재해와 함께 살아간다.

미국에 와서 맨 처음 미국인들과 미국 정부가 이러한 재난에 대처하는 모습을 봤을 땐 “너무 오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난해 가을 동부에 허리케인이 강타했을 때의 일이다. 이 허리케인은 이미 바하마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해안가를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그 피해 상황이 어마어마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있는 내륙 깊이 들이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미국 기상 당국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의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상당수 대형 마트에선 생수가 동이 난 것을 직접 목격했다. 화장실 휴지 등과 같은 일부 생활용품과 스파게티 면이나 캔 등 비상식량도 사재기 수준으로 팔려나갔다.

사진 1)최근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 코스트코 매장에서도 동이 난 생수

이런 미국인의 사재기 습관은 최근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 전 세계에 생생하게 전해졌다. 무엇보다 화장실 휴지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특이하다. 물, 우유, 고기 등은 비록 일찍 판매 완료되더라도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어느 정도 채워진다. 하지만 화장실 휴지는 코스트코 같은 초대형 마트에서 개장 시간 전부터 줄을 서더라도 입맛만 다시고 돌아오기 일쑤다. 다음날도 마찬가지다. 마스크, 손 세정제, 알콜 등은 벌써 한, 두 달 전부터 미국에서 실종됐다. 일부에선 중국인들이 사재기를 해서 그렇다는 평가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재난에 대한 백인과 흑인들 특유의 두려움이 심하게 작동한 인상이다. 실제 내가 사는 타운하우스 옆집 백인은 외국인인 우리 가족에게 “화장실 휴지 확보했어? 우리 집에 많이 있으니 혹시 부족하면 얘기하라”며 ‘사재기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미국 학교와 공공기관들도 재난을 상당히 두려워하며 몸을 사린다. 두 달 전 이곳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에 지난 겨울 들어 처음으로 눈다운 눈이 내린 날 이곳 교육청은 초비상이었다. 한국에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의 함박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교육청은 당일은 물론, 다음날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제설 장비가 충분하지 않고, 만약 스쿨버스 통학 중 교통사고라도 나면 학부모들로부터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 달 전엔 이곳에 느닷없이 토네이도 같은 강풍이 들이닥친 적이 있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에 불과 30여 분 영향을 미친 강풍 예보 하나에 학교는 모든 아이들을 조기 하교 시켰다. 아이들은 신이 났지만 교육청의 긴급 전화 연락을 받고 모든 일정을 취소해야 했던 부모들에겐 한바탕 대소동이었다.

재난이 미국 생활 속의 일부로 자리 잡힌 만큼 이에 대응하는 미국인과 미국 정부의 태도는 매우 시스템적이다. 민감한 재난과 범죄가 발생하면 자기가 소속된 학교, 직장, 교육청 등에서 전화나 메일이 날아 온다. 이곳 교육청은 영어를 못 알아듣는 한국인을 위해 한국어로 한번, 영어로 한번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정확히 알린다. 전화를 받지 못하면 받을 때까지 계속 전화가 온다. 이 전화는 새벽에 울리기도 한다.

미국인들이 재난에 민감한 만큼 미국 기상 당국의 일기예보는 매우 정확한 편이다. 전날 오후 3시에 기습 폭우가 예보됐다면 정확히 그 시간대에 폭우가 쏟아지는 것을 자주 체험했다. 토네이도의 경우도 발생 즉시 미국인들에게 비상이 걸리고 기상 당국은 이동 경로 예측에 들어간다. 미국 기상 당국은 정확한 일기예보나 허리케인 및 토네이도 추적을 위해 헬기나 비행기를 띄우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늘에서 감시하며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것만큼 정확도가 높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역 방송들은 재난에 사활을 걸며 보도한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 있는 종군 기자처럼 허리케인의 한 가운데서 흥미진진하게 실황중계를 하는 기자들을 보면 참 존경스러울 정도다.

사진 2)미국 지역 방송의 재난 보도 장면

미국인들의 불안감이 유독 크기 때문에 이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으기엔 재난 방송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지역 신문이나 온라인 매체도 재난 보도를 통해 존재감을 과시하고 안정적인 경영을 이끈다. 한국의 지역 언론은 사실상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지만, 이곳 지역 언론들은 재난을 통해 우뚝 솟은 사례들이 있다. 이곳 노스캐롤라이나엔 ‘뉴스 앤 옵저버’ (News&Observer)라는 지역 언론사가 있다. 이 매체는 날씨와 교통, 그리고 사건사고 정보를 모바일 플랫폼과 결합해 그들만의 지역뉴스를 특화해서 새로운 온라인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대성공을 거둔 매체다. 재난과 관련해 퓰리처상 등 다수의 권위 있는 상을 연달아 타는 성과도 냈다. 지진의 나라 일본의 국민은 늘 지진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일본 특유의 수준 높은 재난 시스템을 갖췄다. 미국도 마찬가지 같다. 한 해 수많은 자연 재난을 체험하는 미국과 미국인들 역시 자기들만의 독특한 방식을 통해 재난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